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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사람이 빨갱이가 뭔지알어조시현(78세)/ 하성면 마곡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하성면>

 

농사짓는 사람이 빨갱이가 뭔지알어

치안대에서 고문해 경찰에 넘기면 징역살았어요
같은 나이또래 100명중 3/2이상 의용군 나가


   
▲ 조시현(78세)/ 하성면 마곡리
조시현씨는 늑막염으로 휴학을 하고 집이 있는 하성에서 쉬고 있다가 6.25를 만났다.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사방에서 포탄 소리가 들렸어요. 조반을 먹고 노역하러 전류리 가서 목욕하는데 사람들이 물결치듯 넘어오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지요. 집에 들어가려니까 난리가 났다고 해서 집에 못 들어가고 피난민 물결을 따라 나와 지경에서 하룻밤을 잤어요.

그런데 월곶에서 포성소리가 들렸어요. 당시에 하성면 신리(마금포리) 월곶면 조강리, 용강리에는 인민군이 도강해서 온 거예요. 지나가는 배를 붙잡아 인민군이 도강하는데 쓴 거예요”

“나는 당시에 고촌가 서 사촌누이 집에서 1박을 더하고도 3-4일을 더 잤어요. 그리고 1주일 만에 하성면의 집 마곡리에 갔는데 부모님한테 혼났지요. 죽은 줄 알았다가 살아 돌아와서 고맙기는 하지만 그냥 나가면 어쩌란 말이냐고 꾸지람 들었어요. 그때 고촌에 있을 때는 굴속에서 살았고요. 인민군을 보았어요. 개화산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새벽에 엄청난 포성이 들렸어요”

“6.27일 28일인가 한강다리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고 집으로 가는 길에 샘재에서 인민군을 만나니 ‘뭐하는 사람이냐?’ 물어요. 그래서 ‘피난민이다’라고 말하니 손바닥을 조사하고 굳은 살 박힌 것을 확인하고 학생이었다며 학생증을 보여주니 놓아주더군요”

“그렇게 전투광경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니 지방 빨갱이들,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날 뛰었어요. 좌익 야산대 조직이 날뛰었다고요. 총메고 아군들이 후퇴할 때 버리고 간 M1총 카빈총 가지고요. 농촌위원장 인민위원장등 숱하게 많은 조직을 해 날뛰었는데 나는 나이 어리고 병들었다는 것을 내세워 피했어요. 늑막염, 결핵선 임파선 염이었거든요”

“그들은 미리 모의회의를 통해 조직해서 회의를 조직했어요. 인민군들이 내려올 때 군수물자 안가지고 총만 주고 먹을 것 안가지고 왔어요. 북의 병력 남으로 다 내려오니 남한 청년들 붙잡아 의용군 나가게 했지요. 당시 같은 나이 대 100명중 3분의 2 이상이 의용군을 나갔어요. 안 가려는 사람은 숨었다고요. 그 사람들은 살았지요.

나간 사람 반수 이상이 폭격이 있으면 숨었는데 다시 총을 빵빵 쏘면 도망온 사람은 살고 도망오지 못한 사람은 행방불명되거나 거제도를 가거나 죽게 한 것이 그 당시 김포읍의 전체 상황이었어요. 나이 먹은 사람들은 농사지으며 살았지요. 관리들은 나와 공정하게 하겠다며 좁쌀 콩 베알갱이를 세었어요. 분배의 원칙에 의해 현물세로 농사의 30%를 현물로 가져간다는 거였지요”

“9.28 인천상륙작전은 음력 8월 보름이 못 되어서 이루어졌는데 우리형님은 강제 노역으로 좋은 나무들을 베어서 진지를 구축했어요. 인천상륙으로 끝장나겠구나 생각한 것은 9월 15일쯤인데 그 이전 7월 초순인가 7월 15일 경 인민군이 적으로 보는 사람들 면장 등을 잡아갔어요.

그때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 조한승 문화원장의 백부는 철사 줄에 묶여 북으로 갔어요. 조한승 문화원장의 아버지는 도망가서 붙잡히지 않았어요. 그때 전국적으로 15만명 잡혀갔어요”

“그 당시에는 반공운동으로는 대한청년단이 지청천장군 계열로 그리고 이범석장군계열로는 민족청년단 중심으로 있었는데 난 반공운동을 했어요. 6.25이전에요. 하성에는 대한청년단 활동들이 있었고 우리 형들이 하는거 보며 자랐는데 다시 고등학교 다니는 이들이라야 1개 부락이면 한두 명 정도였습니다.

청년단 단체는 부락의 세세한 것 알아 나중에 경찰한테 알려줬어요. 치안대에서 고문을 하고 조서를 꾸며 경찰한테 넘겨 경찰에서 훑어보고 넘겨 징역살고 그랬어요”

“9월 10일께쯤 아군 치안대들이 도망간 바닥빨갱이 가족들을 검거해서 마곡리 면사무소 창고에 두고 취조하려 했는데 동성산 중턱에서 따꿍따꿍 소리가 들렸어요. 그런데 9월 12일께 인민군이 역습해서 치안대에서 지레 날뛰었던 사람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갔고요”

“인민군들이 빨갱이 가족들은 모두 풀어주고 바닥빨갱이들이 다시 들어왔지요. 치안대 원로급들은 인천으로 도망가고 아군 해병대 눈에 띠어 한국해병대 탱크 처음만나 뒤따라 수참까지 들어와 하성 태산(동성산)에 대고 탱크 쏘고 진격했어요. 그런데 그 전날 밤 상황은 조종호씨등 우익을 창고에 가뒀어요. 전부 나오라고 하고 인민군이 전선줄로 묶었는데 두 사람은 가마니 속에 숨어 살았다고요.

죽은 척 하고 시체들 옆의 가마니 속으로 파고 들어가 버텨서 살았대요. 비행기 때문에 죽창으로 찔렀는데 100여명 죽였다고 전해 들었어요 조종호씨(조한승 원장 부친)한테요. 죽었는지 사나흘 되니 부패해서 파리가 끓고 쇠사슬에 묶여 시신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찾아서 매장을 했고요.

화가 나서 도망간 바닥빨갱이 가족들을 붙잡아 죽였어요. 치안대들이 고문하고 죽였지요. 난 20대구요 30대에 펄펄뛰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석탄리, 마금포, 신리 강변에 세워놓고 총으로 갈겨 죽였어요”

“좌ㆍ우익 계열 진짜 활동자들 보다 부수적인 가족들만 죽었지요. 하성하고 월곶이 제일 심했습니다. 김포읍도 심했지요. 피하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있었던 겁니다. 좌ㆍ우익에 대한 피해자가 많았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엄청 많았지요. 빨갱이가 뭔지, 농사짓는 사람들이 뭘 알겠어요. 이쪽저쪽 사람들이 국운 때문에 죽었습니다. 내 나이 동갑이 당시에는 100여명 되었는데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10명뿐입니다”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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