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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우익 수백 명이 묻혀 있었어요!박점문(84세)/북변동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북변동>

좌익, 우익 수백 명이 묻혀 있었어요!

김포경찰서 정보과 근무(48년 8월 15일-58년 10월 말)

김포에 좌익 많았던 이유 이북 가깝고 보도연맹 관계 때문
6.25전 야산대는 6.25의 전초였다
김포경찰중 5명 좌익으로 전환 구속하기도

   
▲ 박점문(84세)/북변동
“1945년 해방되고 10월 20일 경찰에 입문해서 김포 경찰서에 근무했습니다.
1월 10일 사령장을 받고 하성지서에 근무하는데 아침에 교육을 하라는 것이 박헌영의 위대성과 레닌맑스주의를 교육하라는 거였어요.

왜 공산당 이야기를 하냐 하는 거였는데 당시에 어수갑 면장이 하성면 인민 위원회 사무소가 있었는데 그곳의 위원장이고, 공산당 경기도당 부위원장이었으며 지서장인 이직현이라는 이는 하성면 인민위원회 사무소 부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성에 와서는 지서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신문이라고는 인민일보만 하성에 왔어요“

“48년 정부수립 후 지서장인 이직현씨는 지서장을 관두고 검단면 부면장을 하다가 공무원을 마쳤어요. 김포경찰서는 정보과가 처음 생기면서 사상관계를 다뤄서 나는 시험을 봐서 경사가 되어 근무했어요. 일부러 간부시험을 안보고 아이들이 이리저리 전근을 따라 옮겨 다니는 것을 하지 않았어요. 정보과에 있으면서 6.25를 만나게 되었지요”

“6.25전에 좌익분자를 취급했는데 남로당이지요. 이북에서 공산당 전신인데 남쪽에 있어서 남로당이었어요. 조직이 드러난 것만 알게 되었는데 지하로 움직이기 때문에 세력을 알 수가 없었어요. 이북에서 사람을 내려 보내 간첩 활동하는 것이 발각되어 12명의 고정간첩을 잡은 일이 있어요.

6.25사변 전에 ‘야산대’1)를 조직해서 산에 가서 군사훈련을 받고 인민군 조직과 똑같은 조직을 만들었어요. 이북은 12명이 분대이고 우리는 10명이 분대예요. 그때에 원당리에 1개 소대, 고촌 신곡리 1개 소대, 대곶 가현리에 1개 소대가 있어서 2개 대대가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검단면 원당리에 김병욱이가 연대 연락장교를 맡아 서울에서 대대장이 되어 지휘를 했어요. 서울에 가서 붙잡아 와서 연대와 본부에 접선하러 갔다가 못 만나기도 했어요.

강화, 김포, 부천에 1개 대대씩이 있었어요. 전쟁 전에 활동했는데 48년도에 훈련을 마치면 전쟁이 나도 인민군과 똑같이 활동이 가능하도록 해놓은 것이어요. 그리고 사변이 난후 인민군은 지금 개성서 조강리를 건너 왔는데 경찰이 원당고개를 넘어가는데 뒤에서 총을 쏘는 일이 일어났다니까요.

경찰은 인민군이 온지 알고 도망을 갔어요. 야산대가 인민군 행세를 한 거지요. 야산대를 검거해서 보고하니 각 도에도 알아보라 했는데 전국에 야산대 조직이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어요. 김포에서 최초로 야산대를 발견 했던 것입니다”

“야산대를 발견하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목지에서 강도사건이 발생했는데 한 사람이 소를 팔아오다가 강도를 만난 사건이었어요. 단순히 강도사건에 그칠 뻔한 이 사건이 야산대를 추적하는 기회가 되었어요.

강도를 만난 이가 소를 팔아 나오다가 빚을 갚아버리고 돈이 없는데 강도들이 돈을 내 놓으라고 하니 3만원 밖에 없다고 3만원을 내 놓으니 돈은 관두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라고 말해서 단순강도사건이 정보과로 이관되게 되었어요. 그래서 원당리, 사우리, 고촌, 가현리를 수색해서 일망타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3개 소대가 1개 중대병력으로 40명이었어요. 1개 대대가 150명에서 160명인데 다 잡았습니다. 그 윗선은 시간 때문에 못 잡았는데 전국 각 시군에서 많이 잡아들였어요. 6.25사변을 위해 목적활동, 즉 군사훈련을 했기 때문에 달발메 야산에서 활동하고 훈련을 해서 기가 막혔어요. 6.25사변의 전초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변이 나지 않았습니까?”

“6.25사변이 나고 경찰이 후퇴했는데 부평, 소래, 공주 쪽으로 후퇴했어요. 금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가 있어야 건너지 배를 대라고 야단이로 논산, 강경을 거쳐 대전에 집결하라고 해서 집결해 보니 무장과 비무장으로 나눠지더라고요.

10월에 대구 가니까 미군과 합세해서 새무기를 받아 미군 제 1기감사단 소속이 되었어요. 낮에는 아군, 밤에는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너왔어요. 서치라이트를 밝혀도 소용없이 인민군들이 낙동강을 건너왔어요. 그래서 1개 소대 밖에 안남아 삼분의 2는 죽고 3/1만 남아 도망을 가자고 해도 도망갈 곳이 없었어요”

“인민군은 대구를 함락시키지 못해서 한이 되어서 대구에 4만 명이 집결되어 있었어요. 왜냐하면 대구 낙동강을 건너면 부산이 가깝게 점령될 수 있다고 봤으니까요. 그래서 대구 왜관 뒷산에 4만 명이 집결되어 있는데 B29기가 99대가 와서 위에서 맴돌다가 폭탄을 투하했어요.

우리가 다 봤어요. 새우젓 독 같은 크기의 폭탄을 터뜨리니까 소련제 탱크가 뒤집어지는 거예요. 대구에서 20여대가 발랑발랑 뒤집어지더군요. 정보가 누설되어 한데 모아놓고 폭격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 인민군 연대병력이 있었는데 내가 소련제 권총, 망원경을 노획했어요. 연대장 것이었는데 소련사람이 장교인데 카키복을 입고 죽어 있었어요. 연대장 옆에 1개 연대병력이 다 죽어 있었어요. 시체를 치우다가 수류탄이 터져서 7명이 다 죽을 뻔도 했어요. 걸어서 상주, 부산, 영등포까지 화물차를 타고 와서 다시 수복이 되었습니다”

“김포경찰서의 서원들도 분산되다 보니 죽은 사람들도 있고 후퇴를 안 한 다섯 명이 있었는데 와보니 좌익으로 전환되어 있더라고요. 목 자르고 구속했어요. 이적행위를 했으니까요. 그 바람에 우익 청년들을 바닥빨갱이들이 죽이고, 밀려올라 갈대는 또 반대로 그러고 그랬지요.

천등고개에 오니까 20여구의 시체가 즐비하더라고요. 여우재 고개 오른쪽 땅이 사태가 나서 파진 곳에서는 우익, 좌익 수백 명이 묻혀 있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엉망이야. 월곶면 고막리에 가니까 땅 파고 잡아넣고 총을 쐈어요. 이계일(이괴일)이라고 대한 청년단원이 있었는데 그이가 대한청년단 월곶면 반장이었어요.

이계일이가 총을 쏘니까 고꾸라져서 맞은 척 드러누워 있다가 흙으로 덮고 간 뒤에 흙을 파고 나와 총질한 얼굴을 아니까  다시 보복하게 되었지요. 그 바람에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우익도 좌익도요.”

“6.25사변 전에 김포는 유일하게 보도연맹을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파악을 하기 위해서지요. 빨갱이 중에 검거된 사람들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경찰에 관계없이 활동을 하라고 했어요.

관계하던 사람들을 회원으로 집어넣어라 하고 활동비도 주고 활동보조도 적극적으로 하고 이익도 주니까 좌익사상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다 들어간 겁니다. 경찰에서 모르는 이들도 다 들어갔어요.

그런데 6.25사변이 나니까 그들이 나서서 활동을 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앞서서 우익 청년들의 희생이 많았어요. 우익 청년들은 대한 청년단과 민족청년단이 있었어요. 대한청년단으로서 만족한데 민족청년단이 왜 있었느냐하면 단장인 이범석 장군이 조직을 했는데 그와 가까운 지인이 김포에 있어 민족청년단이 더 강했어요”

“이범석 단장이 월곶면 행사에 왔는데 깡통을 권총 5발로 쏘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총을 잘 쐈어요. 그것을 보고 민족 청년단의 단결력이 강화 된 겁니다. 지금 김포인쇄소 자리에는 자유당 사무실이 있었고, 대한청년단은 이장회 단장과 김총무가 있었고, 민족청년단은 홍선동 단장과 황의식 부단장 등이 열렬히 활동했어요. 좌익은 남로당 사람들과 남로당의 후신인 보도연맹 사람들이었지요”

“김포가 이북도 가깝지만 공산당 좌익계열이 많은 이유는 바로 보도연맹 관계로 인해서 책임자를 내세우면서입니다. 검단 오류리의 이종빈이는 웅변도 1등이고, 포섭능력이 좋아서 말 잘하고 청중을 잘 모았어요. 스카우트해서 책임자를 세웠는데 특징이 있어야 규합이 잘 되었어요. 돈을 준다고 해도 돈만 가지고는 불가능하고 유아무야 되고 말지요.”

“48년 8월 15일부터 58년 말까지 내내 정보과에서 일했어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하성면 전류리에서 전봇대 전주 3개와 전선줄이 잘려진 사건이 있었는데 통신계에서 수리를 하라 했더니 수사를 하라는 겁니다. 일부러 잘랐다는 거예요. 허허벌판 물논에 전주 3개가 누워있는 거예요.

야산대에서 끌어 활동했다는 심증을 가지고 홍성표를 추적한 끝에 이북지령 온 것을 실천한 것을 자백서를 통해 밝혀냈어요. 수사 중 자백서를 통한 효과로 치안본부에서 보고한 후 전국망을 파악하게 되었지요”   

각주)-----------------
1)야산대(野山隊) ; 미 군정하 1946년에 발생한 10월 대구폭동 또는 10월 인민항쟁으로 유혈사태가 일어나며 남조선노동당(남로동)이 불법화 되는 과정에서 산으로 들어간 좌익인사들이 조선인민유격대의 효시이다. 이를 야산대로 불렸으며 혹은 빨치산이라고도 지칭한다. 

유인봉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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