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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우익 나누는 일 한심한 짓이야박세원 (80세)/ 월곶면 고양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월곶면>

좌. 우익 나누는 일 한심한 짓이야

천식으로 몸이 쇠약해 국민병 면제
인민구호소에서 잠시 몸을 피해 일했다고 빨갱이로 몰려 고문당함
형님, 청년단 활동, 좌ㆍ우익으로 몰리며 고문당하기도   

   
▲ 박세원 (80세)/ 월곶면 고양리
박세원씨는 6.25당시 23세의 청년이었다. 결혼을 해서 고양리 9번지에 살고 있었다. 아주 우중충한 날씨였다고 기억한다.

“비가 오려고 꾸룽꾸룽 하는 줄 알고 노성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포성소리였어. 이쪽에서는 대항도 못해보고 당했어. 당시는 무방비 상태였거든. 아마 임종연일거야. 인민군인줄 몰라도 국방색에 얼룩얼룩한 옷 입고 모자를 쓴 사람을 보았어”

“그래서 피난을 갔어요. 인천 못 미쳐 연일까지 갔다가 도로 왔어요. 이미 인천에서 따꽁따꽁 소리가 났으니 인천까지 벌써 인민군이 들이닥친 거예요.

6월 28일, 29일이라고 생각되는데 아내는 임신 중이어서 더 가지 못하고 돌아왔어요. 피난을 가다가 산하고 산 사이에서 하룻밤을 잤고, 양곡에서도 하룻밤을 잤어요. 그러니까 4-5일 지나 그냥 집으로 돌아 온 거예요”

6.25 당시 박세원씨가 기억하는 동네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그때까지는 참 잘했어요. 바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방공호 파러 나오라고 했지만 마누라가 만삭이어서 의사도 없는 상황이고 봐줬어요. 당시 양곡에는 박성원의원이 개원하고 있었는데 사촌형님이었어요.

해방이후 일본군국주의 의과대학을 다니다 졸업시 숙모가 자궁암이라 일본에서 공부를 중지하고 서울대 연구2년을 졸업하고 강화에서 개원했다가 다시 양곡으로 와서 개원했어요.

당시에 방공호를 파라고 했어도 나는 실질적으로 구경을 하지는 못했어요. 그리고 형님이 개원한 양곡으로 갔고 방공호 파는 일에 동원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1.4후퇴하고 다시 후퇴를 하면서 제2국민병에 나갔어요. 너무 추울 때라 눈도 오고 그 난리 통에 지금까지 산 것도 행복했다고 감사하고 있어요. 천식이 나를 살려준 거예요. 어려서부터 약했거든요. 1.4후퇴 때 양촌면 흥신리에서 수리조합 있는 사이에서 뻥 소리가 나니까 양곡사람들 다 거리로 쏟아져 나와 피난 가느라 바빴어요.

1차 국민병으로 우리 동네에서는 임종원(상이군인 2급)이가 몸뚱이 절래 절래 흔들며 오다 날 붙잡고 하는 말이 박종원(상이군인) 빼고 다 죽었다고 하고 울었어요.

나는 천식 때문에 ‘무종’, ‘병종’하다가 돌아왔어요. 두 명 빼고는 다 죽었어요. 2차 3차 4차 거의 다 죽었어요. 나는 20대때 너무 체수가 작아 튼튼해 보이지 않아 살았어요. 끌려 나갔으면 죽죠. 젊어서 끌려가 죽은 사람 너무 많아요”

9.28 수복때 인민군이 주둔해 있다가 함포사격 소리가 나니까 다 도망가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해가 어스레지면서 김포면사무소에서 총소리가 나니까 자다가 총알이 뛰다가 포소리가 나면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자 다들 논으로 둑으로 도망갔어요. 김포초등학교 아래 골목길이 있는데 그 당시에 우체국에 친구가 한사람 다니고 있었어요.

그 친구가 언제 함포사격이 있다고 가르쳐줘서 나는 알고 있었어요. 그 당시 인민구호소(보건소) 소장을 잘 알아서 소장한테 은신하려고 했고 연락 일을 봐주고 있었어요”

“9.28수복은 좋아하면서도 인민군이 또 올까봐 불안하여 인천으로 빠져나갔어요. 박의사도 같이 인천 갔어요. 우리 어머니에게 당시 “아들 어디 갔냐?”고 인민군들이 물었다는데 그때 안 나갔으면 다 죽었을 거예요. 아마 빨갱이 인민군들 가만두지 않았지요.

우리 형님은 다리가 아파서 산에 숨어있었는데 ‘문원아, 문원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내가 끌려가는 것이 낮다’고 생각하고 집안 대문으로 들어오니 인민군들이 샛문으로 나가더래요.

뒤따라가는데 그들이 뒤를 안돌아 보더래요. 그때 동네에 좌익 할머니가 있었는데 “어디라고 쫓아가느냐”고 말려 살렸어요. 바닥빨갱이들한테 미움을 받았거든요. 형님이 청년단을 해서 그래요“

“우리 형님은 장사였어. 이길 놈이 없었거든. 월곶면의 제일부자에 산 3만평에 돈 잘 쓰고 청년단 간부 활동 했다고 고문당해 발뒤꿈치가 닳아 없어지도록 인민군 내무서에서 고문당했어. 말도 말아요. 그 이후 고향 돌아오니 좌익빨갱이들 많이 잡혀가 죽었더라고요.

그 빨갱이 할머니는 얼마 못살고 돌아갔어요. 빨갱이 할머니아들이 고문을 당해 팔 부러진 것을 널빤지 대고 붙들어 매 고쳐주었어요. 정말 난리들 크게 겪고 신세도 지고 보답도 못하고 그 친구하나 구해주었네요. 모두 얽히고 설 켰던 시절입니다”

9.28수복을 하면서 박세원씨는 임시경찰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강현길이 하고 나하고 임시경찰 들어가 이북구경이나 하자고 하면서 가보니 애무완(M1)총을 보니 정나미가 떨어져 그냥 집으로 갈려고 나오다 붙들렸어요. 9.28 수복때 인민구호소에 며칠 있었다고 빨갱이라고 지목당한 거예요. 인민군 정치시에 인민구호소에 은신했는데 그것이 탈이 났어요”

“48국도에 미국비행기가 뜨고 비행기 사격후 발뒤꿈치 어깨에 총맞고 옆구리로 총알 빠져나간 것 인민구호소의 의사와 치료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모르는 어떤 이가 날 잡아다 숙직실에서 팼어요.

몇 대 맞으니 아픈 줄도 모르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작대기에 꿰어서 일으켜 세워져 걷는데 박점문 형님이 다가와 ‘이놈들아 똑똑히 보고 해라’고 풀어주게 했어요. 박점문 형님 아니면 나 죽었어요.

당시 양곡에 있을 때 박점문 형님네 아내와 내 아내가 의형제를 맺었던 사이라 잘 알고도 남는 사이였어요. 그 형수님이 나를 데려다 사흘 나흘 죽 끓여 먹어주고 박성원의원 형님네서도 한 달 넘겨 앓았어요”

“박점문 형님이 진짜 빨갱이들 고문하는 것을 보여줘서 봤더니 가죽으로 치면 몸뚱이에 척 감기더라고요. 몸댕이로 가슴을 쥐어 찌르는 모습도 봤어요. 그때 경찰서 뒷마당에 방공호에 사람이 바글바글 끓었어. 그 사람들이 어찌 되었을까 짐작이 가지요?”

“경찰은 다 피난가고 임시치안대 시절은 말도 말아요. 박점문 그 양반이 당시 사찰계 계장이었어. 사찰계 계장이면 왕이야. 그 양반 들어와 많이 부드러워졌어. 나도 그 형님 아니면 죽었을 거야. 다시는 이런 것 없어야지,

같은 동족끼리 죽이고 살리고 그때는 좌익 우익 앙숙이지, 돌이켜보면, 좌익 할머니는 참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사상이 다 무어냐고. 어느 날 빨갱이도 되고 노랭이도 되기도 하고 말이야”

“그 좌익 할머니 신세 내가 항상 지고 산다고 생각하고 살아요. 그 당시 좌익 할머니가 형님을 큰 독에 넣고 뚜껑 덮어놓고 보호해줘 살았던 거야. 형님이 인천으로 동생 찾으러 왔는데 거지신세 헌옷에 비쩍 말라 국군에게 간첩 아니냐며 매 맞았으니 기가 막혀 형제가 붙잡고 울었어요.

먹을 것도 없었고 10월 말경쯤 다시 고양리에 돌아오니 잡혀갈 사람 다 잡혀가고 빠져나갈 사람 다 빠져 나갔더라고”

“좌우익으로 나누는 것 다 한심한 이야기야 그때 내 친구가 조덕연이라고 있었어. 월곶초등학교 28회 동창생인데 19세 때 사상이 그래서 마르크스 책을 읽어줬어요.

난 노랭이, 그 아인 빨갱이었지. 그 친구가 서울 남의 집 부엌에서 구덩이 파고 숨어있다 가 결혼때 왔어. 6.25나자 뛰어내려와 민청위원장 했어요. 우리가족 우리 형 살려줬어. 고문은 고문이고 살릴 것은 살려줬어요”

“이 나이 먹고 어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사변이란 게 그렇게 무서운 거야 김포 진짜 빨갱이와 난 진짜 친구였어. 그 친구 배짱 좋고 똑똑했어. 귀전리 사람이야 난 빨갱이 덕도 많이 보고 이 나이 되었어.

우리 동창생 62명중 이제는 5명 만나요. 한명은 잘 안 나와. 4명은 부부동반으로 만나. 조덕연이는 북으로 가서 체신부에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정말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해.”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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