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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ㆍ우익의 극심한 대립 일어나이재근(74세)/ 풍무동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풍무동>

좌ㆍ우익의 극심한 대립 일어나

빨갱이 색시라고 머리 빡빡 깎여 짐승취급우리 동네 처녀들이 치안대에 농락당했어
식량 없어 날감 먹으며 호 파는데 노역

   
▲ 이재근(74세)/ 풍무동
이재근씨는 당시 중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당시 6.25를 만나 생생하게 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중학교 2,3학년 때라고 기억해요. 학교 갔다 오니 내가 안와서 피난을 나가려다 못나가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계양면을 거쳐 다남리까지 피난을 갔다가 다시 돌아왔고 그 이튿날 안산으로 가있다가 일주일 있다가 도로 왔어요.

다남리까지 갔다가 짐을 지고 들어오려는데 인민군이 기를 가지고 해방군으로 들어오다가 ‘아바이들 편히 쉬라 해방군이다‘라고 말하며 해코지도 안하고 착한 사람들인 줄 알았어요”

“27일 날 집으로 돌아왔어요. 우리 부락에는 빨갱이(남로당)가 많았어요. 간부들이 살아 무식한 사람들이 가세했어요. 우리하고 우리 당숙 사촌은 우익이라서 우리는 맥을 못 추었어요.

인민군은 여기를 지나서 아랫지역으로 내려가고 바닥빨갱이들이 여기 사람들 끌어다 노역을 시켰는데 아이들은 안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는 피신을 했지만 어린아이들은 괜찮았어요. 인민군들이 가혹행위를 많이 해서 벼 나락을 세고 식량도 다 가져가고 그랬어요.

김포읍 김포경찰서 뒷자락에 인민군이 다리가 잘라져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 돼지를 잡아서 수발한 적이 있어요. 당숙은 당시에 이장을 보았는데 아버지와 당숙이 ‘하양이’라고 끌려가 매 맞고 그랬어요.

“우리 부락은 거의가 다 좌익사상이었어요. 우리 부락사람들 봐주지 않아서 피해가 상당히 많았어요. 인민군이 하양이라 멸시했어요. 외갓집이 향산리였는데 외할아버지 외삼촌 고촌면사무소에 붙잡혀 가기도 했어요. 외조부와 외삼촌이 서울로 끌려갔는데 외삼촌은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그 당시 우리 마을은 전부 빨갱이였고 부락의 인민위원장은 부평사람이었는데 옹주물, 양도부락의 피해가 컸다고요. 당숙은 재산 빼앗기고 매 맞고 그랬어요“

“인민군이 밀려가고 정식 경찰이 들어오기전 치안대가 있었어. 김포사람들이 했는데 우리 동네 처녀들이 치안대에 농락당했어. 빨갱이라고. 전부 끌어다 여우재 고개, 향교자락(김포초 뒤편) 있는데서 철사로 묶어 쏴 죽였어. 우리 마을 사람 많으니 쫓아가 봤다고.

당시 30명 죽었어. 뭐 다 죽은 거지. 그렇게 죽이고 나서도 자치대라고 해서 남편 끌어다 죽이고, 그 아내는 머리 빡빡 깎이고, 빨갱이들이라고 참 가혹했어요. 그래서 내가 당숙 어른에게 부락사람들인데 구출해 줘야지 여자들까지 그럴 수가 있느냐 말했다가 어린 자식이 왜 참견이냐 혼났다고. 여름이니까 삼계탕 해 주셨는데 팽개치고 내려왔어요.

제일 피해가 컸어요. 하양이들이 빨갱이 집안의 농사를 차압해서 타작을 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타작시 갈퀴질을 해서 뒷목에 감춰서 다서여섯가마 모아줘 빨갱이들이 연명하고 그랬어요. 너무 압류해가니까 우리 어머니가 빨갱이 가족을 돌봐줘 놋그릇을 마루밑창에 감추었다가 가져다주기도 했어요”

“1.4후퇴 때는 안산으로 피난을 갔고 부락은 전부 비어있고 돌아와 보니까 부락의 소나 돼지는 다 잡아먹었더라고. 부천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혔는데 중공군하고 합세해서 일정때 전화기 철거 수거하는 작업을 하루 종일 도와 준적이 있어요.

안산으로 피난 갈 때 짐싣고 가는데 큰 아버지와 함께 소마차를 타고 가는데 어떤 국군이 넓적다리가 포탄에 맞아 끊어져서 벌렁벌렁하는 것도 보고, 인민군이 널브러져 죽은 것도 보았어요.

가지도 오지도 못하겠다. 다시는 무서워 안 오겠다 하고 집에 들어오고 나서 해병대가 상륙했어요. 피난 가며 국군 죽는 것 인민군 죽는 것 다 봤어요”

“우리 어머니가 방공호를 파서 이불을 덮어 씌워 나와 동생을 보호하고 어려움을 피했어요.”
“해병대가 조리미에 대대본부가 있었어요. 벌판 인민군들을 향해 쏘는 것도 봤어요. 선수부락에 무지무지 시체가 많았어.

내무서장이던 강천영이가 하양이들을 처형하러 인민군 대대를 데리고 왔는데 이미 해병대가 있었어요. 수갑을 채워놓은 인민군 대대장이 엎드려서 돌멩이를 올려놓고 해병대 대대장을 죽였어요. 그러니 인민군들이 전멸하다시피 했지.

인민군이 다리가 잘려나가서 살려달라 했지만 인민군 그냥 쏴 죽였어요. 인민군이 후딱 넘는 것을 해병대가 쏘면 명중이었어. 풍무동은 극심한 전투가 있었어. 인민군대가 하양이 처형하러 후퇴하다 도로와 나중에 쏘지도 못하고 인민군이 공항이 집결지인데 가지도 못하고 전멸했어요.

넘어와서 인민군들이 선수동에서 4명 신지철 형 등 젊은 청년 5명을 죽였지, 다 죽이려다 해병대가 있어서 전멸한 거야. 종달새 마을 뒤 방죽에서 인민군들이 청년들을 죽였어요. 김포에는 해병대만 들어오고 연합군은 안 들어왔어요”

“우리 부락은 우익은 세네집이고 치안대들이 나머지 40명을 죽였어요. 그 가족들 그대로 살아있어요. 옹주물과 양도부락을 빨갱이 마을이었어요. 인민군이 군청의 탄약고를 파괴 했는데 인민군은 빼앗지 않았어요. 낱알을 세기는 했지만 거두지 못하고 1.4 후퇴 때 가을에 도망갔으니.”

“당시에 대동청년단 배지만 달고 다녀도 끔뻑끔뻑했어요. 우리 처가는 빨갱이 집안이었어요. 장인어른이. 당숙이 어찌 빨갱이 집안하고 결혼하느냐고 하셨지만 다 지났는데 어떠냐며 결혼했어요. 아직도 노래 대여섯 가지는 알아요. ‘붉은 깃발’ 같은거요. 이순희씨 아저씨는 하양이였고 풍무동에서는 그이만 오면 고개도 못들었어요”

“그 당시에 좌익 미망인들이 살아있어. 90세 이상 된 이도 있고 현재 아파트에 살아있는 이도 있어요. 이필진 어머니는 생존해 있고 이필진이는 삼촌이 10년 만에 넘어온 것 숨겨줘 3년 감옥살이 했어요. 당시 젊어서 빨갱이 색시라고 머리 깎았어요. 부락민들을 하양이들이 그랬어요.

여자들이 수건을 2년씩이나 쓰고 다녀야 했는데 그렇게 짐승 취급 당했어요. 참 참혹했어요. 이성웅씨의 아버지 이순희씨의 아버지 신지철의 아버지가 왜 그랬냐고 나무랬어요”

“인민군 쫓아다니며 밥도 갖다 주고(?) 살려 달라 다리 부러진 것 해병대가 쏴 죽이고, 봉성리 가서 호도 파 봤어요. 밥이 없어 날감도 따먹고 그랬지. 어머니가 수수를 털어주어 서너 됫박 가지고 가다가 콩밭에 가서 콩 꺾어 수수와 섞어 놨는데 다 썩었으니 날감 따먹어야 했지.

참 참혹했어요. 그래서 남들이 뭐라면 6.25겪어보지 않아서 그런다고 그래요. 모기장 같은 거는 보리쌀 3되 주고 서울사람에게 샀어요. 서울 사람들은 재봉틀 머리가지고와 보리쌀 3되만 달라고 그랬어요”

“함포사격의 피해는 없었어요. 민가에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쟁 3년간 주민간 갈등 있었어요. 사우리 안동네에는 빨갱이 약간 있었지만 집안이라서 감싸주어서 피해 별로 없었어요. 양도부락은 컸지만요(?)”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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