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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 자리에 가기 싫다두병환(71세)/ 감정동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감정동>

지금도 그 자리에 가기 싫다

6학년 때 독작골에서 양민학살 목격, 삽을 건네줬다 
임신부, 애기 업은 여자들, 어린이 죽이는 모습 봤다
장마 지면 장릉산서 굳우물까지 뼈 논밭에 즐비해

   
▲ 두병환(71세)/ 감정동
두병환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의 6.25의 선명한 기억을 아직도 또렷하게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대의 기억이지요. 생생한 기억입니다. 어릴 적에 장릉은 미사일 부대 있는 곳에서 여우가 울고, 노루가 나오고 그러던 곳입니다. 현재 신안 2차 아파트가 있는 이곳은 6.25전에는 굵은 소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던 곳이 구요. 6.25사변 후에 숲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요.

6학년은 6.25 때문에 다녀보지도 못하고 6.25날이 마지막 수업이 되고 말았어요. 1.4후퇴 시에 원래 3월에 졸업을 해야 하는데 동창생들이 피난가다 죽고, 병들어 죽고 기간이 지나니 8월에 졸업장을 보내 주더라고요. 지금 내가 동창회장입니다”

“6.25때 인민군이 들어온 것은 29일-30일쯤 들어왔어요. 초가집에 아버지 어머니와 있었고 당일 날에 모를 냈는데 날이 흐리고 가물었어요. 북쪽이 깜깜하고 흐렸는데 쾅쾅 소리가 나서 천둥번개인줄 알았어요. 비가 오후에 안개비가 왔습니다”

“6.25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3개월 동안 지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형님 두병덕이는 김포농고 1학년이고, 17살이라 의용군을 갈 수 밖에 없었어요. 이를 피하려고 쪽마루를 서너 쪽을 뜯어내고 마루밑 흙을 파서 들킬까봐 세숫대야에 조금씩 멀리멀리 가져다 버렸어요.

구렁덩이에 밤새도록 퍼 나르고 숨겼지요. 그리고 마루를 원상태로 해놓고 밤마다 밥과 똥오줌을 받아내며 견뎌야 했어요. 인민군은 양민학살을 안했어요. 그들은 전쟁을 하러나왔지 양민을 죽이러 오지는 않았어요”

“그 당시에 6.25폭격으로 경찰서 일부와 시내 초가집들이 불타고 길가의 집들이 불탔어요. 인민군이 넘어오니까 바닥 빨갱이들이 난리였어요. 하루아침에 붉은 완장을 두르고 사람을 죽였어요. 인민군은 지역 실태를 모르는데 붉은 완장을 끼고 설쳤다고요.

그때만 해도 이곳은 산골이어서 마차하나 경루 끌고 다닐 소로만 있었습니다. 사람은 거의 안다니고 그랬는데 당시에 대문을 걷어차면서 뛰어 들어와 우리 형님을 내놓으라고 했어요. 학교에 간다 하고서 소식이 불통이라고 했는데 서너 번 와서 장롱 뒤지고 그러고 나서는 안 왔습니다”

“김포에서는 8월 10일경부터 9월 초순까지 1달간 양민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양민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잘 몰랐고요. 우리 집에서 삽을 얻어갔습니다. 인민군 복장에 완장을 찬 사람들이요. 잡아들이고 죽게끔 한 것은 바닥빨갱이 들입니다.

당시에 이장, 일본 사람들은 젊어서 피난을 가고 징병되었거나 인민군으로 끌려갔거나 했지요. 학살을 할 때 끌고 가는 사람이 많은 때는 20명쯤이었고요. 이틀 건너 사흘 건너 15명 정도씩 끌고 가는 거를 마당에서 구경했습니다”

“장릉산에서 5-6미터의 계곡깊이 낭떠러지에서 죽였습니다. 끌려가는 사람들은 젊은 사람은 없고 50대 이상의 중늙은이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거에는 50대 이상의 남자들은 늙은이로 행세했습니다.

끌려가는 사람들 중에 여자들은 애기 업고 걸리고 갔는데 한 줄로 갔습니다. 빨갱이들이 저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고 욕을 했습니다”

“낭떠러지 앞에 일렬로 세워놓고 따발총으로 드르륵 쏘면 자동적으로 골창으로 떨어져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삽을 가지러 완장을 찬 사람이 와서 삽을 빌려다가 얇게 덮었습니다. 수백 명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여자들은 애기를 업고 간 채고 죽었습니다. 이틀 걸러 사흘 걸러 죽 데리고 와서 수십 번 그런 일을 했습니다”

“8월 20일 넘어서 인천에서 함대를 끌고 중부전선에 함포사격을 하면서 김포에도 밤낮 10일 이상 사격을 했습니다. 8월 말에 함포사격을 할 무렵에 더 많이 죽였습니다. 함포사격을 하면 초가집 문이 다 열려버리고 이불을 쓰고 견뎠습니다. 그러니 놔두고 갈 수 없어서 다 죽였습니다.

예비군 훈련장 앞 엉구렁텅이가 깊었습니다. 그 임새에 여기서 다 죽였습니다. 네다섯 살 어린 아이와 끌려간 여자들이 눈에 선연합니다. 우익 가족들이었습니다”

“서울이 수복되고는 반대가 되었습니다. 9월 이후에는 빨갱이 가족들이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여우재 고개에서 보다 많이 죽었습니다. 독작골에서도 처형사건이 몇 번정도 있었습니다.

우리 형님은 9.28수복 때까지 숨어 있었습니다. 햇빛을 못 보니까 밤에 바람을 쏘이게 하고 얼른 들어가야 했습니다. 밥과 요강을 교대로 들여보냈는데 햇빛을 못 보다가 보면 장님이 되니까 밖에 잠시 나올 때는 수건을 가지고 눈을 가리고 환한 기운에 천천히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치안대 예비경찰로 지원해서 형님이 치안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1-2달 근무하는데 좌익을 희생시켰습니다. 1.4후퇴가 나니까 가족들이 다 피난가야 한다고 형이 권해서 아버지는 55세 어머니 동생 두 명 데리고 천안까지 밤낮으로 걸어서 피난을 갔습니다”

“형은 치안대로 지리산 공비 토벌사건으로 집결명령을 받아 갔다가 2월 중순쯤 집에 돌아왔어요. 집에 와서 경찰직을 그만두었습니다. 치안하라니까 열정으로 한 겁니다. 이 마을은 7-8집중에 인명피해는 없었고 무사했습니다”

“당시에 장릉산은 아름드리나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무위에서 잠을 자며 의용군으로 끌려가는 것을 모면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0-30대는 숨어 지냈습니다”

“좌익 가족 희생할 때 한 사람이 살아나가는 것도 봤어요. 30대 남자인데 총맞지 않았는데 구렁텅이로 떨어졌어요. 그런데 구렁텅이를 타고 후다닥 튀어서 달아났습니다. 뒤에서 총을 쏘았지만 마구 달려가 고개를 넘어가 살았습니다.

당시에는 미운 사람들, 감정이 있으면 법이 있나 무방비 상태에서 이쪽저쪽에서 죽였습니다. 어린애 업고 간 여자가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모습이 이해가 안갑니다. 어린아이 밴 여자도 죽였습니다. 인간들이 아니고 눈이 뒤집힌 겁니다”

“6.25사변 나고 지방 빨갱이들이 공산주의가 뭔지도 정확히 모르고 살던 사람들인데 왜 날뛰었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이웃사람, 양민학살 한 것도 이해가 안갑니다. 이북으로 갔거나 옹주물 뱀골은 바닥빨갱이가 더 많았습니다. 6.25이후 이북으로 도망갔는데 10년 후 교육받고 간첩으로 왔던 일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잡혔는데 신문보도도 없었습니다”

“샘재산에서 숨어있는 간첩을 1명 잡았는데 40년 전에 서른세 살로 예비군 출동을 했었어요”

두병환씨와 저녁 7시쯤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함께 양민들이 희생되었다던 장소를 찾았다. 고려공원 안에 있는 그곳은 골짜기가 이어지는 계곡이었다고 한다.

공포와 절망으로 일렬로 끌려갔다는 부녀자들과 어린이 심지어 애를 밴 임신부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발걸음을 옮겼을 그 길을 찾아갈 때 어둑어둑 해지는 저녁 무렵의 빗줄기 속으로 이름 모를 희생자들이 다시 두병환씨의 기억을 통해 살아나고 있었다.

“장릉산에는 갯골이 컸어요. 사람들을 희생시킬 때 나는 우리 밭 근처였기 때문에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고요. 그 사람들이 ‘야 이놈의 새끼야 가서 삽 가져와’ 라고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장마가 지면 뼈다귀들이 굳우믈 앞에까지 즐비했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에 가기가 싫고 으쓱합니다”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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