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김포역사 김진수의 김포역사이야기 김포의 6.25전쟁비사(2008)
스물넷, 못다 사른 불꽃공깃돌 송해봉 선생의 삶과 영성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고촌면>

스물넷, 못다 사른 불꽃1)

   
▲ 공깃돌 송해봉
아, 1950년 6·25!
부락에 들이닥친 인민군들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밥을 해 내라고 졸랐다. 사람들은 꼼짝없이 밥을 해다 바쳤다. 그런가 하면 국군들이 부상을 당해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다. 강습생들은 그들을 데려다가 응급치료를 해 주기도 했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는 7월, 선생은 제자들을 데리고 강당 옆에다 굴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지 않아 제자들은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그는 끌려가는 제자들에게 본명을 하나씩 지어주며 대세를 주었다. 날이 갈수록 선생의 신변도 위험했다.

선생은 누산리로 간다고 소문을 내고, 제자 몇을 데리고 산언덕 콩밭으로 들어갔다. 그는 제자들에게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낮이면 몰래 강당을 둘러보고, 밤이면 콩밭으로 가서 눈을 붙이고 때로는 강당 옆 바위틈에 숨어 잤다. 그러나 인민군의 기세는 날로 심해졌다. 선생은 이리저리 피하다가 9월 1일 학생 셋을 데리고 진짜 누산리로 갔다.

선생이 그 곳 교우 홍태안씨 댁으로 찾아드니, 공산치하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청년들이 구세주를 만난 듯 좋아하며 인민군들의 눈을 피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선생은 그들에게 조금만 참으면 대한민국의 승리가 온다, 흔들리지 마라, 일선에서 국군이 실탄을 맞아가며 싸우고 있으니 우리는 후방에서 정신적 후원을 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마라, 그리고 이럴 때 일수록 기도를 열심히 하고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한다, 라고 타일렀다.

9월 8일에는 오후 내내 비행기 폭격이 그치지 않았고, 9일에는 종일 함포사격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촌 은행정에서 아주머니들이 왔다. 그들로부터 제자들이 의용군으로 끌려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은 그들과 함께 9월 14일 은행정으로 떠났다.

그 곳 제자들이 걱정되어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폭격 소리가 진동해, 너무나 위험하다고 모두들 만류했건만 기어이 떠났다.

감격의 9.28 수복 
선생이 고촌으로 옮겨온 날은 마침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시도하던 때였다.
박용석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하여간 얼마나 기뻤는지, 우왕좌왕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궁금하던 차에 선생님이 오셨으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그러자 국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렸으니 생각해봐요.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지요.

그 때도 우리는 선생님의 지혜에 놀랐어요. 어서 태극기를 찍어내야 한다고, 감자를 가져오라 하시더니 그걸 하나씩 파서 태극기 모양을 꿰어 맞추는 거였어요.

그리고는 먹물에 묻혀 하나하나 종이에 찍으니 태극기가 되었어요. 그걸 들고 모두 저쪽 언덕 너머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지요. 그 날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 분을 공산당이라고 하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완전히 누명이지요.”

주민의 텃세, 그리고 종교적 갈등
인물 좋고, 기운 좋고, 다정하고 친절하고, 가난 때문에 진학 못한 청소년들 데려다 좋은 공부 가르치고,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그를 그들은 왜 빨갱이로 몰았을까.

고촌에는 본래 임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고촌의 유지였고, 당시 그곳의 유일한 개신교 교회 ‘제일교회’ 신자들이었다.

그런데 전혀 타지방 사람 송해붕이 들어와 마을 청년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남녀 할 것 없이 그에게 홀딱 반해 저녁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당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지 않나, 천주를 찬미한다고 거기서 배운 노래를 낮이나 밤이나 부르고 다니질 않나, 아무리 봐도 눈에 걸렸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임씨 일가를 비롯한 유지들은, 객지에서 들어와 자기들의 정체성까지 흔들어 놓는 송해붕이 눈에 가시였다. 뚜렷한 명분만 있으면 당장 쫓아ㅐ고 싶은데……. 그러다가 6·25가 터졌고, 그들은 제법 식자층인지라 인민군이 시키는 일에 협조도 했다. 그런데 다시 9.28 수복이 되고 김창룡 대장의 지시로 마을 자치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마을에서 말께나 하고 글께나 하는 그들이 앞장설 수 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이다. 그들은 인공치하에 협조한 것을 무마할 겸 잽싸게 자치대를 조직했다. 임○○, 임○○, 이○○, 장○○, 최○○ 등이 그 일을 맡게 되었고, 대장은 젊고 유능한 임○○(선생의 제자 임병렬씨와 한 집안)이 맡았다.

그들은 날마다 ‘빨갱이’ 색출 작업에 머리를 모았다. 인공 당시 거세게 부역을 한 사람은 물론, 공연히 미움을 샀던 사람들도 하나 둘 끼워 넣었다. 그러던 중에 어이없게도 송해붕 선생을 지목한 것이다.

청년들을 모아 밤마다 공부를 가르친다면서 정신교육을 시키는 젊은이. 남의 동네에 들어와 마을 유지인 작들보다 더 청년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젊은이. 처녀총각들이 풍금 소리에 맞춰 손뼉을 쳐대며 노래를 부르도록 시키는 젊은이. 무엇을 하는지 걸핏하면 토굴 속에서 지내던 젊은이. 그 얄미운 젊은이를 이 기회에 없애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박용석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마을에서 인심이 후하기로 소문난 박○○ 씨의 어머니 황○○씨(99년 91세로 선종)는 자치대원들이 꾸미는 수작을 눈치 채고 선생에게 피신을 권한다. 그러나 선생은 무슨 죄가 있느냐며 그냥 고촌 강당에 머문다.

황○○씨는 아무래도 불안하다고 선생을 자기 집 벽장 속에 숨긴다. 선생은 황○○씨를 통해 바깥소식을 들으면서 며칠 동안을 그곳에서 지낸다. 그러나 치안대원들은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기어이 그를 찾아내고 만다.

선생은 어처구니없게도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붙들려 간다. ‘공깃돌 선생님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천주교 신자들과 제자들이 변호했지만 무법천지의 당시 상황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자치대의 횡포를 누가 막으랴. 임○○ 일행은 여럿이서 선생을 사로잡아 끌고 나갔다. 이런 절차로 선생은 공깃돌처럼 버려져 면사무소의 곡식 창고 속에 갇히게 되었다.

다음은 제자 임병렬씨의 증언이다. “당시 고생은 말도 못해요. 나는 의용군으로 끌려가 인천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신체검사를 받는데 그들의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도망을 왔지요. 협궤열차 길을 따라 소래산으로 올라가서 인민군 눈을 피해가며 밤중에 갯벌을 따라 집 쪽으로 왔지요.

배가 고파 생옥수수를 까먹으며 이틀을 지나고 강당 주변에 도착했는데, 그 땐 사람 속을 모르니까 제일 무서웠지요.

누가 빨갱이고 누가 우리 편인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하여간 그 고생을 하다가 무사히 9.28 수복을 맞아 한 시름 놓았더니, 어른들이 자치대를 결성하고 나에게 심부름도 시키고 했어요. 우리 선생님은 공산당 아니라고 해도 누가 내 말 듣나요. 하여간 선생님이 면사무소 창고에 갇힌 것을 알고 면회를 갔지요. 신자 아주머니가 선생님 드리라고 삶은 계란 몇 개를 싸 주기에 갖고 갔어요.

창고 문을 열자 수십 명이 갇혀 있었는데, 앞 쪽에 우리 선생님이 계셨어요. 나는 선생님, 하고 부르며 울먹였지요. 그러자 선생님은 내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면서 ‘걱정 마라. 나는 아무 죄 없다. 어서 가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네 일이나 잘 봐라’ 하시더라고요.

바로 그 때, 뒤에서 누가 내 어깨를 탁 잡아챘어요. 자치대원들이었지요. 그 길로 그들은 나를 가두었어요. 너, 아직도 그 송해붕 제자 할래? 하고 다그치는데, 한다고 그랬지요. 그랬더니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느냐, 그 사람 집에 알릴거지? 하면서 못내 준다는 거예요.

내가 반항하자 전깃줄로 손을 묶어 거꾸로 매달아 놓고 때리면서 매일 선생 제자 할 거냐 안 할 거냐. 협박을 하다가 사흘 후에야 내 주었어요. 너, 집에 가서 여기 갇혔었다는 말 하면 절대 안 된다, 하면서 겁을 주더라고요.

저희 집에서 알았으면 아버지가 그들보다 더 어른이니 그냥 둘 리가 없었지요. 하여간 나오자마자 면사무소 창고로 갔어요. 그랬더니 다른 사람만 있고 선생님이 안 계시는 거예요.

내가 하도 기가 막혀서 다른 제자들보고 어떻게 된 거냐, 어찌 그냥 있었느냐, 왜 선생님 댁에 알리지 않았느냐, 했더니 계양으로 가는 길을 다 막고 얼씬도 못하게 했다는 거예요.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임병렬씨가 말을 잊지 못하자 박용석씨가 뒤를 잇는다. “아무튼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각 부락에서 사상 의심자를 다 데려다가 지서에 가두고, 전깃줄로 고문을 하고 굉장했어요. 그러다가 간부들끼리 재판을 해서 불손자라고 결정이 나면 죽이는 거지요.

새벽 3시가 되면 김포 지서로 이동한다면서 몇 명씩 데리고 나갔대요. 그리고는 바로 인적 드문 천등고개로 데리고 가서 총살을 했대요. 불려가는 사람은 죽으러 간다고는 상상도 못했겠지요.

어쩌다 살아나온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참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지요. 그 때, 부엌일을 돕던 홍제동 아주머니도 끌려가서 고생 많이 했어요.

선생님 집에 이 일을 알리면 죽을 줄 알라고 전깃줄로 묶어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 먹이고 매질을 해 대며 몹시 심한 고문을 했대요. 그분이 심신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고생하는 걸 알고, 선생님 어머니가 그 아주머니를 데려다가 오래도록 보살펴 줬지요.”

한 맺힌 사람들
작은 반도 안에서 남과 북의 대결도 참혹한 일이거늘, 같은 동네에서 얼굴 맞대고 살던 이웃끼리 평소 가졌던 반감 때문에 살상까지 저질렀던 치욕의 역사. 6·25의 희생자가 어디 한둘인가. 이쪽이 죽였건, 저 쪽이 죽였건 그 수를 어이 다 헤아릴 수 있으랴. 그들 가슴에 맺힌 한을 누가 풀어줄 수 있으랴.

엮은이가 송해숙씨를 만나 천등고개를 방문하던 날, 당시 희생자 가족이라는 기노정씨가 함께 나와 50여 년 맺힌 한을 풀어내며 울음을 토했다.

 “저는 당시 세 살이었어요. 고촌면 향산리가 고향인데, 조상 때부터 땅이 많아 부자로 살았답니다. 우리 큰 아버지께서는 서울 가서 공부를 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당시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좌경 서적을 많이 읽었대요. 그래서 사상을 의심받았던지, 아니면 질투를 받았던지, 그들한테 미움을 받았나 봐요.

그 큰아버지 핑계 대면서 농사만 짓고 있던 일가족을 모두 몰살한 거예요. 아버지 형제가 삼형제인데, 부인 자식 할 것 없이 세 집 가족을 모두 죽인 거예요. 나는 마침 할머니가 업고 피해서 살아난 거래요.

어린이도 남겨 두면 후환이 두렵다고 무조건 다 죽인 거예요. 친척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다 늙은 노인뿐이었지요. 그러니 무서워서 어디다 말도 못하고 시체 찾을 길이 없어 오늘날까지 부모님 산소도 없어요.

이제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혼자 남았지만 이 억울함을 호소나 좀 하려고 이렇게 따라나왔어요.” 한 중년 사나이의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이 엮은이의 가슴을 후빈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저희가 그 난리 직후 오빠의 시체를 찾으려고 천등고개를 여기 저기 다닐 때 어떤 구덩이에서 70여구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아마 기노정씨 가족 시신도 거기 있었지 않나 싶어요. 저랑 아는 분이라 천등고개 간다는 말을 듣고 쫓아 나온 거예요.

우리야 재판을 해서 오빠의 누명도 벗기고 시체도 찾았지만, 이런 분들은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평생 한을 품고 사신 거지요. 그 당시 시체를 못 찾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죠.”

누명을 벗다
1951년,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되자 송희진씨 가족은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딸들이 앞장서 곳곳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마침내 모든 수속을 밟아 당시 치안대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귤현동의 제자요, 선생의 5촌 조카 송영식씨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세상에 당숙을 빨갱이라 하다니 말이 되느냐 말예요. 나는 처음 귤현리에서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고촌에 외가가 있어서 거기까지 따라가 배운 제자지요. 나는 지금도 훤히 기억해요. 인공 때 동네 수수밭에서 국군이 버리고 간 MI 총 세 자루와 칼빈 총 한 자루를 주웠어요.

공깃돌 선생한테 그 말을 했다니, 고촌으로 가지고 오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것을 대빗자루 만드는 대싸리 잎새 사이에 잘 숨겨 가지고 걸망에 메고 갔지요. 지름길로 가면 빠르겠지만 일부러 한적한 길로 돌아서 갔어요. 선생님은 그 총으로 제자 몇을 데리고 굴속에서 사격 연습을 하셨지요.

국군들이 일선에서 싸우고 있으니 우리도 후방에서 싸울 수 있으면 싸우도록 준비를 하자는 거였어요. 그런 분이 웬 공산당입니까? 환도 후 너무 억울하니까 그냥 있을 수 없다며 당숙 댁에서는 임○○씨 등을 상대로 재판을 걸었지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돈도 많이 들고 마음고생 몸 고생 퍽 많았지만 어쨌거나 승소를 했어요.

그 때서야 천등고개에 묻힌 걸 알고, 가족이랑 인부들, 그리고 여러 제자들이 천등고개를 찾아갔지요. 그들이 일러 준 곳으로 갔더니 정말 비슷한 장소가 나왔어요.

조심조심 팠지요. 알고 보니, 큰 구덩이에 여러 사람을 함께 매장해 놓은 거예요. 얼기설기 한데 모여 있는 시체들이 부패해서 냄새는 나고, 정말 참혹했지요. 그래도 다행한 것은 당숙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어요. 검은 신학생 예복이 바로 보였거든요.

우리는 당숙을 조심조심 꺼내다가 소지품을 찾았지요. 바지 주머니에서 늘 갖고 다니시던 유리 묵주가 나왔어요. 그리고 웃옷 주머니에서는 상본이 나왔어요. 바로 소화 테레사 상본이었지요.

총 맞은 자리였는지 피가 묻은 채로……. 선생의 어머님이 그걸 들고 한참을 우시는 바람에 우리도 함께 눈물을 흘렸어요……” 말로만 들었던 선생의 죽음은 이제 확실해졌다.

그들은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다른 시체들은 도로 묻어 놓고, 바삐 관을 구해 선생의 시체를 옮긴 뒤, 바로 옆 산 주인에게 양해를 구해 임시 이장을 했다. 모든 것은 사필귀정. 이 진리가 있어 그나마 위로를 받는다.

단기 4284년(1951년) 7월 6일 금요일 대한신문에 난 기사를 보자.

■ 죄상 발각이 무서워 총살
   - 진짜 빨갱이들 도리어 법망에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자기의 죄상을 감추기 위해 남을 죽이고 드디어 발각되어 법망에 걸려든 이가 있다. 현주소를 김포군 고촌면 신곡ㄹ에 둔 임○○ 외 5명은 한 동리에 사는 천주교 신자인 송해붕을 작년 10월 13일(가족들은 11일로 기억함)에 동리 뒷산에 끌고 가 총살을 하였다는데 그 원인을 알아보면 작년 적군 남침 이래 전기 임(林) 등은 허다한 부역행위를 하고 국군 수복 이후 범죄 사실이 발각될까 하여 전기 송(宋)을 사감 끝에 빨갱이로 몰아서 그처럼 죽였다 한다.

이 사실을 탐지한 김포 서에서는 범인을 체포하여 엄중 문초 중이던 바, 작 7월 3일 인천 지검에 일심 서류와 함께 송청하여 왔는데 엄중한 처단이 있으리라 한다.      

각주)-----------------
 공깃돌 송해붕 선생의 삶과 영성 <스물넷, 못다 사른 불꽃>, 2006년 5월 30일
   역은이 안영. 펴낸 곳 에우안겔리온
   이 책의 주인공 송해붕 선생은 1926년생으로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에서 출생하고 함흥 덕원신학교를 나와 계양면 귤현리, 김포군 고촌면 신곡리, 양촌면 누산리 등에서 돈이 없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모아 중학교 과정의 학과 교육을 가르쳤으며 밝은 신앙으로 전도에 힘쓰시다가 6.25전쟁 중 고촌면 자치대원들에게 피살되었다.

각주)-----------------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저작권자 © 미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