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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군의 도하작전과 국군의 대응조치Ⅰ.김포지역 6.25전쟁사


2. 북한군의 도하작전과 국군의 대응조치

1) 김포지구의 병력배치 상황

(1) 제12연대 제2대대(-)의 재편성

한강 북안의 개성지구에서 38도선의 경계임무를 맡고 있던 제1사단 제12연대(전성호 대령)는 25일 새벽에 적의 공격으로 그 날을 미처 넘기지 못한 채 정면의 제2대대와 예성강 서쪽 연안지구의 제3대대가 남쪽으로 밀리게 되었다.8)

제12연대 제2대대(한순화 소령)는 그 일부가 문산쪽으로 철수하는 가운데 주력은 한강으로 남향하여 정관리(개성 동남쪽 10.5㎞) 일대의 포구에서 선박 10여척을 얻어 한강하구를 건너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대장 한순화 소령과 대대 S-3 전자열 중위 등 150여 명의 동 대대원이 김포반도 동북단의 하성면 시암리(통진 동북쪽 10㎞) 부근에 6월 25일 19:00 전후경에 상륙했다.

저녁 무렵 제3대대의 부대대장 박광윤(朴光允 경기양평. 육사3기. 대령예편) 대위와 제11중대장 백문 중위 등 제3대대의 일부가 합세되어 집결병력은 모두 600명으로 불어났다.

제2대대장은 제3대대와의 혼성병력 600여명을 4개 중대로 재편하여, 대대본부를 월곶면으로 이전하는 동시에 하성면 가금리에서 월곶면 강녕포에 이르는 강안에 3대 중대를 배치하고, 1개 중대를 월곶면 북쪽고지에 예비로 확보하였다. 대대는 14:00경 진지편성을 끝내고 경계태세에 들어가게 되었다.9)

각주)
8)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제1권, 1977, p.661
9)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부대를 재편성하고 부대대장 전면식 대위에게 대대를 지휘를 맡기고 제1사단 백선엽 사단장으로부터 “지체말고 봉일천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다시 통진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제12연대 제2대대는 육군본부의 지시에 의해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작전통제하에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원대복귀 할 수 없게 된 제12연대 제2대대는 이날부터 김포지구에서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2)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의 편성과 배치

6월 25일 저녁, 개성에서 철수한 제12연대 제2대대는 하성면 시암리 부근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출동한 기갑연대와 장갑소대는 그 반대쪽의 하안에서 각각 전후좌우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밤을 새웠는데, 26일 날이 밝자 전황의 윤곽이 들어나기 시작하였다.

김포반도로 북한군의 도하작전 징후는 6월 26일 오전부터 포착되기 시작했다. 곧 6월 25일 저녁 옹진반도의 강령을 떠난 북한군 제14연대는 다음날 영정포로 집결하여 도하지점을 정찰하면서 도하용 대ㆍ소 선박을 수집하는 등 준비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시점 육군본부 작전담당자들은 김포반도에서 적의 징후와 도하 기도를 포착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대책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군이 김포반도에 상륙하여 김포가도를 따라 영등포, 노량진 일대를 우회한다면 아군으로서는 후방이 크게 위협받게 되는 작전상 위기를 맞게 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26일 오전 김포지구 전투사령부를 편성(육군본부 작전명령 제97호(1950.6.27. 10:00), 구두명령은 26일 오전에 하달)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육본 수뇌부는 김포지구 한강하구의 넒은 강폭으로 적이 쉽게 도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미온적인 조치만을 취했다.

즉 보병학교의 제3차(6.18-8.5) 고급반 학생이던 계인주 대령을 이날 아침 남산학교장으로 복귀시킴과 동시에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김포지구에 있는 모든 병력을 통합 지휘하여 적의 도하를 막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갑연대 일부를 증원하고, 보병학교의 학생연대 후보생(갑종간부)으로써 1개 대대를 급편하여 김포반도에 투입하는 정도의 미봉책만을 강구하였다.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의 편성과 배치상황>

● 전투사령부 : 김포경찰서에 전술지휘소 설치
 -계인주 대령은 남산학교(주 정보학교) 기간요원들을 주축으로 하여 지휘부를 편성하였으나 통신장비 등의 불비로 인하여 그의 작전 통제 하에 있는 부대들의 지휘가 어려운데다, 편제상의 부대가 아닌 여러 개의 부대들이 분산 배치된 관계로 지휘체계마저 제대로 확립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 제12연대 제2대대(혼성)
◯ 대대본부 : 통진(월곶면)
◯ 제5중대 : 월곶면 용강리 북서쪽 무명고지(BS 8382)
◯ 제7중대 : 101고지(BS 8580)
◯ 제8중대 : 월곶면 조강리(BS 8880) 99고지
◯ 제6중대 : 대대 예비, 통진(월곶면) 서쪽 무명고지에 배치

●남산학교 : 월곶면 조강리
공병학교 및 남산학교 기간요원 50여명으로 혼성 편성한 증강된 1개 소대 규모

●기갑연대 제 3대대(도보수색대대) : 128고지 서쪽 기슭(강변)일대
대대 본부중대 화기소대 및 제9중대를 대대장 강문헌(姜文憲)대위가 지휘

●기갑연대 제1대대(장갑대대) : 장갑 제2중대 및 제2대대(기병수색대대) 제7중대의 2개 중대를 제1대대장 박무열(朴武烈) 소령이 지휘
대대본부 : 통진(월곶면)
장갑 제2중대 : 월곶면 조강리, 강령포, 128고지 남단 48번 도로상에 각1개 소대씩 배치
기병 제7중대 : 월곶면 포내리(염하 동쪽 강변;BS 8275) 일대

●보국대대(-) : 대나루(현 김포CC 오른쪽 고갯길) 남쪽 151고지(BS837750) 일대(월곶면 포내리)
26일 오전, 보국대대장 방원철(方圓哲) 소령이 육군본부에 출두하여 전투에 참전할 것을 자원한 결과, 김포반도 방어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어, 대대장이 직접 1개 중대-병력 100명 미만, 장비 일제99식 및 38식 소총-를 지휘하여 김포로 출동하였다.

●보병학교 후보생대대 : 갈뫼-72고지(BS 859757) 일대(월곶면 갈산리)

26일 오후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보병학교 공격전술학 교관 장영문(張泳文) 소령이 후보생 대대장에 임명되었으며, 갑종 간부후보생 제2ㆍ제3기와 포병 사관후보생 제1기, 그리고 병기 사관후보생 제4기와 일반 공병 후보생 제5기의 총500여 명으로 4개 중대를 편성, 김포로 출동하였다.

사관후보생들은 M-1소총 사격술 훈련까지 받았으나 실제 실탄사격은 실시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게다가 그들에게는 지급된 것은 그들이 조작법도 배우지 않은 일제 99식과 38식 소총이었으므로 이 대대가 과연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을는지 의심스러운 실정이었다.

계인주 사령관은 사령부 편성이 끝나는 즉시 전날 개화산에서 밤을 새운 남산, 공병학교의 혼성병력 50여 명을 우선 조강리(월곶면 조강리)로 파견하여 도하장소의 경계에 임하게 하고, 병기관인 조한춘 중위를 육본과 부평의 제1병기대대(김창배 소령)로 보내 소요 탄약을 확보하도록 조치하였다.

전투사령부는 병력이 김포읍에 도착하는 대로, 반도 북단의 월곶면 문수산(376고지)을 중심으로 북쪽 한강변의 월곶면 조강리-강녕포와 그리고 북쪽의 염하변(월곶면 포내리)에 각각 배치하여 반도의 서북쪽 지역에 방어의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아무런 사전준비 없이 생소한 지역에 투입된 데다 통신수단이 확보되지 않아, 부대 간의 횡적인 연락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사령부의 종적인 지휘계통도 유명무실 그것이었다. 각 병사의 방어의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3) 북한군 도하공격의 전초전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지휘 하에 들어간 각 부대, 그 중에서 제12연대 제2대대는 6월 26일 16:00 무렵 월곶면 강녕포-조강리 대안의 하조강리와 석류포 부근에서 북한군의 도하지점 정찰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로부터 2시간 후 하조강리를 떠난 수척의 어선이 강녕포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 방어는 제12연대 제5중대와 장갑 1개 소대가 맡고 있었다. 2개 중대 규모로 추산되는 북한군을 태운 어선이 강녕포 부근 강변에 도착하여 하선을 시작하였을 때 기습적인 일제사격을 가해 북한군의 도하는 실패하였다.

또한 월곶면 조강리 한강변 둑에 배치된 장갑 1개 소대(곽응철 소위)는 석류포에서 화물선을 끌고 접근하는 북한군 발동선에 37㎜포-장갑차에 장치된 직사포-를 발사하여 격침시켰다.

그러나 북한군 제14연대는 한밤중을 이용하여 소규모 부대를 월곶면 강녕포 동쪽 무명고지와 180고지-보국대대 방어진지 후방;BS 843747-로 침투시켜, 다음날 27일 실시할 도하작전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2) 김포지구 공방전

(1) 북한군 제14연대의 기습

26일 삼경(三更)에 180고지로 침투하여 공격의 발판을 확보한 1개 중대 규모로 추산되는 북한군 제14연대의 선발대는 다음날 27일 이른 새벽 151고지에 배치된 국군 보국대대(-)를 배후에서 급습하였다.

   
▲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의 배치 및 북한군 제14연대의 도하상황

한편 월곶면 강녕포 일대에서는 27일 자정을 전후하여 제12연대 제5중대와 제7중대의 배치지역 사이의 무명고지로 침투한 북한군 제14연대의 일부 병력이 교두보 확보를 위한 발판을 굳혔다.

북한군은 새벽 선발대의 사격유도로 대안 하조강리 부근에 방렬된 122㎜곡사포가 일제히 포격을 개시한 가운데 북한군 제14연대의 주력이 각종어선에 분승하여 영정포를 떠나 한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월곶면 강녕포 서쪽 무명고지에 배치된 제12연대 제5중대는 북한군의 도하부대가 강변에 도착하여 상륙을 개시할 시기에 사격을 할 계획으로 그들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격을 중대 방어지역에 집중된 북한군의 122㎜ 곡사포탄에 의하여 진지가 크게 파괴된 데다가 그 동쪽 무명고지에 침투한 북한군 제14연대의 선발대가 월곶면 용강리로 진출하여 중대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결국 제12연대 제2대대의 한강변 방어선은 무너지고 제5중대와 제7중대는 월곶면으로 철수하게 되었으며 월곶면 조강리의 제12연대 제8중대와 남산학교 소속 병력 또한 접전도 하지 못한 채 월곶면으로 후퇴하게 이르렀다.

(2) 제12연대 제2대대의 역습 실패

제12연대 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한강변에 배치한 3개 중대가 모두 철수하게 되자 강녕포로부터 먼저 월곶면으로 철수한 장갑 1개 소대를 수습한 후 대대 예비인 제2중대를 지휘하여 28일 08:00에 역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포병의 공격준비 사격도 없이 행동을 개시한 역습부대가 월곶면 북쪽 1.5㎞ 지점의 고막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북한군의 122㎜곡사포 공격으로 진출이 어렵게 되었다. 이미 문수산을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 제14연대 일부병력이 기습적인 측방사격을 가했기 때문에 역습부대의 공격은 차단되었으며 결국 월곶면 지역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염하 강변에 배치된 기갑연대 제1대대 및 제3대대의 방어진지도 무너져 월곶면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월곶면에 집결한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주력부대는 갈뫼-72고지(월곶면 갈산리)에 배치된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의 엄호를 받으<제12연대 제2대대의 역습실패와 각 부대의 철수상황>

면서 장림(BS 8972)(통진읍 도사리(마송초 삼거리)으로 철수하였다.
겉고개(월곶면 남동쪽 3.5㎞)(통진읍 서암4리)에는 잔날 밤 180고지로 침투한 북한군이 이 고개를 확보하고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3) 장림일대의 지연전(현 통진읍 도사리 마송초 삼거리)

27일 11:00를 전후하여 장림으로 철수한 제12연대 제2대대(-)는 60고지를 중심으로 하여 급편방어진지를 준비하고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의 철수를 엄호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 무렵 갈뫼-72고지(월곶면 갈산리)를 방어하던 보병학교 후보생대대는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의 주력이 철수한지 얼마 후에 그 뒤를 추격하는 증강된 1개 소대 규모의 북한군을 격멸한 후 장림으로 철수하여 60고지 동쪽 구릉지에 방어진지를 급편 하였다.
장림은 월곶-김포-서울 통로(48번)와 장림-인천 도로(305번)의 분기점으로서 전술적으로 중요한 길목이었다.

   
▲ 제12연대 제2대대의 역습실패와 각 부대의 철수상황

후보생대대는 장림 삼거리 북쪽 구릉지에 진지를 구축하여 장림=김포읍의 도로를 제압하고 제12연대 제2대대는 일부가 한강변에서 분산되었으므로 제2중대로써 그 남쪽의 천마산(60고지) 일대에 진지를 급편하여 장림-양곡(장림 남쪽 4㎞)간의 도로를 차단하였다.

증강된 북한군은 1개 대대규모로서 각종 중화기와 함께 문수산 일대를 석권하고 곧 통진-김포가도를 따라 공격을 계속하여 국군이 방어선을 치고 있는 장림지구에 120㎜ 박격포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의 추격은 대단히 빨랐다. 제12연대 2대대와 보병학교 후보생대대가 미처 상호지원을 위한 협조를 할 사이도 없이 증강된 1개 대대를 장림에 투입하여 공격개시 20분만인 13:00를 전후하여 먼저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의 방어진지가 돌파되어 김포읍 쪽으로 후퇴하였으며. 또한 좌측의 제12연대 제2대대도 양곡방면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로써 북한군은 이날 오후 김포평야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4) 운유산-73고지 방어선 편성(양촌면 석모리 일대)

장림에서 양곡을 거쳐 양촌면 구래리로 철수한 제12연대 제2대대(-)(한순화 소령)는 낙오병을 수습하면서 58고지(BS 911678)-소마산(양촌면 마산리)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305번 도로를 따라 남하할 것으로 예상되는 북한군에 대비하였다. 이 때 기갑연대 혼성병력과 남산학교는 김포읍에 집결하였고 보국대대는 영등포의 본대로 복귀하였다.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장영문 소령)는 15:00에 58고지 동쪽 2㎞ 지점에 있는 운유산(양촌면 석모리)에 방어진지를 편성하면서 한편으로는 추격하는 북한군과 교전하던 중 대대장 장영문 소령이 전사하고 부대대장 김광순(金光淳) 소령이 대대를 지휘하였다.

이때에 북한군 기마대가 운유산 방어선을 돌파하여 김포를 향해 치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김포에 집결하여 운유산 쪽으로 진출 중이던 기갑연대 제2중대(장갑중대)가 그 도중 북한군 기마대와 조우하면서 이를 격퇴시킴으로써 김포의 조기 함락을 극적으로 모면할 수 있었다.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의 일부병력이 시흥으로 철수하고 이에 당황한 제12연대 제2대대의 낙오병과 일부 병력이 부평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58고지-운유산 방어선에 배치된 국군 병력은 도합 1개 대대 규모에도 미달되는 실정이었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육군본부에 병력증원을 요청하고 부평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들로 하여금 각기 전투부대를 편성하게 하는 한편 제1병기대대 병기고에 보유중인 M-1 소총을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에 지급하여 99식 소총과 교환시켰다.

육군본부는 김포반도의 전황이 점점 국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가자 제3사단(유승열 대령) 제22연대(강태민 중령) 제3대대(대대장 손영을(孫永乙) 소령)-6월 25일 오후 용산에 도착, 제8연대 영내에서 대기-와 6.25 이틀 전에 집단휴가가 부여되었던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 제3대대(대대장 박태운(朴泰云) 소령)-휴가 중 복귀한 장병으로 재편성, 실병력 2개 중대 규모-그리고 26일 가평으로 출동하였다가 서울로 복귀한 기갑연대 도보수색대대 제8중대를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하였다.

전투력이 두 배 이상으로 증강된 김포지구 전투사령부는 김포방어를 위한 마지막 보루인 운유산-73고지 방어선을 편성할 수 있게 되었다.

저녁 무렵 김포읍에 집결한 대대는 김포지구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운유산 동쪽의 73고지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대대는 그 좌측의 후보생대대와 저녁에 다시 증원된 제8연대 제3대대와 더불어 김포읍에 대한 최후 저지선을 방어하게 되었다.

이때 양곡의 제12연대 제2대대는 잔여병력이 150명에 불과해 김포읍으로 철수하여 재편에 들어갔다. 이날 낮에 김포읍에 집결한 기병 제7중대(김총성 중위)는 이때 한강변의 63고지에 배치되어 제22연대 제3대대 전방에서 적의 한강으로의 우회침투에 대비하였다.

이날 부평지구의 잔류 병력도 김포전선에 동원되었다. 제1공병단(윤태일 중령) 산하의 일부는 부평-김포읍 사이 계양산(395고지) 동쪽으로 추진되고 병기학교(심언봉 대령)에서는 기간장교(교관)로써 장교특전대를 편성하여 한강변의 고촌면 전호리 부근에 배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신장비의 미비 문제가 끝내 해결되지 않아 횡적 협조 및 연락은 거의 불가능하였으며 심지어는 사령부와 각 전투부대 간의 통신마저도 연락장교의 운용으로 겨우 유지되는 형편이었다.

   
▲ 운유산-73고지 방어선의 전투 상황

 

 

●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전술지휘소 : 김포
● 보병학교 후보생대대(-) : 운유산
● 제8연대 제3대대 : 운유산 우측(동쪽) 구릉지
● 기갑연대 제3대대(-) : 운곡-지경(BS 948690) 일대(현 김포2동; 장기동)
   ※28일 증원된 제8중대 포함
● 기갑연대 제2중대(장갑중대) : 지경(48번 도로 차단)(김포2동; 장기동)
● 제22연대 제3대대 : 지경 우측(동쪽) 구릉지-73고지(BS 965685)
  ※제3사단 참모장 우병옥(禹炳玉 ; 忠北 육사1기) 중령이 제22연대 제3대대와 동행하였으며 동 대대의 작전 지휘권을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에게 넘겨 준 후 사령부에 남아 사령관을 보좌하게 되었다.

● 기갑연대 제7중대 : 65고지-대촌(BS 9570)(김포2동; 운양동)
   ※한강변의 경계임무 수행
● 제1공병단 일부병력 : 계양산(부평 북쪽 4㎞)을 확보(인천광역시 부평구 계양동)
● 병기학교 장교특전대 : 전호(행주나루터 차안 서쪽 1.3㎞)(고촌면 전호리)
   ※27일 아침 병기학교장은 한강변 경계임무를 부여받고 기간장교 및 교관 60명으로 장교특전대를 편성하여 이를 전호에 배치하였다.

● 제12연대 제2대대(-) :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예비로 전환, 김포에 집결 대기

(5) 북한군의 김포읍 점령

운유산-73고지 방어선에서의 첫 교전은 뜻밖에도 대촌(김포2동;운양동) 부근 한강변에서 벌어졌다. 곧 28일 새벽 북한군의 도하부대를 만재한 어선 수척이 만조가 되자 한강을 거슬러 항진하다가 대촌 북쪽 강변에 접안함으로써 그 남쪽 65고지에 배치된 기갑연대 제7중대(기병중대)(김촌성 중위)와 충돌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강변에 병력을 상륙시키기 전에 선상에 거치한 82㎜ 박격포로서 65고지의 기갑연대 제7중대를 제압한 후 상륙을 시도하였다.

이때 제7중대장 김촌성(金村成);육사 8기 특별) 중위는 모든 화력을 접근하는 북한군에게 집중시키면서 분전하였으나 전투력의 심한 격차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북한군의 박격포에 의해 마필이 포성에 놀라 요동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08:00 운유산-73고지의 제22연대 제3대대 방어진지에도 북한군의 공격준비 사격이 시작되고, 48번 도로에 한강을 도하한 소련제 T-34 전차 두 대를 앞세운 북한군 제14연대의 주력이 나타났다. 국군은 김포지구에서 처음으로 북한군 전차에 대하여 2ㆍ36인치 로케트포와 장갑차의 37㎜ 직사포를 사격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은 운유산-73고지 방어선의 일각이 무너졌다는 상황보고를 받자 곧 사령부 예비인 제12연대 제2대대(-)를 전방에 투입하였으나 만회할 수 없었다.

북한군의 포가 김포읍을 공격하자 10:00에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공군의 경비사령부와 함께 지휘소를 김포읍 동남쪽 2㎞의 가도상으로 철수하여 계인주 대령과 최용덕 준장 등이 대응책을 논의하였으나 이날 새벽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결국 전세가 기울어졌다는 판단 하에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11:00 정각에 김포 철수명령을 하달했다.

북한군이 영등포쪽으로 도하를 한다면 퇴로를 차단당할 것으로 내다보고 김포반도 중부에서 교착상태에 있는 동안 부대를 우선 부평지구로 철수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와 제12연대 제2대대(-)는 장릉산(김포1동)-계양산(인천)을 거쳐 부평으로 철수하였으며 나머지 부대는 전투사령부와 더불어 김포비행장으로 후퇴하였다. 이리하여 김포는 1950년 6월 28일 12:00를 전후하여 북한군이 점령하게 되었다.

한편 김포읍에서 석권한 북한군 제6사단은 부대를 전면 재정비하였다. 적은 김포반도 북단에 상륙을 시작한지 불과 30시간 만에 김포읍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다. 

   
▲ 일자별 김포전투사령관과 작전경과

 

 

<운유산-73고지 방어선의 배치 상황>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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