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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천상륙작전과 김포반도 상황Ⅰ.김포지역 6.25전쟁사

3. 인천상륙작전과 김포반도 상황
   (1950년 9월 15일 이후부터 21일까지)

1) 김포지역의 한국해병들

미 해병 제5연대와 같이 인천시가지 전투를 마친 한국 해병대는 경인가도를 따라 진격하여 부평을 점령한 다음 한강변의 정곡리까지 진출했다.

한강 상륙부대가 서울 탈환을 목표로 경인가도를 진격함에 따라 북한군 패잔병이 측면으로 도주하였으므로 김포반도 쪽은 북한군으로부터 역습을 받을 우려가 있고 특히 김포비행장에 대한 엄호를 위하여 김포지구 일대의 차단과 방어를 위해 작전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강도하 작전준비를 맡은 한국해병대 김윤근 소령이 지휘하는 제3대대는 9월 18일에 미해병 제5연대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독립적으로 김포와 부평간의 모든 지역을 경비하고 패잔병을 색출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3대대는 18일 17:00에 박촌리(인천 계양구)까지 진출하였고 제1대대는 정곡리로 진출하였다.

김포반도 쪽에는 약2개 대대의 북한군 병력과 부평지구에서 퇴각하여 온 패잔병들이 합류되어 일부는 한강을 도하했고 나머지 병력 약500명은 부대를 재편성하여 다시 반격을 시도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제3대대는 김포지역의 패잔병 소탕을 위해 김포 수로 제방 북서쪽의 넓은 지역을 목표로 우선 일차적으로 부평-김포읍간 지역을 탐색한 다음 제2단계로 김포읍 이북지역에서 강화도까지 확보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2)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김포상황

9월 19일 오후 사령부 정보참모실 소속의 정보대가 단지 적정을 파악할 목적으로 김포에 진출했었다. 그날로 활동을 마친 정보대는 사령부로 복귀하면서 파견대와 같은 성격의 소규모 병력을 김포에 잔류시켰다.

파견대의 선임자 오세동 대위는 치안 목적의 임시 조직체인 지방청년단 단원들과 함께 얼마 안 되는 대원들을 김포 외곽의 요소에 배치하는 한편 김포 중심가의 간판도 없는 한 음식점에 지휘본부를 설치하였다.

밤이 되자 한강하류의 나루터로 김포반도에 건너 온 북한군의 일부가 김포에 침투하였다. 중과부적으로 북한군에게 유린당한 파견대 본부에서는 오대위를 포함한 4명의 전사자 외에 또 수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뒤늦게 이 상황을 알게 된 사령부에서는 제3대대의 의한 즉각적인 김포 공격을 미해병 사단에 건의하였으나 승인되지 않았다. 이날 새벽부터 진행 중이던 한강 도하작전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고 한국 해병대 사령부와 제1대대는 곧 이동을 개시해야 할 시기였던 것이다.

9월 20일 제3대대는 김포반도 북서쪽 방어를 위하여 부대를 재배치하였다. 한강변 방어를 위하여 천등고개 북쪽의 96고지 일대에 제11중대를 두고 제1대대가 위치하고 있던 서해안 쪽의 검암리 일대에 제10중대를 이동시켰으며 김포-서울 간 도로를 중심으로 김포반도의 중앙지대를 방어할 수 있도록 김포 남동쪽 2㎞ 거리의 풍무리 일대에 제9중대를 전개시키는 동시에 대대본부도 화기중대와 함께 풍무리로 이동하였다.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김포를 지척의 전방에 두고 이 대대 역시 전방으로의 진출은 제한 받고 있었다. 구 부평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 사령부는 제3대대가 김포반도 패잔병 섬멸 작전을 하기에 앞서 정보탐색을 위해 정보참모부 예하 첩보부대 70명을 부평과 김포, 강화도에 출동시켰다.

오세동 대위가 지휘하는 첩보부대는 이날 새벽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김포읍을 중심으로 잠입하게 되었고 치안 목적의 임시 조직체인 지방청년단 단원들과 함께 김포외곾에 배치하는 한편 본부를 김포읍 안에 있는 우체국 건너편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첩보부대는 한강하류 나루터로 도하한 약150명으로 추산되는 북한군으로부터 기습을 받아 첩보부대장을 비롯하여 4명이 전사하였다.
이 사실을 전달받은 박촌리에 있던 제3대대 본부는 첩보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출발 김포읍 남방에 위치한 157고지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때 주민이 제공한 정보로 신리(김포비행장 서북방 약 8㎞) 에 북한군이 집결하여 있다는 것과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한강을 도하한 약 1개 대대의 병력이 재편성되어 역습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제3대대는 북한군이 집결하여 있는 신리일대에 81㎜와 60㎜ 박격포 공격을 가하고 2개 중대를 포위한 후 제9중대로 돌격해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제3대대는 이 전투로 북한군 120명을 포로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9월 21일 제3대대의 과업은 아침 일찍부터 각 중대별로 할당된 지역 내에서 패잔병에 대한 탐색 작전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한편 9월 19일 이후 계속 한강을 건너와 김포 이북 쪽에 집결 중이던 북한군 제107연대는 9월 20일 밤 무방비 상태의 김포에 진입하여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그 예하의 2개 대대를 김포 남동쪽으로 전개시켰다.

새벽 동틀 무렵까지는 그 선두 부대가 김포-서울 간 도로와 한강 남안을 따라 선수동과 향산리에 이르고 있었다. 북한군 부대들의 이 같은 전개는 김포비행장을 공격할 목적에서였다.

9월 21일 06:00쯤 이날의 작전 준비를 막 시작하려던 제3대대 본부에 인근 주민이 북한군의 출현 사실을 알려왔다.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상당수의 북한군이 선수동 마을에 들어와 아침 식사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대대장의 출동명령을 받은 제9중대장 황영 중위는 제1 및 제3소대를 우선 출동시켰다.

풍무리와 그 동쪽의 선수동 사이에는 아직 추수하지 않은 논들이 약500미터 폭으로 가로 놓여 있었다. 공격부대는 개활지를 통과 중 북한군의 사격을 받았다. 개활지를 덮은 짙은 안개 덕분으로 북한군의 사격이 치명적인 것은 못되었으나 공격 부대는 고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총격전의 영문을 모르는 채 제9중대의 잔류부대는 신리 일대에서 서성대는 또 다른 북한군 부대를 발견하고 공격에 나섰다.

대대본부에서는 고전하고 있는 제9중대의 최초 출동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장익삼 일조(일등병조)가 이끄는 대대 보급소대를 개활지 우측으로 우회 기동시켰다. 때마침 개활지를 덮었던 농무가 엷게 걷히기 시작하면서 북한군의 저항 또한 힘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김용선 중위가 지휘하는 고촌 방면의 제11중대는 실상 소부대 단위로 탐색 작전에 나서던 길이었으나 향산리 일대에서 분산 대기중이던 북한군들은 스스로 동요를 일으켜 싸우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북한군들은 앞을 다투어 김포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대대장 김윤근 소령은 화기중대를 추격부대로 동원하였다.

김포 중심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화기중대는 북한군의 저항을 받았다. 김포경찰서 북동쪽에 인접한 속칭 천주교 뒷산에 적 제107연대의 지휘부가 자리 잡고 있었던 때문이지만 이들 북한군의 저항도 오래 끌지는 못하였다.

야산 숲속에 위치해 있던 북한군의 지휘본부는 이광수 병조장이 이끄는 제2소대(로케트포 소대)의 급습을 받았다. 엄순길 수병의 제2분대에 붙들린 한 장교가 북한군 제107연대장이라는 것을 중대장 정중철 중위가 확인했다. 단독신문에 순순히 응하던 북한군 포로가 마실 물을 청하자 중대장은 연락병에게 물을 떠다 주도록 지시했다.

중대장은 북한군 장교 생포 사실을 알리기 위해 SCR-300 무전기로 대대장을 호출하는 동안 포로에 대한 주의를 잊고 있었다. 대대장에게 막 보고를 시작한 정중위의 카빈 소총을 포로가 순식간에 가로챘다. 때마침 수통에 물을 떠오던 연락병이 지체 없이 포로를 사살했으나 이미 정중위가 목숨을 빼앗긴 뒤였다.

천등고개 쪽으로 침투한 북한군의 일부는 제11중대가 포위하여 사살 또는 생포하였다.
김포와 그 주변에서 미처 도주하지 못한 북한군의 패잔병들은 제9중대와 화기중대에 대거 투항했다. 무려 300여명의 달하는 포로와 그리고 다량의 노획 무기가 미해병 사단에서 긴급 지원된 DUKW(수륙양용트럭)에 실려 인천으로 후송되었다.

9월 21일 오후 제3대대장 김윤근 소령은 화기중대를 대대본부 지역으로 복귀시키는 대신 제9중대를 김포로 재배치하였다. 이날 밤 최소한 중대 규모를 넘는 북한군이 제9중대에 역습을 감행하여 그 일부가 진내에까지 침투하였으나 다음날 새벽녘에는 모두 격퇴시켰다.

제1단계 김포반도 북한군 패잔병 소탕작전을 끝낸 제3대대는 제2단계 작전에 착수 김포읍 북쪽지역과 한강연안 지역 및 강화도까지 패잔병 소탕에 들어갔다.

김윤근 대대장은 대대본부를 월곶면 문수산 남방에 있는 월곶초등학교로 옮기고 문수산과 성동리 부근 그리고 한강하류 일대에 수색작전을 전개해 북한군 패잔병을 생포하거나 사살함으로써 김포반도의 치안을 마무리 했다.

밤사이 <미주리호>를 비롯한 다수의 미 해군 함정들에 의해서 지원된 함포 사격은 해병들이 적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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