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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에서도 민간인 학살 있었다"오00 씨/미래신문 2004년 6월 25일자 기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대곶면>

"김포에서도 민간인 학살 있었다"1) 

분단 반세기의 침묵…6.25 민간인 학살 증언 충격   

한국전쟁 54돌을 맞아 김포에서도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돼 충격을 주고 있다. 본지가 6.25 세대를 취재한 결과 그 동안 소문으로 무성했던 김포에서의 민간인 학살이 사실로 드러났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학살자 수도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대곶면 지역에서는 북한군의 김포 점령 당시 일을 봤던 사람들이나 좌익세력, 그리고 일부 무고한 시민도 희생됐다. 한 마을에서는 남편이 도망갔다는 이유로 임신 중인 부녀자도 희생됐다. 김포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의 참상을 알아본다.

한국전쟁과 김포
김포는 1950년 6월25일 새벽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난길에 오를 시간적 여유도 없었겠지만 서울이나 인천지역에 비해 전투가 치열하지는 않았다.

당시 대곶면에 살았다는 A씨는 “피난을 가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여기가 피난처인데 어디로 가느냐”며 “오히려 피난길에 오르는 것보다 여기가 안전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00씨도 “일부는 피난을 가기도 했고 일부는 그냥 남아 있었다”며 자신의 가족들은 인천까지 피난을 갔다고 돌아왔다고 증언했다.

북한의 김포 점령과 청년들의 의용군 참전
한국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김포를 점령하면서 많은 청년들이 의용군으로 전쟁에 투입됐다. 증언자 오00씨의 형도 3차례나 의용군에 참여했다가 뒤에 한국군에 정식 입대, 강원도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오씨는 “형님이 의용군에 참여했다가 도망오기도 하고 나중에는 논산까지 내려가서 입대를 했다”며 “꽤 여러명의 청년들이 논산까지 걸어가 한국군에 입대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시 오씨의 형이 받은 군번은 ‘01’로 시작되는데 이것이 논산훈련소의 첫 군번이라고 한다.

남북의 번갈은 김포 점령
1950년 9월15일. 남한의 패색이 짙던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됐다. 새벽 6시를 기해 월미도에 상륙한 맥아더와 미 해병대는 삽시간에 인천을 수복하고, 전세를 몰아 북으로 진군한다. 김포도 수복된다.

그러나 김포 수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951년 1월 중공군이 밀려오면서 1.4 후퇴의 긴 행렬이 시작된다. 김포가 중공군에게 점령됐다. 증언자들은 김포를 점령한 중공군은 닭과 돼지, 소등 가축을 많이 잡아갔다고 말한다.

당시 14세였던 A씨는 “중공군이 내려오면 가축을 모두 잡아간다기에 키우던 닭을 잡았는데 다음날 정말로 중공군이 와서 닭을 잡아갔다”며 “쇠스랑 모양의 농기구가 그려진 동전을 주기도 했고,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16세였던 또 다른 증언자 B씨는 피난길에 일행과 헤어져 중공군에게 잡혔다가 삭시(양촌면 학운3리) 부근에서 풀려났다고 한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과 인천상륙작전, 중공군의 개입,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 김포는 남북의 점령이 반복됐다.

북한군의 후퇴와 치안대의 좌익 색출
한국군이 김포를 수복하면서 치안대 활동이 시작된다. 당시 북한군에 협력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치안대는 군ㆍ경과 함께 좌익인사 및 북한군 동조자들을 색출한다.

이때부터 김포지역에서도 학살이 시작된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북한이 점령했을 때 동네에서 일을 봤던 사람들이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북한군이 점령하면서 마을마다 공산당의 일을 볼 사람을 뽑았다.

당시 16세였던 증언자 B씨는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공산당 일을 봤던 것으로 안다”며 “동네에서도 몇 사람이 일을 봤다”고 말한다. 또 다른 증언자는 “북한군이 들어오면서 동네에서 일을 볼 수 있는 사람을 세우기도 했고, 좌익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며 “꽤 여러 사람들이 좌익 활동을 한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송마리 소래골 학살터, 최소 수십명 학살
당시 대곶면사무소(현 진양빌라) 앞에 창고가 있었다. 대곶면에서 좌익 또는 공산당 일을 봤던 사람들은 이곳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소내골(맹근돌이골이라고도 한다.)이라 불리는 송마리 산244번지에서 최후를 맞았다.

증언자 B씨는 “동네 사람이 끌려가서 대곶면사무소 창고에 갇혔다가 그곳에서 죽어 시신을 수습해서 묻는 것을 봤다”며 “어떤 사람은 자수를 하면 살려준다고 해서 자수를 했는데 죽이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농사일을 마치고 술을 마시다가 끌려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오00씨는 “그 곳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도토리를 따러 그 산에 갔다가 흙 속에서 드러난 시신을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공장이 들어서 흔적이 사라졌지만 한 증언자는 “공장을 짓기 위해 흙을 파내면서 유골이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학살은 대곶면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A씨는 “양촌면에서는 (현재)양곡성당 주변의 소나무 숲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가 사는 동네에는 남편이 끌려가서 밥을 해가지고 가다가 남편이 처형되는 모습을 목격한 아낙도 있다고 말했다.

학살의 대상도 좌익이나 공산당 동조자 뿐만은 아니었다. 증언자에 따르면 부친상을 치르던 상주도 잡혀가 희생되고, 좌익 활동을 했던 남편이 도망갔다는 이유로 임신한 부녀자가 희생되기도 했다.

증언자들은 대부분 동네마다 최소 1~2명씩 북한의 일을 봤던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의 대부분이 학살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또 증언자들은 치안대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좌익 활동을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으로 넘어갔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이들이 실제 북으로 갔는지 아니면 죽임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민족의 비극! 이제는 말할 때다
증언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대곶이나 양촌에서의 학살이 김포의 다른 지역에서도 벌어졌으리라는 추정된다. 그러나 “민간인의 억울한 죽음이 북한군보다는 한국군(치안대 등)에 의해 더 많이 이루어졌다”는 소문만 동네마다 무성할 뿐,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던 6.25 세대에게 이 이야기는 여전히 금기사항이다.
 

반면 2001년 1월12일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에 대한 유감 입장을 밝히면서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의 여론이 높아졌다. 민족상잔 반세기의 침묵이 서서히 깨지고 있는 것이다.

동국대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는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발표되면서 ‘한국전쟁과 양민학살’이란 글을 통해 ‘철저한 진상규명’과 ‘과거청산’을 요구한 바 있다.

강 교수는 “한국전쟁에서의 양민학살에 대한 왜곡은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의 양민학살까지 은폐하는 자폐증상을 보이고 있다”며 “양민학살 진상규명이 과거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의 단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6.25 세대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정확히 증언할 80~90세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전쟁의 상처를 반세기가 넘도록 가슴속에만 묻어두어야 했던 세대가 모두 떠나기 전에 김포에서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는지 밝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데올르기 대립에서 비롯된 역사의 굴레를 푸는 것이 굴절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나아가 남과 북의 관계를 푸는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미래신문 2004년 6월 25일)


각주)-----------------
 미래신문이 2004년 6월 25일자로 김포지역에서 처음으로 6.25전쟁 중 민간인 학살이 있었음을 보도했다.

각주)-----------------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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