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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싸웠을까 의문이 일어최종훈(85세)/ 양촌면 양곡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양촌면>

무엇을 위해 싸웠을까 의문이 일어

그때 고생한 것을 누가 알아요?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고 살았지요.
우리가 누굴 위해 싸웠나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 최종훈(85세)/ 양촌면 양곡리
“국군 창설한다고 하여 경비대에서 1분대 분대장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6.25사변 시에는 경비대 시절이었고 6.1날 위병제대하고 대곶에서 아픔을 치료하고 있더랬어요. 우당탕 퉁탕 비가 오는 천둥 소리인줄만 알았는데 통진학교 다니던 아이들이 피난민 온다해서 알았어요”

“난 군대에 있을 때 결혼을 해서 아내는 상계동에 있고 나는 몸을 고치러 대곶에 있다가 자전거를 타고 상계동으로 달려갔어요. 그런데 쾅하더니 방안이 번쩍하고 아내는 만삭에 오산까지 피난을 가느라 법석이었지요. 피난 중에 애기를 낳아 다시 들어왔어요.

그때 인민군이 붙잡고 손바닥을 검사했어요. 농사짓다가 돌아오는 중이라고 했지. 아내가 아니면 잡아 죽였을 거야.

아내는 아기를 낳자마자 사흘 안에 얼굴이 붓고 나는 애기 걸레를 빨다가 인민군한테 걸려서 비행기 수신호를 보낸 걸로 알고 잡아가려고 했거든. 마누라 덕분에 살았다고요”

“염창교 다리는 끊어져서 김포군 양서면 염창리였잖아요. 배타고 건너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빈집에서 자다가 누군가가 찔러서 끌려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이 엄마 있으니 봐달라고 애원하니까 놔주더라고요. 천둥고개를 넘는데 인민군 트럭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세워서 말했어요.

총알이 무서워서 피난 갔다가 돌아오는 중이니 좀 태워달라 부탁하니 산모만 태워주는 거야. 그래서 트럭위에 타고 누산리에 내려줘서 걸어서 양곡에 왔는데 동네빨갱이들이 무서워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저녁때에 대곶으로 갔어요. 혼자서 마른 논에서 잤어요. 아내는 여자라서 안 잡으러 오니까 다행인데 나는 국방군 출신이라 잡히면 죽었어요. 그래서 몇 달 있었어요”

“그때는 도강증이 있어야 한강을 건널 수 있었어요. 9.28이후 한강을 건너갔어요. 군 제대했지만 국군으로 있다가 부대를 이탈한 사람들을 종합적으로 재소집을 하더라고. 충정로 집에 가니까 군에서 재 소집장이 내려와 있어 경복궁으로 집합을 했어요.

어디가야 사나해서 차라리 군대 가서 밥한 끼 얻어먹고 사는 게 낮다고 생각했어요. 대곳에 아내는 처갓집에 두고 중사계급인 갈매기 세 개로 아침 10시에 소집에 응했던 거예요”

“1사단은 강성이었어요. ‘목이 마르면 피를 빨아먹고 살아라’고 할 만큼 말이야. 그래서 살아있는 소를 한 마리씩 대검으로 짤라서 먹고, 불도 못 놓게 해서 생으로 먹다 말기도 했고요.

1주일인가 2주일 훈련을 시켜 신병들은 일선으로 가야했어요. 1개 분대 9명씩 자고 훈련했는데 고랑포 나가서 완전 포위되고 풍비박산 났지. 아군은 서너 명 죽고 인민군은 서울 북악산까지 진출했었어요. 1.4후퇴 때가 시작되면서 배재중학교에 아군의 포를 마당에 배치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53년에 부상을 당했는데 장단에서 1사단과 인민군과 수시로 접촉되고 싸움이 일어났었어요. 수도 육군병원에 있었고 대구 27육군병원에 있다가 836부대를 통해 제대하고 고향으로 오니 형님은 잡혀갔다가 도망오고 우익단체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보도연맹이 잡아갔더라고요”

“그때 고생 고생한 것을 누가 알아요?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고 살았지요. 그런데 우리가 누굴 위해 싸웠나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그리고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나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 고생 고생한 거 말도 말아요. 지금 사람들이 고생이라고 하는 것은 고생도 아니야. 그리고 그때 일어난 일들 다 말 못하는 거 많아요. 다 살아 있잖아요. 자손들이 서로 말을 안 할 뿐이지 잊지는 않고 있는 거라고요”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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