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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죽일때 ‘야 해장거리 없니’ 했어요김천길(74세)/ 양촌면 양곡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양촌면>

사람죽일때 ‘야 해장거리 없니’ 했어요

해병대들 해장거리 없냐며 사람 희생시키고
여성들 가현산에 잡아다 성폭행

   
▲ 김천길(74세)/ 양촌면 양곡리
“16살에 전쟁이 나서 고2때까지 전쟁이었습니다. 학교는 안다녔습니다. 대한청년단에 19세에 들어가서 치안대원을 51년까지 했습니다”

“6월 26일-27일 양곡초등학교 교실에 수백 명이 가득했어요. 하성쪽 사람들이 피난 왔고요. 양촌면 사무소에서 지역방송으로 ‘괴뢰군이 문수산에 상륙했다. 몇 명이 왔다. 우리 용감한 국군이 포위했다. 독안에 든 쥐다. 시간이 문제이다. 문제가 생기면 사이렌을 울리겠다’라는 방송을 계속하고 다녔습니다”

“옛날 시장은 문 안 닫고 가게 물건들을 피난민들에게 팔았습니다. 당시에 나는 혼자 전쟁 구경하러 간다고 흥실리 쪽으로 갔습니다. 수리조합 사무실 앞까지 갔는데 포탄이 떨어져 그만 양곡시장으로 뛰어왔습니다.

집에서는 피난 보따리를 싸고 기다리는 중이었고 당시에 총소리도 못 듣던 사람들은 포쏘는 소리에 천지가 진동하니 난리가 났지요. 양곡초등학교에 있던 피난민들이 다 도망갔어요.

양곡시민들도 다 도망갔지요. 당시에 중학교 앞 초등학교 뒤, 흥실리 벌판에 포탄이 떨어졌어요. 문수산 전투에서 국군이 패하며 인민군이 문수산을 점령하고 국군을 향해 포를 쏘아댔던 것입니다”

“지휘자는 인대령이 했는데 국군이 패잔하고 나오니 인민군을 막으라고 했는데 인대령이 문수산에 가서 포를 쏴서 서울서 내려오는 차에 맞아서 버스가 탔습니다. 흥실리서 오는 2㎞는 다 도망갔습니다. 가게문 열어논채로 도망갔습니다. 인대령은 문수산에 올라가지도 않고 도망갔습니다.

가게들은 다 문열어 놓고 도망갔기 때문에 주인도 없이 빈 가게들을 보며 나오는데 말을 탄 인민군들과 마차 등이 흥실리쪽에서 막 밀려왔습니다.

내가 도망가니까 불러요. ‘아버지 어머니 어니갔나’해서 피난 갔다고 하니 ‘너, 어머니 아버지 다시 들어오라고 해라 해방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들으며 도망을 가서 집에 가니까 어머니 아버지는 없고, 상추쌈상이 차려진채 그대로 있더라고요”

“죽음에 들어가면 자식이고 부모가 없어요. 가족이 세 갈래로 다 도망간 거예요. 구례 1리쯤 가니까 인민군 총소리인 따발총 소리가 났어요. 국군이 도망가면서 버리고 간 과자 주워 먹으며 갔어요. 국군이 도망가다가 배가고파 민간인 집에 들어가 밥 얻어먹다 총맞아 죽은 일도 있어요. 세경골짜기 파보면 나올 것입니다”

“쓰르레미 고개 3분의 1쯤 올라가니까 국군 패잔병 3명이 있어요. 인민군들은 벌써 다 쫓아오고 국군이 총 세 자루 다주며 메고 가라고 해서 메고 낑낑 대고 올라갔습니다. 지금의 오삼농원 꽹과리 고개를 가고 있는데 양곡서 누군가 오토바이를 타고 빨간 모자 장화를 신었는데 인민군 장교였어요.

이를 되돌아 보고 군인들이 총을 다시 빼앗아 동산으로 튀었어요. ‘간나이새끼 어디로 갔나’고 장교가 물어서 세 명의 군인이 도망가는 것 가르쳐 줬어요”

“당시 사류지 앞 범바위는 국군과 인민군이 전투를 했어요. 인민군이 포위를 해서 30분 정도 총소리가 났습니다. 끝난지 모르고 대고모 할머니네 가서 부모도 만나고 막내 동생도 만나서 붙잡고 울었습니다.

며칠 있다 집에 오니 밑으로 3가 나흘 만에 집으로 찾아들어 오더군요. 그때 인민군의 빠른 진격이 인상에 남아요. 27일껜 막 밀려갔어요”

”9.28 수복 당시는 인천상륙작전을 하면서 인민군이 후퇴하고 도망하게 되었지요. 미 24사단이 김포책임이었고 양곡은 미수복지였습니다. 내무서원은 다 비어서 국군패잔병이 고향으로 들어오고 대한청년단들이 합하여 4,50명이 치안대를 만들었습니다.

국군이 도망가면서 버리고 간 총, 실탄이 몇 가마며 수십 정이 되었어요. 국군출신이 총 쏘는 법을 청년들에게 가르쳤고 치안대를 구성하여 자체방어를 했지요“

“국군이 들어오려니까 정찰기로 시찰하는데 치안대가 태극기로 만세를 불렀어요. 그때 해병대가 가현산 뒤까지 와 있고 치안대 보초 방위를 섰어요. 군인 1명에 치안대원이 몇 명이 섰는데 밤에 인민군들이 만세 부르며 한 손에 총 쏘며 점령했어요. 역부족이었어요. 인민군 못 이겨요. 밤에는 나타났다가 낮에는 없어지고 했거든요”

“미 24단이 안전한지 알고 국도변으로 점령 들어 왔는데 태극기 안 흔들었으면 긴장했을 텐데 안심하고 들어오다가 인민군들이 양릉의 절 있는 곳에 매복하고 있는 줄 몰랐지요.

미군이 국도변을 따라 차타고 들어오는데 양릉에서 인민군이 닭을 잡다가 미군에게 총을 쐈어요. 거기서 미군이 죽고 수리조합에서 미군과 전투가 벌어졌어요. 인민군과의 전투시 미군의 화력이 커서 후퇴했는데 인민군 1500여명도 후퇴하고 미군도 후퇴를 했습니다.

그 전투가 벌어지고 나서 이튿날 양곡에는 함포사격이 있어서 양곡시장이 초토화 되고 말았어요. 다 불탔습니다. 면소 앞에 7채만 남고 양곡교회 하나남고 폭격을 맞아서 불타고 있었어요.

그 7채의 집에 인민군이 꽉 차 있었어요. 낮에는 1천명쯤 있었고 부상병도 있었어요. 그 집집마다 물건이 꽉 차 있었어요. 좋은 물건 잔뜩 걸머지고 와서 쌓아 놓았어요. 우리 집에 들어가 보니 여기저기 똥 싸놓고 그랬더라고요”

“아마 8월 15일로 기억하는데 인천 쪽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치안대 하면서 지역공산주의자들을 다 잡아 죽이기 시작했어요. 굴이 있었는데 양곡교회 있는데 극장 뒤에 20평의 굴이 있었어요. 인민군들이 곡사포를 묻는다고 했던 곳이예요”

“김동선 치안대장이었어요. 6,25전에도 남로당이 있었거든요. 농민들이 뭘 알아요. 도장 찍어서 남로당이 되었지 조사한다고 불러다 도장 찍어서 남로당이 되는 것이었어요. 인민군 시절 반장하고 공무원 하던 사람들은 치안대에 물어보려 불려온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떤 부부는 애업고 하성 살다 피난 갔다가 온다고 했는데도 ‘당신, 수상해 조사받고 가라. 남편은 더 조사하겠다’고 말하고 아내는 돌려보냈는데 그걸로 사별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빨갱이가 아닙니다라고 치안대가 말해도 해병대가 빨리 끌어오라고 오히려 치안대에게 총을 대며 말했어요. 줄로 묶어서 굴속으로 10명, 5명, 3명 끌려 올라가면 다 죽는 거예요. 애무한 사람이 죽는 거예요.

붙잡히면 새벽에 죽고, 하성의 그 부인은 남편 찾으러 왔는데 남편이 뒤따라 갔다며 거짓말 하고 돌려보냈어요. 어떤 이는 빈 집에서 담요를 들고 나왔다가 굴에 갇혀서 쏴 죽이기도 했어요.

“당시에 해병대들은 ‘야 해장거리 없니?’ 했어요. 사람 죽이는 것을 그렇게 말하곤 했어요. 치안대에서 빨갱이 재산 다 몰수하고 버선 양말짝까지 가져가고 집까지 헐고 그랬어요. 인민군이 쌓아놓고 못가지고 간 비단, 재물들도 치안대가 나눠가졌습니다“

“그 이후에 절대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엄명이 있어서 사람을 안 죽였어요. 가장 많이 죽인 곳이 양곡교회 위 극장 뒤하고, 양곡중학교 뒷산, 베데스다 요양원 근처였어요. 아버지가 붙잡혀 가도 우리 아버지 어디 있냐고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다시 6.25나면 원한이 튀어나올 수도 있습니다”

“인민군이 죽인 일도 있습니다. 아주머니에게 빼앗은 물건을 이고 가게 한 다음 가방은 가져가고 아주머니는 죽였습니다. 심종운씨의 부인이었는데 심종운씨가 찾아가서 죽은 것을 발견하고 원한이 맺혀서 치안대 감찰부장을 했는데 누군가가 잡혀오면 파출소 뒤로 끌고 가 반은 죽여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이가 사람을 제일 많이 죽였는데 나중에 후손들이 제대로 안되더라고요. 그이가 죽었을 때 아무도 안 갔고 거지들이 장사를 지내주었습니다. 딸도 심분순이라고 죽었어요.

후손들이 그만 다 안 되더라고요.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치안대 명부를 가지고 악질과 준 악질로 40명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후퇴하는 날 죽이기로 계획했는데 골말의 장옥이라는 사람이 재무서 자위대들과 같이 월북하면서 도망가라고 일주일 전에 통보를 해 주어서 치안대가 다 도망갔어요. 그리고는 영 돌아오지 않았지요. 같이 월북한 사람은 1.4후퇴 때 정식 내무서원이 되어서 왔었어요.

우리 집을 찾아와서 김동선(치안대장)이 어디 있나 물었는데 아직 안 들어와서 안 죽였어요. 그들은 눈에 띄게 죽일 수 있는 시간이 없었어요. 내무서에 1,2명 밖에 안와서 죽일 사이가 없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농민이고 남로당원이었어요. 모르고 그냥 도장 찍어서 된 거지. 우리 아버지를 잡아다 죽인다고 박후동이가 끌어갔어요. 당시 나는 치안대에 안 들어갔고 어머니는 울고, 강의수 아버지가 마지막 치안 대장이었는데 풀어줘서 살아나셨어요.

빨갱이라고 도민증도 안줘서 강의수가 찾아다 줬어요. 군인을 마치고 동생하고 뒷동산으로 아버지를 끌고 간 이를 끌고 갔어요.

그리고 ‘당신, 이제 우리가 컸으니까 당신 죽어야겠어’ 당시 내가 21살, 동생이 20살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그이가 ‘나 같은 사람하나 죽이면 평생 남는다.

아버지가 죽지 않았잖느냐, 나도 죽이지 말아 달라’고 탈싹 주저앉아서 비는 바람에 같이 눈물 흘리며 내려왔어요. 우리 아버지는 죽지 않았는데도 아버지와 관련해 원한이 맺혔었는데 죽은 사람들은 얼마나 원한이 깊겠나!”

“해병대 1등병이면 기세가 당당했어요. ‘야 묶어’ 하니까 굴에 있던 사람들 중에 국군패잔병 상사가 항의를 하자 앉아서 개머리판으로 맞았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상사다 이해를 바라니 겨우 놔줬어요. 죽일 때는 한명씩 굴 안으로 들어가라 하고는 2미터 사이 두고 총을 쐈어요.

그러면 팍 고꾸라져요. 초등학교 2회 선배는 총을 쏘기 전에 대한민국만세, 이승만 대통령만세 10여번을 했어요. 해병대가 기분파라서 그걸 보더니 ‘가라!’ 해서 살아나서 갔어요”

“우리 아버지는 2차로 또 불러서 또 죽는 줄 알았어요. 도망가다 죽인 사람을 실어 나르려 들것을 가져오라는 것을 모르고 놀랐었지요. 우리 아버지는 대한민국의 반장을 10년 했고, 우리 앞집 아저씨는 인민군 시절 반장일 좀 봤다해서 죽였어요. 그 아들도 거지로 살다 객사했고, 부인도 죽었어요”

“왜정시대에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었는데 담임도 국제공산당이어서 간첩이 되어서 나왔다가 잡혀서 반공강의를 하러 다니곤 했어요. 정선생이라고요. 그리고 선배들 중에도 7-8명이 똑똑했는데 국제공산당에 들어가 해방되고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45년에 다 배웠었어요.

그 사람들이 6.25나고 9.28 수복되니까 다 없어져 북행을 하고 인민군 의용군을 지원하더라고요. 나중에 들어보니 모르게 다시 월남해 산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말야 죽을 때까지 못 잊어요. 같은 사람끼리 파리새끼 죽이듯 말이야. 치안대 밥해줄 때 반반한 집 딸들, 하이칼라 현대여성들이 학생동맹 위원장 여성동맹 위원장 했다고 잡아다가 식사 동원시켰어요. 죄인이니까 심부름했지.

그런데 해병대들이 오니까 하루오더니 죄 붙잡아 가현산에서 돌아가면서 강간을 했어요. 그리고는 또 잡으러 와요. 여자이고 인물이 있기 때문에 살았어.

보이지 않아야지 보이면 다 문제야. 해병대를 ‘개병대’라고 했잖아요. 인간으로서는 전쟁하지 말아야지 어떻게든 피해야 돼. 한 두 대로 끝나지 않는다고요. 기억하고 있지요. 얼른 4, 5대 후딱 지나가야 해요.”

“밀리고, 밀려갔다 하면서 너무 많이 죽었어요. 그때는 사람들이 아니야. 경찰가족이 아버지 죽였다고 당숙 등 7명의 친척을 죽인 일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양곡에는 터키 1개 여단이 있었는데 터키부대 장병이 키가 크고 어른 같아 보이자 ‘커뮤니스?’라고 물어보니 영어를 모르는 채 ‘오케이 오케이’ 해서 끌고 간 후 행방불명 된 일도 있어요. 진재울 앞에서 그랬는데 행방불명이 된 경우도 있어요. 강의수 아버지인 강영규씨는 마지막 치안대장이었어요.

가라고 빼주고 선처를 많이 해서 번영회도 자비 들여 봉사하고 좋은 일 많이 했어요. 그래서 송덕비도 있어요. 죽은 영혼들을 위한 위로가 가능할까요? 지금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아요.”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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