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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빼내려고 김일성노래 가르쳤어요홍순면(78)/ 하성면 봉성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하성면>

 

아버지 빼내려고 김일성노래 가르쳤어요


학생으로 의용군으로 징집 개성까지 갔다가
다시 방위군으로 부산에서 훈련받고 7년간 근무
이쪽에서 죽인 겁니다, 우익 청년단이 그랬습니다


   
▲ 홍순면(78)/ 하성면 봉성리
서울에서 유학 중학교 6학년 때 6.25를 만남, 아버지 붙들려가자 김일성 노래, 빨치산 노래 가르치겠다 해서 풀려나옴. 의용군으로 개성까지 갔다가 폭격으로 수라장이 되자 고향으로 도망옴, 방위사관학교 입교해서 7년간 근무

홍순면씨는 당시에 서울로 유학해서 공부하던 중학교 6학년 학생이었다. 흔치 않게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다.

“하성면 시암리 집이 임진강 한강의 교차지점입니다. 중학교 6학년 때 사변이 났어요. 18살, 19살 나이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고3때였는데 29일 날 서울에서 누님 댁에 있다가 내려오는데 한강을 못 건너게 해서 일산 쪽으로 해서 전류리 나루터로 해서 노젓는 배로 건너서 집에 왔습니다. 일주일 있는데 내무서의 지방 빨갱이들이 설쳐서 일주일 만에 밤에 찾아왔어요.

당숙이 들어오더니 밖에서 찾는다고 말해줘서 나가보니 우리 아버지가 우익이라 붙잡으러 온 거예요. 아버지를 붙들어가서 아침 일찍 가보니 면사무소 밑 창고에 있었어요. 보니까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아는 이를 만나니 가만있으라고 말하며 조건을 붙였어요.

”너희 학생들이 선전을 해야겠다. 그러면 아버지가 무사히 나올 수 있다“고 말했어요. 김일성노래와 빨치산 노래와 같은 것을 가르치라고 해서 가르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들어가시고 열흘 만에 붙잡혀 갔던 세 명이다 나왔어요.

8월 13일 서울 가서 공부한 사람들은 다 집합하라고 해서 의용군으로 보냈어요. 그런데 서울에서 개성까지 갔어요. 남산국민한교에 집합해서 개성 들어갔는데 쌕쌕이가 폭격을 하니 수라장이 되면서 집으로 도망 왔어요.

마금포에서 뗏목와서 소리를 치니까 6-7명이 타고 건너와 의용군에서 돌아온 이튿날 월곶으로 도망갔어요. 학생들이 의용군가서 다 돌아오고 연세대 상대 다니던 이는 안 돌아 왔어요. 이북에 여태 살아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9.28수복할 때는 큰 누님하고 셋째 생질녀가 군인이 온다고 일러서 대문간을 보니 인민군들이 보이는 거예요. 공습이 내렸어요. 인민군들이 ‘어디사냐’고 물었어요. ‘하성이다’라고 말하니 ‘누구 아냐’고 해서 ‘안다’고 했더니 장교가 고개를 까닥까닥하며 가라고 해서 숨도 못 쉬고 달려왔어요.

당시는 가라고 하면서 뒤에서 쐈어요. 월곶면 서암리 방공호에 숨어있는데 누님이 나오라 악써서 나와 보니 해병대가 다 나오라고 하며 호에다가 총을 쐈었습니다. 남은 사람이 있는지 쏜 거예요.

‘학생인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느냐’고 해서 벨트에 새겨져 있는 무늬가 학교마크여서 증명이 돼 무사했습니다. 9.28 수복이 되고 서울학교에 복학하려고 하니 그때는 염창동까지 김포관리였는데 무산되고 다시 김포로 왔습니다“

“시암리만 해도 지방빨갱이와 보도연맹이 없고 하라는 대로 했었습니다. 수수알 조알 세는 것을 처음 봤고 평을 떠서 세었습니다. 세 번이나 인민군 혹은 국군 등이 들락날락 했습니다. 하성면에서는 전체적으로는 많이 죽었습니다.

하성에 진짜 빨갱이가 있어서 인민군의 일을 본다고 기웃대다가 아군이 들어와 무지하게 태산 한 골짜기에서 죽였습니다. 이쪽에서 죽인 겁니다. 우익 청년단이 그랬습니다. 원래 바닥빨갱이라는 이들은 처음에 남로당이었던 사람들입니다. 확실히 알지도 못하고 그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식모살이 구두닦이, 남의 집 사는 사람들이 애꿎게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로당 계열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보도연맹에 들었는데 시암리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그 당시 좌익에서는 혹 가다가 죽였어요”

“51년 12월 온양에 있는 방위사관학교에 입교해서 부산에서 훈련받고 예비사단으로 배치가 되어서 1년 반을 근무하고 제대를 했어요. 그리고 또다시 들어갔다가 방위군이 해체되어서 7년간 있다가 하사로 제대를 했습니다. 6.25 그 당시는 시암리는 나누지 않고 통틀어서 불렀습니다.

시암리는 같은 물살이라도 세어서 인민군들이 오기가 나빠서 간첩들이 가도 시암리 쪽이 아니라 전류리로 상륙하고 간첩이 내려가도 김포 쪽에서 수중, 혹은 이북으로 갔습니다. 임진강하고 한강하고 합류지점이 시암리입니다”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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