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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는 서로 믿지를 못했어요송영환(74세)/ 북변동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북변동>

6.25때는 서로 믿지를 못했어요

송영환씨는 당시 16살에 6.25를 만났다.
그에게 있어 16살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가진다.
의용군 징집이나 국군징병이나 모두 17세 이상을 차출해 갔기 때문에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 송영환(74세)/ 북변동
“6.25가 난 것은 6월 26일 되어서 알았어요. 이야기 듣기로는 인민군이 건너와 문수산 용강리 쪽으로 조강리 전투가 있었다는 거였습니다. 26일엔 군인과 국군의 장갑차 정도를 보았고, 피난 가서 2,3주 후에 귀가 했어요. 부상당한 인민군이 우리 집에 있었는데 당시 중학생들을 동원 인민군들을 위해 강제로 노역을 시켰어요”

“앰뷸런스가 들어와 인민군들이 전선 아래쪽으로 환자들을 실어 날랐어요. 인민군에 의한 피해는 없었어요. 잠시 바닥 공산주의자들이 군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놓은 하부조직으로 자위대가 조직되어 유력 인사들을 불려내서 납치하는 일들이 있었어요”

“샘재에서도 김포면장을 했던 이모 씨등 몇 사람이 납치되었던 걸로 알아요. 나는 북변동 294-2번지에서 74년을 살았어요. 그런데 북변동에서는 납치인사가 없었어요. 9월 17일 해병대가 들어와 김포시에 주둔했는데 1개 소대였고, 인민군에게 밤에 습격을 당해 교전이 있었어요. 3일간인가 5일간을 밤에는 인민군, 낮에는 국군이 주도권을 잡았어요”

“당시에 매부인 이상현(당시 30세)씨가 희생당했어요. 집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이 들어와 가가호호 수색하는 가운데 구경찰서로 연행되었지요. 의용군 안 나가려 피해 다니다가 인민군에게 학살당한 것이 아니라 국군한테 공격을 받아서 그리 되었어요. 매부는 국군이 쏜 포에 의해 희생된 건데 당시 5-6명이 희생당하고 시신은 수습을 했어요”

“잔존 부역가족들이 많이 희생되었어요. 구경찰서 자리에 방공호가 있었어요. 부역가족들은 그 자리에서 희생당한 것은 아니고, 희생처는 ‘여우재 고개 구렁텅이’와 ‘신방축’이라고, ‘감정동 독작골 고려묘원 안쪽의 엉구렁텅이’에서 희생되었어요. 인민군들이 부역자들을 하성 시암리에 가서 교통호도 파게 했어요. 통진 조강리쪽에 가서도 팠어요”

송영환씨가 군에 징집되지 않은 이유는 17세 미만 이었기 때문이다.
“17세부터 의용군으로 뽑혀갔어요 나는 16세라서 피해 안 당한 거야. 당시 생활상은 서울에서 옷감이나 재봉틀 머리 가지고와 식량 바꾸어 살기도 했어요.

모를 심어놓고 당한 거라 식량이 모자랐어요. 당시에 학교는 못 다녔어요. 학교에 민간인 수용 같은 것은 하지 않았어요. 교직에 있던 사람들 나오라고 했지만 나갔어도 학생이 있어야 가르치지. 9.28 수복이후 안정되어 공직에 있던 사람들 복귀했어요”

“그 해 12월 10일 이후 청년방위군이라고 아군 청년들이 만17세 이상을 동원 다 끌고 갔어요. 연령만 되면 다 끌려갔어요. 그리고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요. 또 9.28 수복때 치안대라고 경찰 진주하기 전에 민간조직으로 자칭 우익조직이 있어서 활동했지요. 부역자들은 거의 월북하고 그 가족들이 남아있다당하기도 했어요.

좌익에 있던 사람들은 전향한 사람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한 것들이었지만 인민군이 들어오니까 보도연맹 사람들이 부역을 했고, 그 가족들이 희생된 거예요. 좌익 자위대는 악질적인 행위를 많이 했는데 학력이 낮은 무식 대중들이 의용군을 잡아가고 그랬어요”

“6.25때는 서로 믿지를 못했어요. 가까운 친척 외에는 믿을 수 없는 공포 분위기였다고요. 저쪽 체제는 조직적이고 서로 이웃끼리 믿음 없이 살벌했어요. 그래서 낮에도 대문 닫아놓고 살았어요.

희생자는 저쪽 사람들보다 이쪽에서 더 많이 낸 것이 사실이에요. 그래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있었다고. 그쪽 체제는 무조건 숙청이었잖아 그쪽 측에서도 그런 희생이 있었을 거라고 봐요

“1.4후퇴 시는 김포사람들이 피난을 가는데, 김포 향산리로 해서 황허장터로 해서 소사, 부천시 그리고 시흥시 반월 쪽으로 걸어서 이동했어요. 이고 지고 우리는 발안으로 갔는데 피난 가다가 어린아이 보자기에 싸서 놓고 간 것도 봤고, 눈 위에 요깔고 자고 그랬어요.

당시는 잡혀갔다하면 납치였어. 하지만 피하면 어디로 피하냐고. 1.4후퇴시의 피난은 한 달이 뭐야. 봄인 3월말 4월초에 돌아왔으니 죽 쑤어먹고 피골이 상접했던 시절이야”

“위로는 누이가 5명, 남동생 한명, 누이동생 1명이 같이 피난을 다녔어요. 미국과 소련이 억지로 약소 민족을 분리시킨 거야. 6.25때 고모가 함북 길주에 살았는데 고모부가 계시고 사촌형이 일본제국주의 대학을 다녔는데 사변 끝나고는 끝난 거야. 그 소식을 전혀 모르잖아요. 4월에 들어오고는 GNP 100달러도 안 되는 사정이라 몹시 어려웠어요”

“1.4후퇴 이후에는 희생이 없었는데 조알까지 세는 공산체제를 싫어했어요. 공동생산, 공동분배, 개인소유가 없으니 그런 체제를 1-2개월 시행하다 안되었지. 공포정치니까. 그 당시 6.25부터 9.28까지 일개 인민소대가 김포면사무소에 주둔했어요.

내무서는 내무서대로 있었고요. 방위군으로 나갔단 이웃의 황윤수(당시 18-19세), 장경환(19)등 몇 명이 희생되고 돌아오지 못하고 그 가족들은 다 떠났고 소식을 모릅니다”

송영환씨가 기억하는 당시의 사상적 흐름은 지식계층중에서 프롤레타리아 사상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봉건체제 아래에서 있는 사람에게 없는 사람들이 억압받는 생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좌익 사상들을 가진 거지요. 낭만적 좌익 사상으로 마르크스, 레닌 책만 보고 막연하게 쫓았던 거지요. 하지만 공산주의는 혁명 아닌가. 타도, 숙청은 불가분의 관계거든 말로만 있는 거 내놓으라고 하면 누가 내놓겠나?

당시에 그래도 김포는 사상의 영향이 없던 지역이예요. 김포는 전쟁당시에도 빈부의 격차가 그렇게 크지 않았거든 수리조합이 있어 심한 식량의 고통이 없었어요. 김포의 당시 수리 안전시설은 제일이었다고요”

부친 송명성(당시 40)씨는 부르주아로 분류되었던 인사였다.
“아버지가 부르주아로 분류되면서 인민군 검찰청(등기소 현재는 김포경찰서 뒤쪽 컴퓨터 학원자리)에 이틀을 있다가 반성문을 쓰고 나온 적이 있어요. 정말 끌려가면 기약 없던 혼란기였어요”

“9.28수복이 되면서 치안대를 보았던 사람들은 인민군한테 희생당했어요. 치안대는 잡히면 인민군(패잔병 인민군)한테 죽었어요. 9.28수복때 해병대와 인민군의 교전이 있었는데 조리미에는 해병대가 선수동에는 인민군이 한강을 도하해서 건너와 교전을 했는데 해병대 1명이 전사했고, 인민군들은 포로가 되고 패주했어요. 당시 외가가 조리미에 있어서 그곳에 있어서 혼났어요. 벽에 총알이 박히고 민간인들은 이불을 쓰고 뒹글어야 했어요”

실질적으로 인척으로 매부의 희생과 더불어 공포스런 전쟁 분위기를 경험해야 했던 송영환 씨는 지금도 여우재 고개의 예비군 훈련장 앞 골짜기에서 희생된 많은 생명들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 장백산 줄기줄기’등 당시에 5-6가지의 노래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거라고 말하면서 행여 당시 상황에서 장본인인 사람들이 아직 생존해 있음을 알지만 증언에 선뜻 응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유인봉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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