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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로 손가락질 당하면 죽는거야권영세(80세)/ 대곶면 송마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대곶면>

빨갱이로 손가락질 당하면 죽는거야

친 맏형 빨갱이로 몰려 죽음당해
본인, 의용군을 거쳐 국군나가 부상

   
▲ 권영세(80세)/ 대곶면 송마리
6.25당시 대명리 204번지에 살았다.
22세에 6.25가 터져 징병 1차로 대구 제2훈련소에서 15일간 훈련을 받고 전쟁터로 나갔다. 다른 이들은 일주일 받고 나갔다.

“그때의 지도를 보면 한심했어요. 당시 대구 낙동강을 끼고 싸웠어요. 당시 22살인데 의용군에 끌려가다가 장단에서 은인을 만나 열흘 동안 숨겨줘 살았어요. 국군이 진격해와 해방되어서 조강 바다를 건너 집에를 왔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3개월 있다가 재 입대를 했는데 국군에 입대한 거예요. 금화지구 강원도 중부전선에서 무릎에 파편을 맞아 야전병원 서울 36군병원에서 1주일 있다가 밀양 7국군병원에서 5개월 병원치료를 받았어요.

파편이 50년 이상 몸에 있었던 거지. 50년 이상을 몸에 넣고 살다가 뺐어요. 연골을 우겨내고 인공관절을 했어. 그리고 2008년 국가유공자 7급 판정을 받았어요. 그때 군대생활은 18개월을 했어요. 그리고 명예제대를 했어요.

“대곶면에는 참전용사가 70명 있는데 국가유공자는 10명뿐이야. 내가 제대해 와서 대곶면으로 인민군이 들어왔어요. 대곶면은 물 건너가고 격전지는 아니었어요. 중부전선에 들을 때는 김포는 쑥밭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돌아오니 멀쩡하다 싶어”

1.4후퇴 때는 피난을 가다가 돌아왔다.
“누이동생 2명 남동생 1명과 안양근처 남양에까지 갔다가 중공군이 더 앞섰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때는 농사지으며 살았지. 전시에도 의무대여서 휴가차 집에 와보니 농사짓고 있었어요. 22살에 입대해서 24살에 제대했어. 그리고 25세에 결혼했어요. 오늘날까지 살고 있는데 6.25 때문에 자손도 못보고 죽은 이들이들 많았어요”

“그때는 무슨 질서가 있었나. 치안하는 사람들, 치안대들에 의해 죽은 이들이 많아요. 저사람 빨갱이다 손가락질 당하면 죽었어요. 사적인 감정으로 죽인사람들도 있었지. 상극시대라 죽였어. 무극시대였으면 안 죽였지.

나의 맏형인 권영목이 그렇게 죽임을 당했어요. 당시 25살인데 방앗간 하던 이영수(35-37살)의 사주를 받고 죽은 거야. 처음에는 치안대에 형이 면사무소로 잡혀들어 갔는데 치안대장이 놓아줬어요”

“대명리서 몇째 안가는 부자였는데 농사가 서른 닷마지기였다구. 인민군하에 민청위원장을 형이 보았어요. 한 2개월여 봤어요.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인민공화국 만세’하며 환영일색이었어. 이영수도 따꿍총 소련제 메고 대명포구에서 치안대 했다고. 인민군쪽 일을 말이야.

근데 국군이 들어오니 ‘내가 애국자’라고 변해서 국군치안대로 행세하면서 설치고 다니고, 권영목을 사적인 감정으로 지목해서 면사무소에 가두었다가 면사무소 산 너머 골짜기에서 죽였어요. 대곶면 사람들 수십 명이었지”

   
▲ 권영세(80세)씨는 국군으로 전쟁터에 끌려다니며 파편을 무릎에 맞아 50년 세월 장애를 안고 살아왔다.

“이 근방에서 아는 사람으로도 대명리에 친형 권영목, 송마리에 권오향, 권영표, 권오선, 김창봉, 신안리 차정식 등 대명리, 송마리, 신안리 사람들도 죽었다고. 대곶면 전체는 모르지. 1.4후퇴 전에 죽인거야. 그래서 1.4후퇴할 때 노인이라고 안 나간 사람들 늙은이들이 묻어주었어요.

당시에는 제대로 모르니까 옷들보고 찾아가 묻었어요. 살얼음판이라 얼씬도 못했다고. 죽이면 끝난 거야. 손가락질 한 번이면 죽는 거야. 우리 형은 부모가 있는데서 끌려갔어요”

“우리 아버지는 권태명, 우리 어머니는 이흥녀씨야. 살아계셨으면 아버지는 113세, 어머니는 105세시지.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아들 총살당하고 한두 달 있다가 피난을 가겼어요. 그때까지 아들시체를 찾아오지 못했어요. 직접 거두지를 못하고 집안의 삼촌 육촌형님들이 마주잡이해서 묻어준거야. 당시에 장조카가 있었어요. 다섯 살이었는데 권오윤이라고. 그런데 25살에 유행성 출혈열로 죽고 말았어.

그래서 제사 지내다가 손이 끊어진 거예요. 지금 살아있으면 63세야. 우리 형은 당시에 똑똑했어. 그래서 일 시켜 놓고 나중에는 빨갱이라고 죽였어. 서로 맞총질한 일이 맞아요. 전쟁당시 부상당하면 이쪽저쪽에서 서로 죽인다구”

“1.4후퇴 때는 큰 난리였지. 길거리가 모두 차서 말이야. 대곶면에 인민군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22살이었는데 동네마다 회의가 생겼다고. 이북 선전하니까 180도 모두 이북성향으로 돌았어요”

“곡식 알갱이 세고, 조알갱이 세고, 현물세 걷으려 했지. 6.25전부터 남로당이 봉화 불을 키고 연락하고 있다가 인민군들이 들어오면서 합세가 된 거야. 당시 강화는 빨갱이 군이라 빨갱이면이라 했어요. 낙동강 전투 후에 월북자가 많았어요. 신안리만해도 차경덕, 문현철, 차덕윤이가 북으로 갔고 송마리에는 심상현, 권영운(교사)이가 의용군 포로로 수용소에 있다가 이북으로 갔어요”

“포로교환을 할 때 7:1로 바꾸어 왔어요. 일곱 명을 보내야 1명을 데리고 왔어요. 아직도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이북에 많아요. 그 당시 유엔군 띤 소장이 잡혀갔다가 신문에 보니까 돌아왔다는 보도를 보았는데 그것이 7:1로 바꾸지 않았나 생각해요. 7:1이 뭐냐 이거지. 포로 교환시 돌아온 사람 많아요. 권영균, 민동천, 정윤수, 권영범, 이영범(포로수용소에서 죽었음), 권영환이가 있었는데 권영환은 다시 국군 나가서 죽었어요”

권영세씨는 매우 선명하게 그때 일을 기억하고 이름도 정확하게 말했다. 6.25회고가난 노량진 전투가등의 가사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형은 빨갱이라고 죽고 본인은 의용군에서 다시 국군으로 전쟁터에 끌려 다니며 파편을 무릎에 맞아 50년 이상의 세월을 장애를 안고 살았다.
지금은 대명리124-2번지에 살고 있다.     

 

유인봉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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