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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죽이고 애국자인척 사는 사람들이병수(78세)/ 양촌면 구래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양촌면>

사람죽이고 애국자인척 사는 사람들

의용군 2달 반, 국군은 4년
남자들 없는 부락도 있었다
소식 없는 몇 사람들 살아 있으리라

   
▲ 이병수(78세)/ 양촌면 구래리
19살 때 구래리(꾸지)에서 6.25를 만났다.
“6.25가 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5남매였는데 논에서 일하며, 바쁘게 다니고 있을 때 새벽 4시인가 몇 시에 인민군의 기습을 알리며 비상소집을 내리는 거예요.

그때는 방위대가 있어서 18세 이상은 방위군 교육도 받고 훈련을 받았었는데 동료가 비상소집을 알리러 온 거예요. 그래서 방위대원들은 양곡으로 출동하게 되었지요. 나가보니까 바리미 한강변에서 보초를 서라고 내보내더라고요”

“한강변에 목총을 들고 민간복으로 보초를 서고 있는데 인민군 총소리가 들리고 포성이 들리더라고요. 27일, 저녁에 누산리에 소집되었고, 마송으로 배치시켰는데 그때까지는 인민군을 못 봤어요. 무조건 수참으로 배치를 시켰는데 이미 빈집들이고 피난을 가고 없더라고요.

28일 식전에 포성소리가 별안간 들리더니 총알이 떨어지고 포사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위대와 부락민, 군인들이 한데 섞여서 논두렁 밭두렁으로 기어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집에까지 도망을 왔어요”

“집에 와보니 이미 부락에서도 피난길에 나섰고, 검단 인천쪽으로들 도망가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기다리며 울고 있어서 함께 구래골 넘어 향동까지 피난을 갔어요. 그리고 빈집에서 하룻저녁을 자고난 뒤 도로 집으로 왔어요. 삼도 끝에서 이틀을 자고 왔는데 군인들은 대항도 못하고 모두 후퇴하고 이미 인민군이 면사무소를 점령한 거예요. 그래서 며칠을 숨어서 살았어요”

“인민군 시대가 되었으니 거기에 타협안하고 숨어있는데 하루는 우물 뒤에 숨어 있는데 저벅저벅 중공군이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래도 숨어 있는 것이 들키지 않았어요.

그때는 젊은 사람들 잡아다가 사역시키거나 죽는다는 소문이 파다했어요. 중공군을 우리 집으로 안내한 사람은 보도연맹으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과 청년단 노역자 두어 사람이었어요.

그 이후 인민군 쪽에서 방위군에 다니던 사람들은 18세 이상 다 모이라고 했어요. 인민군은 참 말을 잘했어요. 면민을 총출동시켜 놓고 이북선전공세를 했는데 ”이미 대구까지 내려갔다. 얼마 안 있으면 전쟁이 끝난다“고 선전했어요.

인민군은 강제 동원으로 의용군을 뽑았어요. 명색이 지원이지 강제였어요. 지원자를 뽑는데 나는 노인 어머니만 모시고 있고 병환중이라 집을 빠져나갈 형편이 못된다고 핑계를 대고 다음에 나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 날마다 회의였어요. 사상이 변할 때까지 하는 거예요”

“보도연맹 믿고 안 나가려 빽을 좀 써보려고 했는데 “방위군이었던 사람은 안 데려가려고 해도 지원해 나가야 된다. 어서 나가라,  지원해라 한 달 안에 다 끝난다”고 했었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큰 형은 50세였는데 50세까지 다 끌어갔습니다. 그래서 한 달 안에 끝날 줄 알고 지원을 나갔습니다“

“김포초등학교에서 연설을 듣고 한강을 건너 마포초등학교, 의정부, 동두천, 장단,  평양 이북까지 갔어요. 걸어가는데 한 달이 걸렸어요. 비행기가 무서워서 낮에는 꼼짝 못하고 밤에만 걸었어요. 며칠 동안 훈련하고 진남포에 주둔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평양에서 1.4후퇴 때 인민군 부대에 편입하게 되었어요. 우리 부대가 압록강 제2 집결지에 모여라 했는데 후퇴를 제대로 시킬 수가 없으니 해체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사람들이니까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조가 되어 흩어졌어요”

“5명이 한패가 되어 ‘우리 고향은 서울이 아닌가 여기 와서 죽는 것보다 고향땅에 가서 죽더라도 죽자’고 하면서 5명이 촌락에 들어갔어요. 어디서 강제로 온 사람들이 해산되어 치안을 도와준다는 소문이 나자 도와주려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부락에 1-2명이 배치되어 지켜 달라하고 보호를 받으며 부락을 지켜주었어요. 그러다가 며칠 지나자 평양이 탈환되고 미군측 CIC 특무대에 자수를 하러 갔습니다”

“오대령이라고 특무대 대장이 있었고 처가가 있고 집이 있었어요. 경황이 없으니 빨리 특무대에 찾아가자 가는 길에 날이 저물었는데 주민들이 ‘경비원들이 밤중에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을 시킨다’고 하는데 마침 미군지프차가 지나가면서 김포공항의 통역관으로 있던 사람이 일체 특무대에 가서 우리 일을 도와주다 보면 가는 길이 뚫릴 거라고 해서 건축 잡일을 도와주게 되었어요”

“오대령의 집을 수리하고 장작도 패고 그랬어요. 12월에 피난 소개명령이 내리면서 특무대 대장이 식솔들을 데리고 피난을 나오는데 같이 나왔어요. 대동강 다리폭격으로 사람들이 몰려 반은 떨어져 죽었어요. 아군들이 폭격을 한 거예요. 우리는 피난을 하느라 개성 무인지대에서 밥을 해먹고 있었어요.

뒤는 중공군이고 앞은 국군하고 미군들인데 우리는 신분이 정확하지가 않은 거예요. 그래서 가운데 끼어서 나오는데 매우 조심해야 했어요”

“개성에서 2-3일 지체하고 가운데 들어서서 죽게 된 사람들이니 어떻게 해요. 얼음 강을 건너야 했지요. 임진강을 옷을 벗고 건넜어요. 여자들은 어린 아이업고 가다가 애가 죽은 줄도 모르는 이도 있었어요. 그렇게 파주 땅에 와서 고양 이산포 나루에 왔는데 경찰 심문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사실 붙잡혀도 안심했어요. 왜냐하면 강 건너가 김포니까 금방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제다 죽인다는 거예요. 내가 갖고 있던 보따리 속에 미군 사지쓰봉과 이북 돈이 있었거든요. 이북 돈, 그거 들켜서 혼났어요. 이북 돈이 있으니까 가두는 거예요”

“밤에 국군이 한사람이 말하기를 ”물 건너가 고향인데 심정이 오죽하겠나, 군인 옷을 두고 갔으면 한다“고 해서 얼른 대답을 하고 다 털어줬어요. 옷을 주고 나니 통과 시켜줘서 배를 타는데 사람이 하도 많아 이북 돈을 선장에게 집어주고 새치기를 해서 배를 탔습니다.

강 건너 고촌지서에 도착해서 다음날 향산리 고모네로 갔다가 집으로 오게 되었어요. 그리고 사흘 있으니 후퇴명령이 내려 1.4후퇴가 시작되고 남으로 가야 했지요”

“그런데 그 동안 경험상 그냥 쫓아갈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서 어무르 6촌형 처갓집 동네로 가서 여러 날 있었어요. 그 후에 집에 와보니 인민군도 한국군도 없더라고요.

그러다가 학교에 들어가면 연기가 된다고 해서 중학교 3학년 보결로 다니다보니 영장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다시 국군으로 나가서 논산훈련소 창설시 일을 많이 했어요”

“하루도 제대로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한문을 1년 반 배운 실력으로 주야로 기간요원 글을 써 주다 보니 2천명 졸업생 대표로 답사도 하고, 서무계 조수로 뽑혀서 임시 소대장 노릇도 하고, 육본 직하로 있던 경비대대 해체가 되어 원주 제 1군사령부 거쳐서 15사단 화천으로 부대 배치되고,

밤중에 호명해서 영관급 차타고 사단본부에 데려다가 사단 사령부 작전계로 가서 일했어요. 가리방 긁어서 하달하는 일을 고생은 했어도 전투는 안했어요. 그리고 사년 있다가 제대 했지요”

“당시에는 도장을 찍어서 보도연맹이 되고 아무 죄도 없이 자격도 안 되고 무식한 사람들, 몇 사람은 무슨 죄인지 알지도 못하고 양곡서 흥실리 나가는 중학교 뒷산에서 죽었어요. 사람을 밤중에 나오라고 해서 죽였다는 얘기예요.

보도연맹에 가입시키고 앞장섰던 사람들, 죽인 사람들이 평이 좋지 않았어요. 죄가 없는 사람들을 죽였어요. 그 당시에는 60호 정도의 인구였는데 청년들이 군대 나갔다가 들어와서 자꾸 죽었어요. 우리 또래가 제일 외롭다고요. 죽기도 많이 죽고 아팠어요”

“애국자가 없어요. 저 살기위해 이리저리 빠져나가면 살았던 겁니다. 내가 알기로도 세 사람이 보도연맹이 되고 남의 집이나 살던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어요.

죽인 사람들은 애국자인척 하고 더 나쁜 짓하고 살아 남았다가 명예롭지 못하게 죽었어요.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어디있겟어요. 집권자들 때문에 국민들은 이리 저리 쫓아다닌 거지”

“마을 골이 깊어졌던 이야기들입니다. 지금은 다 잊었습니다. 우리 동네는 5명의 장년들이 죽음을 당하고 끌려가서 죽은데서 다 죽었어요. 남자들 없는 부락도 있었어요. 꾸지 2리는 그랬어요.

행불자는 알 길이 없어요. 18명이 의용군 나가 죽은 사람이 7-8명이고 포로 수용소에 있는 줄 알았다는 사람이 개성서 돌아다니는 것 보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소식이 없는 사람들 몇 사람은 살아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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