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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머슴한테 두들겨 맞았어요경제봉(78세)/ 통진읍 서암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통진읍>

아버지가 머슴한테 두들겨 맞았어요

부친, 구장 보았다고 붙들려 매질당해
인민군 비행장 근로동원 부역 2차례
1.4후퇴시 25일 동안 부산까지 걸어가

   
▲ 경제봉(78세)/ 통진읍 서암리
6.25때 중학교 5학년이었다. “6.26일 오후 학교에서 라디오로 방송을 하면 학교에 다시 나오라고 하면서 집으로 돌려보냈어요. 당시는 역마차와 전차가 교통수단이었고 집이 노량진이었기 때문에 전차를 타고 집에 갔어요.

6월 27일 한강철교가 터지고 새벽 5시 30분에 흑석동 뒤에서 한강 백사장을 보니 사람들이 하얗게 몰려 있더라고요. 당시에 중지도(섬) 보트장이 있었어요. 조반 먹고 보트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데 서로 건너려고 돈을 얼마 줄 테니 건너 달라 애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여학생 두 명을 태우고 건넜어요”

“관악산에 피난 중에도 포가 떨어졌어요. 안양서 군포로 해서 집으로 걸어오는데 빈집이 있어서 감자도 캐먹고 걸었어요. 향동고개로 여학생 2명, 남학생 2명이 걸어 고개를 오르는데 인민군을 만나게 되었어요.

인민군이 조사를 한다고 가방을 조사하는데 서울서 학교를 다니다가 양촌 마송으로 가는 중이라고 설명하니 남학생은 2명 다 가라고 하고 여학생은 더 조사를 할 것이 있다며 호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거예요.

여학생은 중5(18살), 중3(16)인데 나하고 같이 있던 남학생이 자기 고모라고 울며 안 된다고 하자 남학생을 개머리판으로 엉덩이를 차 버리는 겁니다.

그러고 난리를 떠는데 빨간 줄이 있는 바지를 입은 인민군 장교가 왔어요. 왜 그러냐고 해서 보더니 ‘이 간나쌔끼 왜 안 보내느냐?’며 인민군들에게 말을 하고 보내줘서 쓰르레미 고개에서 구래리까지 단숨에 뛰어왔어요”

“양곡에 오니 불바다더라고요. 집들이 불타고 있었어요. 걸어서 마송리까지 왔는데 그때가 29일 이었고요. 당시에는 양촌면 마송리였어요. 우리 아버지가 구장을 보았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머슴하던 이가 작대기에 뻘건 기를 달고 아버지를 붙잡아 가서 이틀 동안 매를 맞았대요. 새벽 세시 반에 풀려나자마자 옷 한 벌과 쌀 한말을 가지고 인천으로 도망을 가셨답니다.

집에 와보니 이미 아버지는 가고 없으셨어요. 그래서 나는 다락방에 숨어있는데 인민군이 찾으러 와 일주일 만에 들켜서 근로동원 가라는 통에 강서구 가양동으로 갔어요. 양천초등학교 교실에 300-400명이 모여 있는데 저녁 7시에 김포비행장으로 근로동원 되었어요.

인민군 비행기가 10대정도가 와 있어서 도치카를 만드는 것인데 마대로 둥그렇게 싸고 위장막을 씌우고 비행기를 가져다 놓았어요. 부역은 1주일 했어요 새벽 4시 30분이면 철수해서 다시 양천국민학교로 가서 다시 자고 밤에만 동원되어서 작업을 하게 되었어요”

“당시에 인민군 장교에게 말을 걸어 본 적이 있어요. 자신이 조종사라로 합디다. 그래서 ‘이북에는 동네마다 노적가리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그 조종사가 ‘상상에 맡기겠다’고 하며 웃더라고요. 당시에 인민군의 비행기가 미군기에 폭격을 맞아서 3대가 부서졌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 이튿날 미군 콘세트가 폭격을 맞아서 불이 타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간을 부역하고 마송으로 왔어요. 그리고 5일 만에 곰달로 미군 잠수함이 들어온다고 호를 파라고 인민군 쪽에서 끌어내는 바람에 이틀을 자면서 이틀간 부역을 하고 다시 집으로 왔어요.

그리고 10일 후에 인민위원장이 인민군을 모집하니 양곡초등학교로 가라고 해서 그날 밤으로 외갓집이 있는 대곶 송마리로 도망을 갔습니다. 집에는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만 있었고 9.28수복이 될 때까지 있다가 집으로 왔습니다”

“9월 21일 경 해병대가 마송리 동산에 와서 주둔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게 되어 물과 미숫가루를 주었습니다. 해병대가 인민위원장과 여성동맹위원장 2명을 나무에 묶고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양곡지서에서 끌고가서 총살했습니다.

나는 외갓집이 외따른 곳에 있어서 안전하게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 해병대 동창을 따라서 문수산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가는 도중 인민군 잔여부대에서 박격포를 다섯방을 쏘고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문수산 정상에까지 갔다가 집으로 왔어요”

“그때는 지서가 양곡밖에 없었고 당시 마송리는 양촌면 관할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동창생들이 인민군으로 3명이 지원해서 갔는데 나중에 포로수용소에서 2명은 북으로 가고, 한명은 남으로 와서 해병대에 들어갔어요. 통진은 직접적인 학살은 없었어요. 바닥 빨갱이가 좀 있었습니다. 바닥 빨갱이들이 5명 정도를 인민군으로 끌고갔어요”

“1.4후퇴 전에는 압록강에서 후퇴를 할 때 다시 인민군이 오면 죽겠다 싶어서 25일 동안을 걸어서 부산 동래에까지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학도병을 모집한다 해서 국군을 지원했습니다.

1950면 12월 8일에 입대해서 56년 5월 1일까지 근무했습니다. 우연히 배제를 다닌 장교인 대위를 만나서 육군본부 인사국 본부에 근무했습니다. 1800명 중 나 하나가 그렇게 됐습니다.

우리 1800명 동기생 중의 3분의 2가 전사했어요. 1주일 훈련받고 전방에 배치되었으니까요. 동기생들 전방에 간지 1달이 안되어 그렇게들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쟁을 할 적에 나는 전쟁은 안했습니다. 육군부관학교 1기생이 되었습니다”

“지역 빨갱이들이 한 동네에 몇 사람 있고 비교적 많이는 희생이 안되었습니다. 희생자는 바닥빨갱이 6-7명 있었습니다. 마송은 과거에 매수리라고 했고요. 구연호라고 내무서원이 있었는데 총을 메고 고촌서 지키다 죽었고, 마송리에서만 6명이 있었습니다.

마송에서 월북한 사람은 10명이고 그 중에 이산가족과의 만남이 있을 때 만난 이도 있습니다. 성덕경씨가 외삼촌을 만났었습니다. 가현리에는 신씨네가 빨갱이가 많았습니다. 희생자가 10명 넘을 것입니다. 월북하고 그랬습니다. 9.28당시지요” 

“양곡초등학교 24회 인데요. 초등학교 6학년 때 결혼한 하상만이라는 5살 위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 12용사로 전사했어요. 아들이 1명 있는데 고교 교사로 재직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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