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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보이는 것이 없었어요유선종(77세)/ 걸포동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걸포동>

그때는 보이는 것이 없었어요

걸포리 284번지에서 6.25만남
당시 19세(만18세) 치안대활동. 제 2국민병

   
▲ 유선종(77세)/ 걸포동
“6.25가 나서 안성까지 피난을 갔습니다. 이불조각이라도 가지고 나가려고 가다보니 인민군이 더 앞장서서 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더 갈 수가 없었고, 수원까지 가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기억하기로 1달 정도 만에 돌아와서 석 달 동안 수수밭에서 숨어 있었습니다”

“인민군한테 잡히면 의용군을 가야하니 어쩌겠나! 당시에 인민군한테 잡혀 끌려갈 때 가시 돋친 나무로 사타구니를 마구 문질러 피가 흥건하게 나오면 치질이 있어서 못 간다고 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어떤 꾀를 내서라도 의용군에 안 끌려가려고 들 안간힘을 썼습니다”

당시 걸포리는 180여 호가 있는 아주 큰 부락이었다고 한다.
“걸포리는 180호가 살고 있었고요. 그중의 4분의 1은 교인들이었어요. 빨갱이가 없는 지역으로 이름나 있었고요. 사상이 확고부동한 사람들은 치안대원을 했습니다.

9.28수복 당시에 밀고 당기면서 9월 24일 25일쯤 김포는 다시 수복을 하고 서울은 김포를 지나가서 수복하게 되니까 9월 28일이 된 거예요. 그래서 김포는 9.25라고 해서 그 날을 ‘김포의 날’로 정해 10년 이상 행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김포가 다시 태어난 날이다 그거지요”
 
“인천에서 함포사격을 하면서 밤에 교전을 했어요. 벼가 익어 누릇누릇해 지는데 치안본부는 앞에서 총을 들고 해병대는 이 지역의 지리를 잘 모르니까 뒤에서 뒤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와삭와삭 소리가 나더니 인민군이 ‘간나쌔끼’ 하면서 총을 쏴서 도망갔어요. 당시에 인민군은 암호가 상대방이 ‘맹’하면 ‘꽁’이었고 아군은 ‘타’하면 ‘병’이라고 암호를 대야했어요”

“6.25때 덴노선생이라고 4학년 때 담임이 있었는데 6.25전부터 사상이 좋지 않아 피난 나갈 때 남편이 끌려가 죽었어요. 남편 끌어다 죽인 것을 알고 인민군 시절이 되자 여성동맹위원장을 맡아 독이 올라 날쳤어요. ‘동무 이리와’해서 악수하자고 해요. 그런데 악수하면 의용군으로 데려갔어요. 어떤 사람은 악수하자고 하니까 악수 못한다고 살려달라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선생이 9.28수복 당시 미처 도망을 가지 못했어요. 그래서 충현탑 밑에 채석장에서 총살당했어요. 내손으로 죽였어요. 총을 한방 맞았는데도 돌아보며 ‘죽일 테면 죽여라!’고 소리칠 정도로 독했어요. 사람들을 죽일 때는 혼자 가서 죽인 것이 아녜요. 치안대들이 여럿이 가서 열 명씩 열 명씩 전화 줄로 묶어서 놓고 쏘았어요. 그때는 보이는 것이 없었어요”

유선종씨가 당시에 기억하는 인민군들은 은신처를 강변의 수수밭으로 삼았다고 했다.
“한강 변 옆에 수수밭, 콩밭에 숨어 쌕쌕이가 바람을 일으켜 콩, 수수 등을 쓰러뜨리고 지나가면 우리들이 수수를 베어나가다가 인민군을 발견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죽였다고요. 총을 들었기 때문에 먼저 까야 살았어요.

어떤 이는 ‘비켜 내가 죽인다’며 낫으로 이마를 팍 찍는데 피가 하늘로 치솟드라구요”
유선종씨는 아버지에 이어 2대째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걸포리는 다른 부락과 달리 천주교 신도들이 자체적으로 치안대 활동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걸포리 대 다른 부락 장기동, 감정동과 싸운 거예요. 중학교 늦게 들어가 중학교 4(고1)학년 학생모 쓰고 다니며 그렇게 했습니다. 총을 쏠 줄 몰라 오발도 했어요. 아군 패잔병들이 버리고 간거를 주워서 쏘았어요. 20일 만에 활동한 것들이었어요. 걸포리 사람들은 아주 사상적으로 확실했어요”

“인민군에게 밀려 오촌 작은 할아버지 댁에 가서 ‘문 열어 달라’하니 대문을 열어줘서 헛간에 숨었어요. 헛간에 큰 독이 있어 함석으로 덮어놔 함석을 열고 독에 숨었어요. 오촌 아주머니가 나인줄 모르고 인민군이 우리 집에 왔다고 치안대에 신고하러 갔는데 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며 ‘우리 집에 인민군이 왔다’하니 이미 인민군들이 치안대원들을 포박했고,

아주머니도 같이 포박을 당한 후에 고문을 당하고 갇혀 있다가 아군의 박격포가 터지는 바람에 살아 돌아왔습니다. 얘기하면 기막힌 얘기입니다. 그때는 어디서 죽어도 죽었다는 말도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타 지역은 걸포리처럼 치안대원들이 없었어요. 여우재와 독작골들은 좌익들을 죽인 곳이에요. 나도 거기 갔었어요. 그때는 골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몇 해 전 만해도 해골이 굴러 나왔어요. 버젓한데서 어떻게 죽입니까? 으슥해서 거의 집이 없다시피 하니까 죽였지요.

우리는 가족은 해치지 않았어요. 그러나 본인은 용서하지 않았어요. 패서 죽이고 때려서 죽였어요. 일반 빨갱이들은 그렇게 까 죽였어요”

“옹주물은 사변나기 전에도 땅굴 속에서도 산속 빨갱이도 잡았었어요. 실제 간첩으로 넘어온 사람도 있어요. 걸포리 다리에서 간첩을 잡았는데 옹주물의 정경모, 정범모라고 6촌끼리 넘어오다 1명은 사살되고 1명은 자수해서 살았는데 벌써 죽었어요”

유선종씨는 1.4후퇴 이후 인적 자원이 모자라자 제2국민병을 모집할 때 군대 가서 고생했던 이야기를 했다.

19살에 제2국민병으로 걸어서 부산까지 갔다고 했다.
“걸어서 부산까지 갔어요. 걸어서 가는 사람, 매달려가는 사람, 부산서 돈은 떨어지고 춥고 배고팠어요. 제2부둣가에 가서 지게질을 했어요.

피난민의 세간을 날라주면 밥 한 공기에 300원하고, 멸치국 넣어서 1천원하는 음식을 사먹을 수가 있었어요. 또 미군 군수물자 등으로 져서 날라주면 1천원을 받았어요. 그러면 다시 밥 사먹고 그랬는데 그러고 나서도 배가 고팠어요”

얘기하면 기가 막힌 얘기라며 담담하게 말하는 유선종씨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그의 가슴에 남아 있어 슬픔으로 녹아나왔다.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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