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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다시는 안됩니다이일희(80세)/ 풍무동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풍무동>

전쟁, 다시는 안됩니다

살려달라 애원하는 인민 포로들 풍무동 뒷산에서 총살
의용군은 인심 좋았던 부모덕으로 모면
국군 나가 모진 고생, 무연탄밥 먹으며 영양실조, 늑막염 걸려

   
▲ 이일희(80세)/ 풍무동
“중학교 4학년 때 (고1)전쟁이 났습니다. 18살에 학교에 들어가 김포초 31회, 중, 고는 1회입니다. 그해는 몹시 가물었어요. 모를 내야 하는데 가물었다고요. 원래는 한 달 전에 내야 하는데 모가 늦었더랬습니다. 그때는 포성을 뇌성으로 알았지요.

일요일 아침에 터진 거니까요. 풍무동에는 전쟁 나고 일주일 만에 인민군이 들어왔는데 완전무장을 했더라고요. 인민군 분대장이 소련제 권총을 차고 있는 반면에 한국 군인들은 M1소총도 안 나가는 그런 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 비참했어요.(울음) 그렇게 가난했어요. 중공이 공산화되면서 이북이 해방되고 소련군이 점령해서 들어 왔잖았어요. 학교를 다니면 군인 나가는 것이 연장되었습니다. 사실은 군인을 나갈 나이인데, 51년 군인을 나갔어요. 너무나 가난해서 군대생활도 작업복들 기어 입었어요.

포병학교 창설 1기생으로 기간요원으로 내려왔어요. 50년 상황은 인민군이 들어와서 저희들이 해방군이다 안심해라고 하면서 처음에 가을을 겪는데 수수이삭을 다 세었어요. 현물세를 빼앗아 가느라고요”

“그해의 12월 이승만 박사가 국민병 제도를 실시해서 군인 나갈 나이를 50세까지 자원을 뽑았습니다. 길거리에서 35일 동안을 걸어서 부산까지 가야 했어요. 구포에 내려가니까 장소가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마산으로 올려 보냈어요.

누룩창고에서 생활했는데 사람이 많으니까 누워서 잠을 잘 수도 없고 앉아서 무릎을 쪼그리고 자야했는데 이가 너무 많아서 손으로 털어내도 끝이 없었어요.

주먹밥 하나에 물도 없이 먹고 자고나면 장질부사 등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봐야 했어요(울음). 포병학교에서 3개월 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하니 송장과 같았어요.(울음)

언제가 국가의 의무는 할 것이라고 포병학교 자원입대해서 1개월 훈련받고 박격포 수령했어요. 야포는 미군이 안줬어요. 포 연습하고 5월 10일 날 출동했어요. 이와 같은 상황은 거의 다 90%가 79-82세가 아니면 모르던 전쟁 상황입니다”

“1950년에 희생된 것을 알고 있는 것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고 지금의 풍무동 홈플러스가 앉아 있는 지역에 산소 터가 있었습니다. 거기 해병대 중대가 있었어요. 9월 달 하순경이었는데 쌀쌀해서 아침에 불을 쬐어야 했던 때였는데 우리 아버지가 해병대들에게 모닥불을 놔줬어요.

그리고 얼마 있다가 총소리가 났어요. 교회 앞 다리 있는 데서 패잔 인민군과 지역빨갱이들이 해병대와 전투가 벌어져 교전한 거예요. 수수밭이 있었고 해병대들이 다 들어가라고 했지요.

그 교전으로 인민군들이 죽어서 논에 있었어요. 우리 논에도 있었어요. 나중에 우리 논에서 피를 흘리고 죽은 사람을 보았어요. 우리나라 군인들이 와서 처리를 했어요”

“인민군들 중에는 우리처럼 끌려나온 사람들, 교인들도 있었어요. 당시에 인민군 연대장을 잡았었는데 해병대 대대장이 본부에 무전 친다고 한 눈을 판 사이에 인민군연대장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병대 대대장을 쏴 죽였어요.

대대장이 죽자 대대장을 죽였다고 인민군들을 총살을 시켰는데 열 명 정도였고 며칠 만에 끌려나온 인민군들도 있어서 살려달라고 해도 홈플러스 뒷산 옆에서 죽였어요.

서로 죽고 죽인거지요. 포로는 제네바 협정에 의해 인도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안하고 쏴 죽였어요. 우리는 겁이 나서 못 올라가 봤어요. 겪은 사람들은 인민군 중공군 다 봤어요. 어려운 세상 다 겪어봤습니다”

“51년도만 해도 먹을 것이 없어서 많은 군인들이 무연탄 밥이라고 밑에서는 타고 국은 소금국에다가 무를 넣은 것 먹었어요. 지금은 상류생활입니다. 53년도에 영양실조로 늑막염에 걸리고 난 중고등학교를 2년 3개월 공부했어요.

양반의 집에 태어나 종아리 맞고 사랑방에서 살았어요. 10촌 형님이 이정희라고 정동교회에 다녔는데 절대 공산당하면 죽는다고 일러줬어요. 이박사 노선이 우익이고 공산당이 어떤 것인지 당시에는 잘 몰랐잖아요”

“넘어간 사람 끌려가 죽은 사람들이 빨갱이들이었어요. 그때 당시는 좌익이 우익을 죽이고 수복 후에는 우익이 좌익을 죽이고 동족끼리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아버지가 법 없이 살 양반이고 그 당시에는 부자이셨는데 약주를 좋아해서 우리 어머니가 수수, 찹쌀로 술을 담가서 대접하고는 했어요. 먼촌 집안사람이 빨갱이었는데 평상시에도 술이나 대접을 잘해 왔었던 덕택으로 의용군을 잡으러 왔다가도 악착같이 수색을 하지 않았어요.

숨으면 겉으로 돌다가 그냥 갔어요. 벽장 같은데 숨으면 그냥 돌아가서 의용군에는 끌려가지 않고 외아들이면서도 보호를 받았어요. 다 부모님 덕으로 인심을 잃고 사시지 않은 까닭으로 그렇게 무사할 수 있었어요”

“53년도 기간요원일 때는 늑막염으로 77육군병원에 입원했는데 약을 안주고 일주일에 링겔한병을 놓았어요. 늑막염환자라고 4개월간 누워서 지내면서 집에 연락을 하니 삼촌이 병원으로 돈을 가지고 와서 날계란을 4개월간 먹고 있다가 제대를 해서 집에 와 있었어요.

참 비참했습니다. 약이 없으니 영양제 한 알이 다예요. 이북 땅에서는 감자를 밭에서 캐다먹고 가지고 있던 수류탄도 동해바다에 던져서 고기 잡아 먹고 그랬습니다. 감자국에 된장이면 다였고 이북의 간성을 지나 고성까지 갔어요”

“육군 수도사단 기갑연대에서 박격포를 쏘면 유효사거리가 4킬로미터 밖에 안되었어요. 전쟁하면 유탄이 막 날아다녀요. 포 쏘면 그 다음날 고지를 탈환하면 인민군이 포로병이 되어 살려달라고 나오면 포로로 보냈어요. 우리 겪은 사람들은 다시는 전쟁하면 안 된다는 거 알아요. 절대 공산주의도 안됩니다.

세계 4대 강국들에게 있어 정치 지리학적으로 우리나라는 소중해서 한반도는 미국이 안 내놓는다고 확신합니다. 반미주의 시각은 우려할 만한 겁니다. 6.25고 모고, 듣고, 겪고 전쟁을 하고 다시 들어와서 살아서 잊어서 그렇지 동족상잔은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절대 안돼요. 지금은 지상천국입니다. 보리밥도 모르고 구시대라고 말하는데 답답해요. 생활철학은 우리세대가 박사입니다”

“부역자들의 희생도 억울한 겁니다. 나는 면피해서 그렇지 좌경이론은 이론상은 번지르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 교육은 절대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마라였어요.

어려운 세상 정말 다 겪어 봤어요. 우리 아버지가 그 당시에 ‘짧아지네! 짧아지네! 하시던 말씀은 전쟁하다 죽는다는 말이었어요. 군대 가서 서신 왕래가 안 되니까 건빵봉지에 서신 써서 보냈어요.

외아들, 내가 군인 나갔다고 얼마나 걱정이셨는지 우리 할아버지가 18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가르치셨던 담배를 끊으셨답니다.(울음) 다시는 전쟁은 안 됩니다”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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