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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손들이 살아있어 억울해 해요정해운(71세)/월곶면 용강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월곶면>

 

자손들이 살아있어 억울해 해요

인민군보다 치안대 행악 더 심해
동네일 보다가 죽은 억울한 희생, 그 아들들이 울화병으로 죽어
부역자 가족들을 왜 죽여요. 희생의 비극, 지금이라도 밝혀져야


   
▲ 정해운(71세)/월곶면 용강리
“비가 안와서 말뚝모를 하는데 6월 25일 오후 2시쯤 천둥소리가 나서 25일은 천둥을 하는 줄만 알았는데 그 다음날 26일 새벽에야 전쟁이 난 줄로 알았어요. 민병대가 있어서 강녕포 나루터에 가서 목총을 가지고 경비를 했습니다. 12시가 못되어 인민군이 도강을 하고 넘어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26일 저녁부터 문수산에서 전쟁이 나고 전투가 벌어졌어요. 아군은 11연대 백골부대가 있었고, 27일 새벽 동이 트기 전 까지 전쟁을 했어요. 일명 문수산 작전입니다. 문수산 북쪽에는 인민군이 있고 능선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국방군이 있었고요.

그 전투에서 12시간 이상의 전투가 벌어졌어요. 인민군은 70-80명이상의 사상자가 나고 26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작전이 치열했습니다. 아군과 인민군이 서로 수세였지만 아군이 먼저 철수하기 시작해서 후퇴를 한 것이 27일입니다”

“인민군이 우마차로 해서 강령포로 1개 연대 사단병력에 준하는 병력이 군수물자를 날랐습니다. 이들이 모두 도강을 하면서 아군이 후퇴를 하고 서울을 28일 점령하게 된 겁니다. 진격을 하면서는 별로 사람이 다치지 않았습니다.

인민군이 진격을 해 나갈 때 사잇갓에서 별자리를 만났는데 사단장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이가 ”이승만이 누구냐?”고 물어서 철도 없이 심지를 바꾸지 않고 “이승만은 대통령이고 최고”라고 대답하니 “이승만이 최고가 아니다 인민군이 최고이고 김일성장군이 최고이다. 남한을 해방시키러 왔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인민군은 무섭지 않았어요. 쳐들어왔을 때는 점잖았어요. 1.4후퇴때 무서웠어요”

“바닥빨갱이는 남로당원들이었는데 이미 인민군보다 먼저 문수산에 올라서 월곶민이 문수산에 피난을 가니 마을로 내려가라고 말했어요. 그 당시 바닥빨갱이도 해코지 안했어요.

1.4후퇴 하고 북진해갈 무렵에도 인민군은 소수만 있고 행악이 없었어요. 1.4후퇴때 지역빨갱이는 여기 사람들이라 혈육이고, 친지고, 이웃사람이니까 정명준, 정해진, 윤자빈 등 4명은 이북으로 갔어요. 정가 촌이니까요,

그리고 윤씨들이지 그러니 어쩌지 않았어요. 치안대가 수복되면서 형성되고 부역자 가족이라고 많이 죽였어요. 여기서는 치안대한테 애무하게 많이 죽었어요. 분진중학교 뒷산 골짜기, 한성레미콘 뒤, 골프장 절벽, 성동리 발구릿재 같은 곳이 희생된 곳이었어요. 말구릿재는 지금도 있어요. 밀물에 물이 가득차면 90도 낭떠러지였어요. 부역자 가족들이 많이 죽었어요.

그게 비극이에요. 여기서 남로당 빨갱이 월북했는데 그 가족들이 많이 죽었어요. 만약 과거사가 재정비 된다면 흑백이 가려지고 그 부분도 가려져야 한다고 봐요. 그 당시 부역을 안할 수가 있었나요. 안하면 죽인다니까 했지요”

“그 당시 노인들은 피난을 안 갔어요. 나도 피난을 안 갔는데 동네를 위해 너라도말이야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하면 해야지요. 이박사가 그것을 실수한 거예요. 부역자 가족들을 왜 죽여요. 총부리대고 하라는데 어떻게 안 해. 정규호, 정규철, 조상현, 이충식 이름도 생생해요.

어른들이 동네를 살리자 한 거지. 지금도 안타까워요. 치안대들이 민간인 죽였어요. 그 당시는 인민군은 신사였어요. 후퇴를 할 때는 나쁘기는 했지만 사람은 안 죽였어요. 인민군이 쳐들어 올 때는 이곳으로 왔지만 갈 때는 장단으로 갔어요”

“9.28 함포사격은 문수산까지 왔어요. 인민군 패잔병 숫자는 드물었어요. 전쟁 상황에서도 조용했어요. 치안대가 부역자 가족 처형하고 재산 몰수하고 그랬지 바닥빨갱이는 괴롭힘이 없었어요. 6.25겪었지만 믿는 사람, 형제에게 상처받은 곳이 이곳이고 비극입니다.

여기는 피난 곳이고 폭격은 몇 차례 있었지만 비행기 쌕쌕이가 앞산 박골에 폭격 몇 번하고는 괜찮았어요. 동네사람들 70%는 피난을 갔지만 우리 아버지가 안 가셔서 팔남매의 막내인 나는 아버지가 아니면 죽는 줄 알아서 아버지 곁에 남아 있었어요. 노인 가족들은 피난을 안 갔거든요”

“우리는 강화특공대 때문에 집안이 고통을 당했어요. 아버지가 사촌 형제간인데 죄가 없는데 죽이려 하니 아버지가 당숙을 피난 가도록 시켰어요. 그랬다고 총을 가지고 우리 집에 와서 빨갱이라고 다 죽인다고 우리 집에 총을 14방을 쐈어요.

우리 아버지는 선량한 분으로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되니까 그렇게 하셨다가 고통과 시달림을 많이 받았어요. 1.4후퇴때 빨갱이라고 데리고 가려고 했어요. 새벽녘에 지역빨갱이가 납치하려 했어요”

“나는 6학년 때였지만 고지식해서 김일성노래를 안 불렀어요. 그 사상을 알기 때문에 김일성노래를 안 불렀어요. 강 선생이라고 이북사람이었는데 초등학교에 와서 이미 6.25전에 남로당을 조직한 사람이 있었어요. 우리에게는 일체 이북이야기를 안했어요. 남로당에 가입한 사람에게만 해서 처음에는 잘 몰랐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남로당이었어요”

“여기서는 인민재판 없었어요. 곡식 낱알을 세기는 했어요. 통계를 위해서요. 부락에는 인민위원들이 있어서 말하자면 이장이랄까 이용준 아버지가 인민위원장을 맡았다가 곤욕을 치렀어요. 성동리 오영섭이는 치안대 총책이었고요. 이춘응이라고 용강리 사람인데 어쩔 수 없이 일했는데 치안대가 와서 죽였어요. 오히려 치안대한테만 당했어요.

그 사람은 동네 살려야 하지 않느냐고 밀어서 했어요. 옥석과 시시비비는 가려야 해요. 동네일을 하기위한 억울한 희생이고 정말 억울하지요. 자손들이 살아있어 억울해 합니다. 아들이 울화병으로 죽은 사람이 두 사람이 있어요”

“죽인 장소들은 성동리가서 죽이고, 분진중 뒷골짜기에서 죽이고, 가면 그 뒷날로 죽는 거요. 월곶파출소가 성동리에 있었어요. 오영섭 치안대장이 진두지휘를 했는데 경찰은 안보였어요. 내부적으로는 어땠는지 몰라요. 월곶면사무소 옛날 창고에 수용했는데 거기 간사람 99%가 다 죽었습니다.

부역자를 임시로 수용했다가 분진중학교 뒷산 말구릿재, 동막서 가자면 오른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데 낭떠러지가 있어요. 문수골 다리위에 해병대 초소가 있어. 사격대 들어가는 입구인데 거기서 많이 죽였어요. 밀물때 죽이면 썰물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 인민군보다 치안대 행악이 더 많았어요”

“6.25때는 빨갱이들이 별로 활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평화지대이었어요. 6.25끝날 때도 변화 없었고 인민군 패잔병들은 숨겨달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었지만 식생활이 워낙 어려우니까 뭐 어떻게 하려고 해야 할 수가 없었어요. 용강리는 인민군이 지나간 자리라 피해가 적었어요”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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