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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만 하니 죽였다, 경찰은 더했다김경모(79세)/ 북변동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북변동>

죽일만 하니 죽였다, 경찰은 더했다

김포 11곳의 학살 현장 직접 참여 
명사수로 호국군 조직 적극참여
천주교 뒷산 등 20여일 직접 전투

   
▲ 김경모(79세)/ 북변동
“8.15해방이 되었을 때 중학교 2학년 이었습니다. 21살 이었습니다. 민족청년단이 18세면 활동할 수 있었는데 이범석 장군의 휘하에 있었거든요.

전국의 결성대회에 많이 가보았구요. 황의식 중대장은 호국군을 창설했어요. 9개면에 4개 소대가 있었고요. 1개 중대에 편성되었어요.

그 이후 국군을 창설하고 호국군을 정부에서 해산을 시켰어요. 대부분의 호국군인들이 국군으로 갔어요. 사단이 없고 연대창설을 했다고요”
“6.25때 군인이 남하하면서 패잔병 등이 정신 순화교육을 받았어요. 일주일에서 열흘간 내무서에서 순화교육을 받았어요.

자아비판 하고 인민군대에 가라, 의용군을 지원하라는 교육인데 이리저리 회피하다가 박원재 대위와 지하호국군(국군 지하조직)을 만들어 지하조직 공작을 하게 되었어요. 경찰 가족, 국군에서 쳐진 사람들이 태극단을 조직하고 각서를 썼는데 ‘죽어도 좋다’라고 도장을 찍고 활동을 했어요.

그들이 본류에요. 지금도 그때는 얼씬도 안하고, 지금 호국단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때는 집에서 만나지도 못하고 콩밭에서 만났어요”

“무기를 모았는데 국군이 버리고 간 것을 오밤중, 세시 네 시에 가서 주어 와서 초가집에 꽂아놓았어요. 검단, 대곶, 하성, 통진에 오밤중에 가서 무기를 모아왔어요. 칼빈 9정, M111정 등 21정을 모아왔어요”
  
“수복이 되면서 현역 호국군이 뒷산(천주교 뒷산)에 있었어요. 해병대도 안 들어오고 호국군이 향토방위하자 해서 무기 들고 지켰어요. 인민군이 후퇴했다가 김포에는 군인이 없다고 도로 들어가자고 했어요.

우리는 M1을 가졌고 면사무소에서 실탄 못가지고 간 것들을 가졌어요. 인민군것도 아시바총을 불 지르고 갔는데 일부 남은 것을 분해해서 수리했어요. 그 총을 가지고 싸웠어요. 김포에는 그때 인민군도 없고 군인도 없는 공방상태였어요. 9.28 수복 때요”

“6.25가 나고 김광희라고 사관학교 생도후보생이 여기 왔어요. 6.25가 났는데 말을 타고 왔더라고요. 소위 뻿지는 못 달고요. 인민군은 건너오고 탱크를 가지고 오는데 말을 타고 왔어요. 저항도 못하고 군이나 경찰이나 다 달아나고 인민군이 점령했어요.

내무서에서 우리같이 남하하지 못한 사람은 자수를 시켰어요. 30여명이요. 그래서 우리는 앞을 내다보고 무기를 수거해서 향토방위를 한 거예요”

“사단이 인천상륙을 하면서 좌익이 후퇴를 하면서 이리 밀려서 하성까지 갔어요. 인민군이 식량과 잠자리가 없으니 야습을 했어요. 천주교 뒷산에 깃대가 밤에는 인민군 공화국기 낮에는 태극기가 휘날렸어요.

한국군은 영등포 부평, 검단까지 한 달간 공방상태였습니다. 인민군기가 보면 몸서리가 쳐졌어요. 그렇게 반복을 20일을 했어요. 우리 가족들이, 부인들이 밥을 해줬어요.

서장관서 옆에서요. 내 옆의 친구가 밥을 먹는데 국에 고춧가루를 넣어 먹고 있어서 웬 고춧가루냐고 했더니 고춧가루가 아니고 코피가 터져서 그렇게 보인 거예요. 주먹밥을 하루 한 끼를 먹거나 혹은 못 먹기도 했어요”

“12용사 죽은 사람들은 밤에 해병대 정규부대가 들어오면서 그렇게 된 거예요. 몇 개 소대가 분산해서 김포 에워싸 들어왔는데 그 전날 해병대가 G2(먼저 최고 선발대)라고 13명인가 차를 타고 왔어요.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있느냐’고 물어서 ‘13명이다’ 했는데 ‘경찰 낙오자 가지고 있는 것 다 회수해라’ 하고 빼앗았어요.

호국군이 4명씩 배당되었는데 ‘총이 없으니 자 버린 거라 이말이지’ 다리목마다 지키고 있었는데 총이 있으면 안 죽었지. 해병대가 호국군 출신을 인정을 못해서 G2대장이 무장해제 다 무기압수해서 다 가버렸어요. 그래서 바닥 빨갱이가 데리고 와서 살상하게 된 거예요”

“해병대가 무기를 부대로 보내고 해병대는 잤어요. 지금 김포약국자리에서 인솔자 장교 한명 남고, 하사관이 7명이 죽었어요. 황금상 새집자리 이층에서 해병대 7명이 자다가 죽은 겁니다. 사우리 바닥빨갱이가 데리고 와서 밑에서 총으로 쏴서 죽었습니다.

대장은 따로 자다가 위기를 모면했고 내가 서장 관사에서 자다가 총소리를 듣고 살살 들어가니 두 사람은 피가 낭자하고, 2명은 계단을 내려오다 층층대에서 죽고, 3명은 이층의 마룻바닥에서 죽었습니다. ‘그 안에 누가 있나?’하고 물으니 대장이 손들고 나와 대장이 ‘여기 총 있으니 가지고 가라’해서 M2총을 가지고 20년 이상을 소지했습니다.

제대 후 보신용으로 보유한 것입니다. 대장은 후에 중앙정보부 과장으로 있다가 일부러 나를 만나러 화 전국야간통행증, 무기 휴대증을 해주어서 총을 20년 이상을 소지 할 수 있었습니다”

   
▲ 김덕문의 12용사의 영혼을 위로하는 공적비. 김경모씨가 충현탑과 공적비가 있는 현장에서 옛 기억을 되살렸다.

“12동지를 잡아 학살 했는데 한구덩이에서 했어요. 고양군 송포면으로 끌려가 총살당했어요. 난 9사단에 가서 있는데 막 그 뉴스가 나오니 ‘야 너 집에 갔다 와라’하더군요. 당시에 박원재씨는 9사단 30연대 2대대 5중대장을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진영에서 좌익진영을 잡아서 경찰 유치장에 가두고, 그 소식을 듣고 호국군 대원과 그 가족들이 죽이기 시작했어요. 해병대가 12명이 사상자가 나니 G2완장을 줄 테니 G2 1개 분대에 배치하라고 해서 정식으로 3, 5대대로 활약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해병대에 현지 입대 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가족 있는, 노인을 모신 이는 평양 앞까지 갔다가 인수해 주고 도로 와서 국군을 갔고요. 그때 바로 따라 갔던 사람들은 3기 특기로 들어갔어요. 교전을 해도 우리가 앞장섰어요.

호국군이 선발대이고 해병대는 따라 다녔습니다. 지역을 잘 모르니 우리가 앞장섰습니다. 제다 뒤로 쳐졌어요. 해병대도 7발인데 실탄을 장전을 못하는 이도 있었어요. 8발이 다 나가도 장전을 못해서 살살 기어서 고장 났다고 가져오곤 했어요”

“9.28이 어느 정도 안정되니 윤원표 대동청년단 단장이 호국군과는 무관하지만 호국청년단이 희생자를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확인하고 일부를 수습해서 묻어놓았다가 충현탑 밑에 화장해서 모셨어요. 매해 시에서 모아서 제사를 지내주다가 안지내주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2년간 지냈어요. 전화를 걸어서 호국출신들한테 돈을 만원씩 모아 제삿날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자유총연맹에서 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시에서 지내게 되었어요”

“인민군과의 전투는 수십 번 했어요. 천주교 위 뒷산에 경기관총을 놓고 걸포리 쪽에서 인민군이 움직이면 기관포로 쐈어요. 낮이면 방어를 하고 그 전투를 한 기간이 20일, 매일이었어요. 우리는 급하면 뒷산에서 내려오고, 낮이면 올라갔어요.

33명이 호국단 정원이었는데 호국단 정원의 자녀 어린 사람들도 5명이 있었어요. 우리보다 5살 정도 아래 열 대여섯 살 아이들인데 따라 다녔어요. 군사교육을 못 받고 청년 운동하던 이 사람들은 총을 못 쐈어요”

“김신애는 샘재 한옥마을 감바위에서 인민군과의 교전 중에 죽었어요. 김신애는 혼자 싸우다 총에 맞아 죽었어요. 지금의 하나로 마트 쪽에서 인민군 4명이 내려오고 우리는 총을 가진 사람이 3명이었는데 김신애는 칼빈소총 가지고 싸우다 아침 새벽에 죽었어요. 먼동이 트면서 인민군이 배를 타고 감바위로 건너오면서 공항습격을 목표로 가다가 김포에서 반항에 부딪친 겁니다.

김신애는 다른 3명의 호국군과 헤어져 김포읍 호국단에 인민군이 온 것을 알리러 들어온다고 하다가 인민군과 마주쳐서 총을 맞았던 겁니다. 김포에서는 사태보고 받고 7,8명이 나와 보니 벌써 죽었어요”

“논에 묻을 수가 없어서 김경춘 순경네 집 모퉁이에 대강 묻고 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4-5년 후 내가 제대한 후 시청 사회과에서 화장을 해서 12용사들과 합사 했어요. 1955-56년쯤입니다. 중앙정보부에서 촬영을 나왔을 때 죽기는 여기서 죽고 싸움은 여기서 했다고 말해 주었어요.

김신애와 덕문이 연금을 타게 해 주었는데도 가족들이 없어서 못 탔어요. 덕문이도 유복자 딸이 있었고 김신애도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없어서 못 탔어요”

“전투를 많이 한 것은 서변리 쪽이었어요. 경찰서장 관사가 총본부였어요. 어디 인민군이 온다고 정보가 마을 주민들한테서 와요. 지금 김포예식장이 수리조합이었고요. 감정리 옹주물은 거의 좌익이었어요. 90-100%였어요.

서변리 쪽은 옹주물 사람들이 몰고 들어왔어요. 총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었어요. 호국단은 보초를 설 수가 없고 어디 어디에 뭉쳐서 있다가 정보가 오면 나갔어요.

걸포리 서변리 샘재 옹주물 등이요. 급할 때 면사무소에 남아 있던 예광탄을 터뜨려 예광탄이 뜨면 ‘데부뚝’(제방둑)에서 상대를 했어요. 거리는 4-50미터로 살살 기고요. 그때는 수수농사를 많이해 가을걷이를 해 세워놓았는데 그것을 세워놓은 곳에 인민군이 은폐해 있다가 한강 그쪽의 갈 땅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나오고는 했거든요”

“해병대와 미군들이 충원이 되고 인민군을 잡으면 포로에게 꼬리표를 달고 가라고 했어요. 하도 많으니 꼬리포를 달아주고 ‘이것이 없으면 너는 죽는다’고 말하며 대대로 보냈어요.

그러면 거기서 인민군 낙오병 철장에 가두었다가 후방에서 포로수용소까지 제대로 보냈는지 몰라요. 운송할 힘이 없으니 능력껏 꼬리표를 달고 혼자 보내는 거예요. 그런 전쟁이었어요”

“경찰서에 진짜빨갱이 40명을 잡아넣었는데 인민군이 별안간 왔다는 바람에 다 놓쳐버린 적도 있어요. 밤으로 집집마다 다 뒤져서 5,60명 다 잡아서 경찰이 막 들어와서 가두어놓고 20-30명씩 데려가서 죽였어요.

그때는 경찰이 죽였어요. 한 70명 죽였어요. 굴창이 큰 굴창이에다 잡아넣고 죽였어요. 9.28때 10월 초였어요. 70명 죽이는 현장에 가 있었어요. 사람들이 겁에 질려 말 한마디 못했어요”

“경찰이 들어와서 구 경찰서 담 밑에서 7-8명의 걸포리 사람을 죽이니까 약이 올랐었어요. 걸포리 사람들을 대창으로 찔러 죽였거든요. 그래서 죽였어요. 10월 6,7일에 죽였어요. 70명은 패잔병들이었어요. 김포사람들이 아녜요. 김포에서 붙잡힌 사람들이예요.

이북에서 군인으로 내려왔다가 붙잡힌 사람들이예요. 포로수용소에 못 보낸 이유는 너무 많아서 곤란해서예요. 여기 사람들 죽이지 않았으면 그렇게 까지는 안 죽였어요. 경찰이 원대 복귀해서 민간인을 죽였다고 죽였습니다”

“바닥 빨갱이들은 당시에 이미 완전히 좌익세상이 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걸 믿고 날뛰었던 거예요. 나도 누군가가 보도연맹이라고 써 넣어서 나도 모르게 보도연맹이 되어 있었어요. 누군가 말하면 보도연맹이 되는 거예요.

그때 하루는 경찰에서 내게 말을 하더라고요. ‘너도 보도연맹이 되어있어서 그 사람은 아니라고 지워버렸다’고요. 그렇게 나도 모르게 보도연맹으로 있다 경찰이 신뢰하고 지워버렸어요”

“조카인 김영학(당시 27살)이는 대곶에서 죽임을 당했어요. 청주김씨 중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문씨와 김씨가 대곶에서 갈등하는 상황에 있었는데 당시 이하영이가 방위군 대장이고 문영만이는 감사인가 그랬고 이도진이는 선임하사 인데 문영만이가 사주를 해서 이하영, 이도진이가 학살했어요.

난 붙잡혀 갔다는 정보를 닷새 뒤에 듣고 쫒아가 보니 그 날 새벽에 죽였어요. 너무 화가 나서 죽인다고 난리, 난리를 쳤더니 이도진이가 오줌 누러 간다고 하고 도망갔어요.

정말 20여명 죽이려고 했는데 1명도 죽이지는 않았어요. 찾아 갔을 때 시체는 못 봤어요. 너무 속이상해서 물어보지 못했어요. 빨갱이도 아닌데 서로 김씨와 문씨등의 대립으로 죽였다니까요. 당시에는 양곡, 대곶을 합쳐서 죽이고 그랬으니까 그 날 저녁에 몇 명을 죽인지 몰라요”  

“사우리 안동네는 80%가 빨갱이였습니다. 이용운은 일본 와세다 대학 다니다 그 사람 하나가 빨갱이가 되니까 부락 전체 빨갱이가 되었어요. 월북자가 많았었요. 15여명 정도 있고, 죽인 사람은 5-6명 정도입니다. 그때 풍비박산이 되어서 나가서 살다가 다시 들어와 산 사람들도 있어요.

걸포리는 100% 우익이고요. 샘재도 심중기라고 심면장이 있어서 다 우익이라고 보았어요. 옹주물은 100% 좌익 정씨네가 많았어요. 풍무동은 더러 좌익이 있었어요. 북변동은 다 우익이었고요. 원당리도 드문드문 섞여있었어요”

“조리미도 바닥 빨갱이가 있었는데 인민군(의용군)보내느라 나쁜 짓을 해서 끌고 올라가라고 해서 내가 직접 죽였어요. 김 아무개였는데 돈이 있고 배운 사람이고 부자소리를 들어가면서도 그러더라고요. 나보다 6-7살 더 위였어요.

당시에 와세다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 5명이었는데 돈 있는 부자들이었어요. 그 사람들 다섯 명 다 월북해서 도지사급을 두 사람이 해먹은 걸로 알고 있어요. 한 명은 이용운 사우리 사람이고, 한 명은 검단면 대곡리의 김낙훈이라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직접 사살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나를 직접 붙잡아 매를 심하게 때린 사람은 내가 죽였어요. 괴롭힌 자들은 5-6명을 직접 쏴 죽였어요. 우리의 밭을 해 먹으면서도 지수의 자식이라고 소작인들이 욕을 해서 남편, 여성, 아들(동창)을 직접 죽이고 누이 동생은 다른 사람이 죽였나 그래요. 그들은 정말 악질적으로 앞장섰던 빨갱이들이었어요”

“고려공원 세 곳 이곳은 아주 큰 골창들이 있어서 밤 12시가 넘으면 끌고 와서 죽였어요. 첫 골창에서는 10명, 두 번째 골창은 17명, 세 번째 골창에서는 30명을 죽였다. 걸포리 사람 7-8명을 묶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바람에 이곳에서는 좀 더 추려야 하는데 추리지 않고 마구 죽였다 이곳은 경찰이 들어오기 전에 죽였던 곳이다”

“여우재 고개도 3곳이 있었다. 첫 번째 곳에서는 20명, 두 번째에서는 10명, 세 번째 더 큰 골짜기에는 70명 모두해서 110명을 죽였다. 여우재 고재는 경찰이 들어와 10월 초에 총살이 이루어졌다. 지금의 신명 아파트 뒤쪽 20미터 더 간 지점이다.

과거에는 꼬불꼬불한 길이었고 밤 12시가 넘어야 끌고 갔다. 가다가 개머리판으로 차면서 머리 오른쪽을 쳤는데 훌러덩 머리가 벗겨지면서 즉사하기도 했다. 우리만 있을 때는 별로 안했다. 경찰이 들어온 뒤 많이 했다“

“예비군 훈련장 뒤 이곳은 두 군데에서 죽였다. 이곳은 골짜기가 크지 않았다. 작았다. 옆으로 된 골짜기는 지금은 다 깎아져 있다. 이곳에서 옹주물, 사우리 사람들이 죽었다. 두 군데서 6-7명을 죽였다. 지금 자손은 거의 안 산다.

“성인교회 뒤쪽 산골짜기에서 20명을 총살했다. 여우재 고개를 올라가며 왼쪽으로 성인교회를 바라다 보며 뒤쪽에서 바닥빨갱이 다 총살했다. 총으로 죽여야지 창으로 죽이면 더 불쌍했다. 애처롭다. 그래서 총으로 했다. 빨리 죽여 달라고 하고 울거나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충현탑 밑 채석장 자리 이곳은 당시 나무가 빽빽하게 있고 골짜기만 뻥 뚫려 있었다. 돌만 몇 십 차를 끌어내가서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정확한 명수로 31명이다. 진짜 빨갱이들만 죽였다. 모두 다 바닥 빨갱이들로 손가락질 당한 사람들이다.

이곳에서 바닥 빨갱이 가족, 위원장을 한 남편, 욕을 심하게 한 여자, 부위원장을 한 아들 등 일가를 죽였다. 조리미 사람도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도망가는 자를 붙잡아 왔는데 죽을 각오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곳에서 여성은 7명이 죽었다. 여선생 2명, 여성인민 위원장과 욕한 여자, 그리고 술집 영업자 2명이 있었다. 악질이라고 분류된 31명중 여자는 7명, 남자는 24명이었다. 밥도 주는 것이 아까운 진짜 빨갱이라서 낮에도 4-5명씩 데려다 죽였다. 죽일만 하니 죽였다.

다른 곳, 경찰이 들어오고 나서 죽인 곳들과 다르다. 다른 곳은 더 골라야 했는데 억울한 죽음도 있을 수 있었다. 경찰에서 취조할 때 우물쭈물하면 죽었다. ‘어디서 뭐했나?’ 물었을 때 우물쭈물하면 ‘이거 갈 데가 따로 있군’ 경찰들이 들어와서는 서슬이 시퍼랬다” 

“난 군인을 6-7년 했어요. 제대 말엽에 인민군한테 기습을 당해 을지로 6가 중앙의료원에 4달 동안 입원했어요. 팔을 관통당하고 이마 발뒤꿈치 등을 심하게 다쳤어요.

제대장병 보도회(재향군인회 전신)가 상이용사회와 재향군인회로 갈리니까 나중에 재향군인회로 바꾸게 됐거든요. 박원재씨가 재향군인회에 있는데 그는 제대한 걸로 되었고 나는 부상당해 원대복귀 못해서 아무런 보상을 못 받았어요.

서류, 진단서를 시청에 병사계에 냈는데 서류가 분실되고(담당 황창문) 이미 군인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어떤 때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팔자려니해요”

“우리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다 죽었어요. 1.4후퇴때 내려가서 제주도에서 예비 군인으로 있는데 9사단 선임하사 전진택이가 데리러 와서 9사단 사창리 백마부대로 가서 총 쏘는 법을 가르쳤어요. 싸우는데 실탄도 잴 줄을 모르더라고요. 급하니 인원만 가지고 메우고 한 거예요.

그 부대만이 아니고 다른 부대까지 가서 가르쳤어요. 난 총이라면 명사수였어요. 잘 쐈고, 불려 다니며 총다루고 쏘는 법을 가르쳤어요. 전쟁 이후에도 10년 이상을 제대군인 8천명이 선배님, 선배님, 했는데 그렇게 산 인생을 자료로 남기지를 못했어요.

하성면 부면장을 했던 권모씨가 당시에 시청 연감을 만든다고 생존자 박원재씨를 비롯해 7-8명이 둘러앉아 그 때의 상황을 토론하고 자료를 만들었었는데 아마 어디 있을 텐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인봉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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