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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과 치안대의 살육이었어신효철 (76 세)/ 월곶면 조강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월곶면>

 

보도연맹과 치안대의 살육이었어

박격포가 무서워 달밤에 모를 심어야 했어요
얼른 수복되어 조강포에서 고기잡고 집짓고 살고파

   
▲ 신효철(76세)/ 월곶면 조강리
“김포군 월곶면 조강리에 조강포가 있었습니다. 조강리는 85호 정도가 살 정도로 컸습니다. 해병대 철책을 쳐 놓은 곳이 원래 조강터이고, 집터 자리가 있던 곳입니다. 조강포에는 나루터가 있어서 상조강 하조강으로 나룻배가 다녔어요. 객산이라고 월곶에서 한강호가 있어서 마포로 다녔어요.

똑똑이가 손님과 물건을 싣고 다녔어요. 선업을 하는 이들이 많았어요. 소형 선업자가 배로 짐을 실어 나르기도 했어요. 선업을 하는 이들이 50여 가구 농사를 짓는 이들이 35가구 있었어요”

“6.25일 아침에 개성 송악산에서 난리가 일어난 거예요. 3.8선에서 일어났잖아요. 총성소리가 요란했어요. 나루터에 배가 많았는데 우리 동네 강가에 나가서 총성 나는 것을 바라보았어요.

개풍군 임한면 상조강에 피난민이 하얗게 쏟아져 나오며 배불러서 피난민 실어 나르기도 했어요. 6.26일 밤새 총소리가 나고 박격포탄이 날아왔어요. 6월 27일 아침이 되니 인민군이 벌써 개풍군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많이 왔어요.

여름이니까 나무로 위장하고 건너와 가지고 동네가 아닌 애기봉으로 올라가 집결했어요. 그런데 국군은 26일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늦게 왔어요. 그래서 저수지를 경계로 인민군과 국군이 대치가 되었어요”

“26일 저녁교전이 굉장했어요. 나는 조강포에서 할머니들과 전투하는 것을 봤어요. 부락민들은 피난을 갔고 나는 동네 할머니들과 있었어요. 나이가 어려서 위험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지요.

국군이 전투력이 딸렸어요. 능골에서 많이 죽었어요. 사라동 뒷산 이예요. 인민군들 있는 곳은 태봉산이었구요. 그래서 27일 새벽에 국군이 후퇴하기 시작했어요. 인민군들은 용강리까지 배치되었었어요. 국군은 계속 후퇴를 하고 인민군의 박격포는 상조강에서 쏘면 대곶면까지 날아가고 수안산까지 갔어요.

엄청나게 포를 쏴댔어요. 국군은 전멸하다시피 했는데 당시에 파주는 파주대로 밀고 들어와서 한강다리 끊기게 되고 서울함락이 금방 되었잖아요”

“그래서 보도연맹 남로당 세상의 정치가 되었잖아요. 우리는 아버지가 왜정시대부터 구장을 봤어요. 해방 후는 이장을 보고 대한민족청년단장을 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월곶면사무소 큰 가마창고에 갇히게 되었지요. 그때는 반장을 본 사람까지 잡아갔어요. 아버지 식사를 하루 세 번씩 보름동안 날랐어요.

제일 반동분자 악질이라고 김포내무서로 7-8명은 끌고 가는데 다 총살감이라고 해서 죽이는 것인데 아버지가 당장 죽어도 끝까지 그런 일 없다고 했고 6.25나자 날뛰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해서 고문 받고 매 맞고 살아서 나왔어요”

“인천 상륙작전하고 해병대 5대대가 들어와 부식같은거 동네에서 해대느라고 힘들었어요. 여인들이 밥을 해주면 동네사람들이 세끼를 지게로 져 나르느라 고통이 많았어요. 3년을 해병대들이랑 산거예요.

해병대들이 낮에는 건너가 진을 치고 다시 개성 남산리까지 갔다가 밤에는 월암까지 도하작전을 했어요. 휴전당시에는 인민군을 당하지 못해 건너왔어요. 인민군이 도치카를 팠는데 해병대가 건너가면 쌕쌕이가 교전할 때 마구 총질을 해댔어요.

해병대가 건너가면 인민군이 후퇴를 하고 총탄이 조강포까지 날아왔어요. 밤에 교전을 하면 동네사람이 맞는 경우도 있었어요. 여기서 건너가면 내려쐈어요. 인민군의 화력이 세면 해병대의 희생이 많았어요”

“우리는 농사를 짓는데 논에서 일을 하면 박격포를 쏴 소도 죽고 사람도 파편을 맞고 그랬어요. 휴전 전이었고 소개를 나갈 때는 휴전 후였습니다. 다시 들어가 살게 될 줄 알았지요. 개곡리 마라니 개곡1리 도라니까지 그리고 조강포까지 소개 명령이 나서 친척집에서 겨울을 났어요. 그 겨울에 85호나 되는 집들이 다 헐리고 막대기 서까래들은 논바닥으로 던져졌어요.

집이 있어야지.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민통선 남방 한계선까지는 들어와 살아라 했어요. 동네 사람들이 움을 파고 거지 생활을 했어요.

정부에서 천막을 주어서 천막촌(하얀 천막)에서 3년을 사니까 다 낡아버리더라구요. 그 이후 미팔군에서 나무를 주어 작은 초가집을 짓고 살았어요. 이장을 봤는데요. 소개 내보내고도 막쐈어요. 해병대한테 가진 거 다 당하고 피난민이나 한가지였어요”

“인민군 정치시에는, 피난 갔다 돌아오니 현물조사 했어요. 1.4후퇴 때는 중공군 밀고 내려왔고 인민군들은 여기 주민들에게 민폐가 없었어요. 끌어다 죽인 거 없어요. 빨갱이 족속들이 끌어다 죽이고 그랬어요.

국군들이 평양까지 올라갔을 때 치안대가 사람 많이 죽였어요. 인민군들은 안 그랬어요. 치안대와 보도연맹끼리 서로 죽인 겁니다. 인민군이 여기 조강포에 왔을 때 17살 먹은 애도 있었어요.

개머리판이 질질 끌리는 애도 봤어요. 오이, 호박 같은 농작물도 하나도 안 건드렸어요. 인민군을 보고 ‘배고프면 따 먹으라’고 해도 ‘김일성 장군이 절대 그러지 말라고 했다’며 건드리지 않았어요”

“여기도 월곶초등학교 뒤에 사태구덩이가 있었어요. 그곳에 치안대들이 빨갱이를 붙잡으면 죽였어요. 갱 고개 넘어 옹정리 정신병원 외고 있는 데의 사태구덩이 있는 데서 죄 죽였어요. 재네(보도연맹)가 죽인 사람도 많지만 치안대가 많이 죽였어요”

“조강포 사람들은 그때 소개 나오면서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살아요. 선업하는 이들이 50가구 있었는데 강이 막히니 인천, 강화로 가서 생활하고 농토 있는 사람과 연백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여기서 살아왔어요. 피난가지 않은 사람은 현재 28집이고 선업한 사람은 다 나갔어요. 민통선 안의 집 소유권은 별로 없이 소작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농사를 지으면 벼로 나라에 상환을 해서 상환 증서를 받은 바, 그 이후의 자신의 땅이 되고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어요. 당시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 때에 박정희대통령이 불하해 줘라 해서 김포시 산림계에서 불하를 받았어요. 농사를 짓는 평수는 6만평 정도입니다”

“6.25당시에 생각이 나는 것은 논에서 일하다 박격포가 날아와 논에 바짝 엎드려야 했던 기억들입니다. 박격포가 무서워서 달밤에 모를 냈는데 아침에 나가보면 형편이 없었어요. 간격도 틀리고요. 왜 박격포를 쏘면 꼭 조강포로 쐈어요.

다른 곳에서는 피해를 덜 봤어요. 바램은 얼른 수복이 되어서 조강포로 들어가서 고기 잡던 사람은 고기 잡고, 집을 짓고 살고 싶어요. 조강포의 생선, 새우도 참새우는 맛있습니다. 숭어, 농어 가을에 장어는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요”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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