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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엊그제 같은데 반세기가 지났어박광원(75세)/ 월곶면 고양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하성면>

 

6.25, 엊그제 같은데 반세기가 지났어

서울 유학중 6.25만남, 제 2국민병 경험
미군에 의한 서너 명 희생
인민위원장 남은 가족 부인 총살 증언 


   
▲ 박광원(75세)/ 월곶면 고양리
봉성리에서 6대 대대로 몇 백 년을 살아오고 있다.
“6.25때는 18살이었고요. 서울에서 중학교 4학년 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는데 7월 4일 김포로 오려하니 한강다리가 없어서 고양으로 해서 나루터에서 배타고 전류리로 왔어요.

옛날에는 봉성리, 전류리 나루터가 있었습니다. 집에 오니 피난을 안가고 계셨어요. 그러다가 12월 19일에 제 2국민병을 나가서 부산까지 가게 되었지요. 13교육대에 있다가 귀향증을 해가지고 2월에 집에 오니 인민군에 의한 피해는 없더라고요”

“당시에 봉성리는 일곱 집이었는데 9.28때 봉성2리에서는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9.28일 때 미 해병대가 인천으로 상륙해서 김포로 와서 지역을 모르고 미군들이 말이 안 통하니까 총으로 서너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봉성리 둑에 다리간이 있어서 그곳에서 죽였어요.

유엔군이 폭격을 해 가지고 죽고, 폭격으로 아랫동네가 전부 없어지고 남은집이 5-6집밖에 없었어요. 사람도 많이 죽었어요. 봉성2리는 집들 새로 지은 것들이고 원주민들은 얼마 안 됩니다. 의용군들은 안 갔고 국민병으로는 사람들이 많이 갔어요. 한 10명 갔는데 함께 모두 돌아왔어요”

“1.4후퇴 때는 상님네, 바로 옆집 집안 네인데 4-5명 데리고 이북으로 갔어요. 남은 아주머니는 감옥에 가뒀다가 석탄리 강 낭떠러지에서 총살당했어요.

한 집만 그랬어요. 막내아들과 큰 며느리는 집안 네와 같이 피난 가서 살았고, 막내아들은 서울에서 살아요. 우리 집은 피해가 없었는데 우리 당숙이 봉성리 인민위원장을 맡아서 가족피해가 없었어요.

서당에 다녔던 분이고, 풍신 좋고 이 동네 구장을 오래 보았었는데 6.25나고서 어떻게 봉성리의 인민위원장을 하게 되었던 거예요 ”

“그때는 한양공고 다니다가 김포농고 청강생으로 공부하다가 다시 한양공고로 복학해서 졸업하고 단국대를 다녔어요. 이곳 봉성리는 피난민들이 6.25 이후에 많이 모여서 살았어요.

연백군 사람들이 많았어요. 고향을 못가고 세상을 뜬 사람들도 많아요. 고향에 빨리 가려고 자리 잡은 사람들이지요. 피난민 집이 20호 되었고 당시에 정부에서 피난민 집 지으라고 재목도 주고 그랬어요.”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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