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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증언, 김포지역 민간인 학살 실태조사김포6.25전쟁비사- Ⅲ. 증언, 김포지역 민간인 학살실태조사 P218쪽

   
▲ 세월이 흘러도 평생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전쟁으로부모를잃고 자식을 잃은 가족들의 시커멓게 멍든 가슴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길이없다(1950년 10월 19일 함흥)(지울수없는이미지/2007.눈빛)
Ⅲ. 증언, 김포지역 민간인 학살 실태조사

<목차>

1.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인식
2. 조사방법
   (1) 증언자 선정과 채록방법
   (2) 김포 민간인 학살관련 자료조사

3. 6.25전쟁 전후 김포 지역적 상황 
   1) 증언으로 본 김포 상황
   2) 인민군의 김포 점령
   3) 9․28수복과 경찰 치안 활동

4. 민간인 학살에 대한 주민증언 및 실태
   1) 김포1,2,3동 지역
          <증언자가 말하는 학살현장>
     ① 여우재 고개 신명아파트 자리
     ② 예비군 훈련장 뒤편 골짜기
     ③ 감정동 성인교회 뒤편 골짜기
     ④ 북변동 충현탑 밑 채석장자리
     ⑤ 감정동 고려공원 골짜기
     ⑥ 걸포동 한강제방 둑 전방 개흙뻘
     ⑦ 북변동 구 김포경찰서 유치장 자리
     ⑧ 북변동 김포초 뒤편 골짜기
     ⑨ 기타지역 ; 고양군 송포면

   2) 양촌면 지역
   3) 하성면 지역
   4) 고촌면 지역
   5) 월곶면 지역
   6) 대곶면 지역

5. 조사(진술)자료에 의한 김포 민간인학살 실태

   1)김포면 여우재 고개ㆍ독자골 사건
     (1) 희생자 연행   (2) 감금   (3) 집단 살해와 암매장

   2) 양촌면(현 통진면 일부 포함) 양곡지서 사건
      (1) 희생자 연행   (2) 감금   (3) 집단살해와 시신 수습

   3) 하성면 태산골짜기 등 사건
      (1) 희생자 연행   (2) 감금 및 고문   (3) 집단살해와 시신 수습

   4) 고촌면 천등고개 사건
      (1) 희생자 연행   (2) 감금   (3) 집단 살해와 암매장 과정  (4) 사건 후 임병석 등 구속 및 재판 경과

   5) 대곶면 소라리 고개 사건
      (1) 희생자 연행 및 감금 (2) 집단 살해 

   6) 사건 조사 결과
      (1)희생자 신원과 희생자 수 (2)희생자 명단 (3)희생자 특성 (4)희생자 수

6. 증언 및 진술로 본 희생자 규모

7. 조사를 마치며

<부록>
■ <6.25사변 피살자명부>와 김포민간인 학살
 1) 김포 피살자 지역별 실태
 2) 김포 피살자 장소별 분포
 3) 김포 피살일자별 분포
 

이 글에서 살펴볼 내용과 방향은 다음과 같다. 증언자의 증언내용중 공통적으로 고백되어진 것은 6.25전쟁 중 김포에서 집단적인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주민 증언자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구술내용을 토대로 구분하면 ‘인민군(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 국군(경찰포합)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좌익과 우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 등으로 구별된다. 

1.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인식

여기서 ‘학살’의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잔인하고 참혹하게 막 죽임’ 또는 참혹하게 마구 무찔러 죽임‘이라 정의되고 있다. 이때의 학살이란 의미는 개인적이거나 소규모의 것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전쟁 중의 학살은 대량학살‘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대량학살을 ’정당한 법적 절차나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 국가권력 및 그와 연관된 권력체가 정치적 이유에 의해 자신과 적대하는 비무장 민간인 집단을 일방적으로 살해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대량학살이 김포지역에서 진행되었고 그 규모가 약2,000명이 살육이 있었음을 전쟁이 끝난지 55년이 지난 지금, 지역적으로  ‘학살’이라는 단어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시에 정규군대와 군대 간에 이루어지는 전투는 ‘작전행위’라고 하여 국가의 ‘정당화된’ 공권력 수행의 과정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성’과 ‘정당성’을 표방한 국가권력이라고 할지라도 사실상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적으로 의심되는’ 민간인을 살해하는 경우에는 이것을 ‘학살’로 분류하고 있다.

결국 학살은 ‘공식적인 전투 이면에서 이루어지는 전투’라고 할 수 있으며, 전쟁으로 인한 살상의 규모나 비극성은 사실상 공식 전투보다 더 심각한 경우가 많으며 6.25전쟁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통상 전시에 일어나는 민간인 학살에는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는 없거나 분명치 않은 것이 특징이다.

정상적인 군대작전이라면 계획 및 시행의 근거가 있고 결과에 대한 기록이 남는다. 그러나 학살은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적 돌발적으로 일어나거나 말단 부대의 즉각적인 조치에 의해 발생되므로 대체적으로 기록이나 증거가 분명치 않거나 은폐되기가 십상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증언은 중요한 자료가 된다. 증언은 당사자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한 내용이 고백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며 진실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증언은 역사적 자료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민간인 학살에 대한 개념이나 정의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남북한의 6.25전쟁 중에 김포지역에서도 수많은 민간인 학살사건이 존재했었으며, 그 학살의 규모와 실태를 모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6.25전쟁 중의 김포의 민간인 학살의 문제를 공식화한 일이 없다.1)

조사자는 이번 김포지역의 주민증언을 통해 고백되어진 민간인 학살의 문제를 보다 실증적으로 구체화 하기위해 문서상의 자료실체 여부를 조사해 왔다. 다행히 6.25전쟁 와중에 정부가 나서 조사한 자료를 찾아냈고 김포지역 민간인 피살자 명단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44명의 학살에 관한 증언 내용과 정부문서 등을 통해 김포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의 실태를 살펴볼 것이다.
또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김포 부역혐의의생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등을 참조하여 정리할 것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연구나 이론전개를 주장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실태보고서 형식이 될 것임을 밝혀둔다. 이 작은 보고서가 김포지역에서 발생한 전쟁 중 민간인 학살의 진실규명을 밝혀내는데 그 첫걸음이 되기를 기원한다. 

각주) 1)2004년 6월 25일, 지역언론 <미래신문>이 인물 인터뷰를 통해서 6.25전쟁 중 김포에도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도한바 있으며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김포부역혐의희생사건 조사를 2006년 11월부터 시작했다.
 

2. 조사방법

(1) 증언자 선정과 채록방법

‘김포지역 6.25전쟁비사’ 조사 집필을 위해 42명의 인물 인터뷰를 진행했다. 증언자 구성은 6.25전쟁 당시의 경험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연령 70세 전후를 기준으로 했다.

우선 증언자 선정을 위해 각 동ㆍ면사무소로부터 70세 전후 김포지역에서 6.25전쟁 경험한 계층을 추천받았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김포문화원에서 추천한 인물과 조사자가 지역 노인정 혹은 주변 인물들에게 추천을 받은 50여명을 확정했다.

그러나 추천을 받은 대부분의 인물들이 조사의 목적과 취지에 맞지 않는 추천자가 많았다. 가령 조사의 목적과 범위는 김포지역에서 6.25전쟁을 겪었거나 보고, 들은 내용을 증언형식을 통해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추천자중 김포지역 이외의 곳에서 전투에 참가한 인물들을 추천한 것이다. 즉 당시에 김포에 없었던 인물을 추천한 것이다.

그렇지만 증언자를 직접 만났을 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다, 앞의 본문 증언된 글의 일부가 6.25전쟁을 통해 겪은 개인적 경험이 주요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증언자 선정을 다시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관계로 추천된 증언자 일부를 제외하고 인터뷰 방식을 바꾸었다. 즉 한사람의 증언을 마치면 그 증언자가 다른 증언자를 추천하는 방식(릴레이)으로 증언 인터뷰를 진행해 갔다. 증언자의 주변인물을 소개받은 것이다.

그러나 추천해준 분들을 인터뷰 하기위해 직접 만나거나 연락을 했을 경우 인터뷰를 거절한 분들이 많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때의 기억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것과 ‘왜 그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느냐“’이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의 죽이고, 죽었던 당사자들과 그 후손들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점이었다. 즉 ‘매우 곤란한 상황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조사자가 여러 방면으로 설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완강했다.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제한된 시간 안에 당초 목표로 세웠던 증언자 50명 인터뷰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추천된 인물의 인터뷰 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증언자의 연령이 높은 관계로 서면에 의한 방식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증언내용을 비디오로 녹화하면서 인터뷰 방식으로 진행했다. 여기서 인터뷰 방식은 질문과 메모(기록)를 동시에 진행함을 말한다.

전체 시간은 짧게는 1시간, 상황에 따라 30분 정도 추가했다. 인터뷰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다음의 질문요지 15문항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일률적으로 적용한 것은 아니다.

증언이 진행되는 도중에 연세가 높은 관계로 앞부분에서 증언했던 내용을 반복하는 등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준비된 질문을 통해 인터뷰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이 질문 1개 항목도 전달하지 않고도 증언을 해주신 분들이 많았다. 

<증언 인터뷰를 위한 질문항목>

6.25 전쟁 중 김포에서 겪으신 일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① 6.25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② 선생님이 살고 계시던 동네는 언제 군인들이 들어왔나요(국군, 인민군)
  ③ 동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나요?
  ④ 동네에서 선생님은 어떤 일을 경험하셨나요?
  ⑤ 혹 본인이 직접 겪지 않았지만 들은 이야기는 없었나요?
  ⑥ 피난을 가신 적이 있나요 가셨다면 언제 어디로 가셨나요?
  ⑦ 인민군들이 마을에서 어떤 행동들을 취했나요?
  ⑧ 국군 혹은 연합군이 마을에서 어떤 행동을 취했나요?
  ⑨ 가족 중에 인민군 혹은 국군들에게 겪은 일은 없었나요?
  ⑩ 혹 지역에서 치안대나 청년단 활동에 대해서 알고계신가요?
  ⑪ 부역자 활동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나요?
  ⑫ 인민군 혹은 국군이 주민을 학살한 일은 없었나요?
  ⑬ 인민군이 후퇴 중에 마을에 어려운 일을 취한 사실은 있나요?
  ⑭ 개인적으로 전쟁 중 특별한 경험을 하신 일이 있는가요?
  ⑮ 본인 혹은 가족중 의용군이나 국민방위군으로 나간일 있나요?

 증언인터뷰를 마친 후 구술된 내용을 1차 정리하고, 2차적으로 내용 중 일부 지역명칭, 혹은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내용에 대해 다시한번 직접 만나거나 전화상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일부 증언자가 밝힌 학살 장소에 대한 현장 확인을 답사하기도 했다.  

조사 시기는 2006년 3월부터 2008년 9월 30일까지 자료조사 및 증언자 인터뷰를 진행했다.

(2) 김포 민간인 학살관련 자료조사

김포 민간인 학살에 대한 공식적인 자료는 1952년 3월 31일 현재, 공보처통계국이 조사 작성한 자료를 통해서다. 이 문서의 공식명칭은 <6.25사변 피살자명부>2)로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피살자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한계가 있지만 그러나 정부의 공식문서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으며 그나마 비전투인인 민간인 학살 자료라는 점이다.

이 자료는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주민학살을 중심으로 조사된 자료이다
세 번째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김포 부역혐의희생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등을 참조했다.3) 이 조사 자료는 2006년 11월 1일부터 2008년 9월 24일까지 희생자 유가족 및 참고인 40명을 조사한 자료이다.

따라서 이 실태보고서는 44명의 증언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자료상의 조사서를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6.25사변 피살자 명부>에 나타난 내용은 별도로 분석하였다.

각주)
2)이 명부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이 자료집 후반부에 설명했다.
3)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김포부역혐의희생사건 조사결과보고서> 내용을 옮길 수 있도록 허락받아 게재하였다

3. 6.25전쟁 전후 김포 지역적 상황

김포지역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해를 위해 6.25전쟁 전후의 지역적 상황을 자료와 증언내용을 토대로 살펴본다. 증언자 대부분이 경찰과 우익치안대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증언에 따라 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 증언으로 본 김포 상황

6.25전쟁 전 김포는 당시 김포경찰서 형사로 근무했던 박점문씨의 증언에 의하면 전쟁 전 김포지역에서도 보도연맹4)이 결성되어 있었으며 또한 1948년도에 일명 ‘야산대’5)라고 하는 빨치산 부대가 존재했었다고 한다.

야산대는 검단면 원당리, 고촌 신곡리, 대곶면 가현리에 각각 1개 소대가 있었으며 총 2개 대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전국에서 최초로 야산대의 실체를 파악하고 검거했으며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검거가 이루어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증언자 박점문씨에 따르면 “보도연맹은 치안본부가 좌익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이용할 목적으로 만든 조직체였는데, 김포경찰서6)는 이를 통해 당시 경찰이 파악하기 어려웠던 중심인물을 파악하여 치안본부에 보고를 하였다”고 한다.7)

좌익 인사들 중에 검거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경찰에 관계없이 활동하게 했으며 활동비도 지급하고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니까 당시 좌익인사들이 많이 가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6.25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 점령시 하부활동과 부역을 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 경찰의 하부조직으로 활동했던 치안대는 청년단 단원들이 활동했다고 말한다. 김포는 민족청년단8)과 대한청년단9)이 조직되어 있었고 대한청년단 단장은 이장회, 민족청년단 단장은 홍선동, 부단장은 황의식씨었다고 한다. 대동청년단10) 단장은 윤원표였다.11)

고촌면 임병석은 대한청년단 고촌면단부 부단장, 임범일은 신곡리 영사정동단부 단장, 이한선은 향산리 하향산동단부 총무, 윤흥섭은 고촌면단부 감찰부차장으로 활동하였다. 12)양촌면에서도 청년들을 중심으로 대한청년단에서 주관하던 군사훈련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13)

증언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김포군 전역에서 청년단이 결성되어 활동하였고 청년단원이 치안대로 활동했다.

증언자 김경모씨에 의하면 황의식씨가 호국군을 창설했으며 9개면에 4개 소대가 있었으며 김포면에는 30명이었다고 증언한다. 

김포지역 호국군14)은 최초로 1946년 인천 신흥국민학교에 1개 소대를 파견, 1개월간 각종 교육훈련을 실시하여 즉각 투입이 가능하도록 훈련되었다. 김포 호국군 1개 소대 30여명은 1개월간의 훈련을 마치고 김포로 복귀, 생업에 종사했다.

당시 김포 호국군 중대는 4개 소대로 편성되어 황의식 중대장을 중심으로 1소대장 김재경, 2소대장 박원재, 3소대장 이승기, 4소대장 풍무리 ○○씨(증언자의 기억 불확실)가 선두가 되어 평시 생업에 종사하며 주기적으로 훈련에 임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대한청년단등 당시 각 청년단체들과의 마찰 등으로 중앙 시책에 따라 국민방위군이라는 통합 단체가 발족되었다.고 한다.15)

증언자 김경모씨에 의하면 김포면에는 1950년 9월경 호국군 출신 및 청년단원들로 구성된 지역자치대 성격의 지하특공대인 ‘향토방위특공대’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은 박원재(朴元載)씨가 주도하였는데 박원재씨는 육군 사관학교 8기생으로 1950년 대위로 임관 해 부대배치를 기다리며 휴가를 나와 있던 중 6·25가 발발, 곧바로 원대 복귀하려다 인민군 포로로 잡혀 김포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었으나 함께 갇혀있던 다른 청년단원들과 반성문과 정보제공을 하겠다는 조건으로 풀려나와 지하조직을 결성했다고 한다.

이 조직은 준군사적인 조직으로서 인민군과 국군이 남겨놓은 총을 지역별로 회수해서 사용했으며 김포경찰서 내 무기고에서도 몰래 빼온 총도 있었다고 한다.

증언자 유연종씨에 의하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어 국군과 연합군이 9월 21일에 김포에 들어왔으며, 이때 치안대를 자체적으로 결성했는데 걸포리 출신들이었으며 김포면에는 치안대가 걸포리에만 있었다고 한다. 치안대는 걸포리, 감정리, 북변리, 운양리 치안을 담당했다고 증언했다.
 
증언자 유선종씨는 9월 21일부터 25일까지 인민군과 국군 그리고 특공대간의 전투가 김포읍내에서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있었고 마침내 9월 25일 국군에 의해 김포읍을 재 수복시켰다고 한다.

이후 9월 25일을 ‘김포의 날’로 정해 10년간 김포수복 기념행사를 치러왔다고 한다.
 이때부터(9월 25일부터) 인민군의 김포읍 점령기간(1950년 6월 28일부터 9월 24일까지) 동안 인민군의 하부조직으로 혹은 부역한 주민들을 색출하는 일 시작되었다고 한다.

국군 수복 직후 바로 치안대가 각 면별로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했으며 경찰과 치안대원들이 본격적인 좌익인사들과 그 가족 및 부역자들을 총살하기 시작했다.

각주)
4)보도연맹 ; 1949년 좌익전향자들로 구성된 조직.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었다. 이 단체는 국가보안법의 구체적인 운용책의 하나로 국가보안법에 저촉된 자 또는 전향자로 분류된 인사들을 이 단체에 빠짐없이 가입하도록 규정해 놓았으며, 그들에 대한 회유와 통제를 쉽게 하도록 했다. 1949년 말까지 이 단체의 가입자 수는 약 30만 명에 달했으며, 서울에 1만 9,800명이었다. 1949~50년 이들은 당시 좌익세력을 와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자 일부 위장전향자들과 북한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뿌리 뽑는다는 정부방침에 의해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이 실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때의 실상은 공개된 것이 없다.
5)야산대는 말 그대로 ‘밤에 산에서 활동하는 자’이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남로당이 모든 정치활동이 불법으로 탄압을 받게 되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채택하게 되는데 지방에서는 무장부대로서 야산대가 조직되었다. 주로 당원가운데서 군사경혐이 있거나 10월 인민항쟁때 지하에 들어가 활동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다. 대개 한 개 군의 50-100명 정도 이었다. 야산대는 38소총, 장도, 칼 또는 군경으로부터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였다.
6)김포경찰서 연혁에 따르면, 김포경찰서는 1914년 김포면 북변리 350번지에 설치되어 사건 발생 시기 같은 주소에 있었다. 현 김포경찰서는 1988년 김포군청이 있었던 북변리 361-2번지로 청사를 이전하였다.
  

7)「참고인 박점문 진술녹취록」(2008. 6. 11), 8쪽. 당시 김포군 보도연맹 책임자는 검단면 오류리 사람인 이종빈이었다고 한다.
8)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약칭 족청)은 이범석을 중심으로 1946년 10월 9일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창설한 반공주의적 우익 민족 청년 운동 단체이다. 이범석은 청년들을 광복된 새 나라의 역군으로 조직화하고 훈련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라 판단하고,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족청’을 창설했다. 미군정도 청년단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1946년 중반 비밀리에 약 500만 달러와 미군 장비를 지원하고 훈련 고문이로 미군 대령 한사람 등을 특파하여 족청 결성을 지원하였다.
9)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1949년 12월 19일 이승만(李承晩)이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전국에 산재해 있던 각 청년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해 결성한 단체. 이승만이 직접 총재직을 맡았고 장택상(張澤相)·지청천(池靑天)·전진한(錢鎭漢)·유진산(柳珍山)·신성모(申性模)·노태준(盧泰俊) 등이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대한청년단은 광범위한 조직망을 이용해 200만 단원을 확보하는 전국적 조직체계를 갖춘 유일무이한 청년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청년단체로서의 독자적인 역할은 상실한 채 주로 이승만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1950년 1월 내부분열로 최고위원회가 폐지되고 단장제로 바뀌어 신성모가 초대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청년단을 법적 근거도 없는 청년방위대라는 반(半)군사조직으로 만들어 향토방위에 투입시켰다. 그리고 1·4후퇴 시에는 국민방위군(제2국민병) 설치령에 따라 이 조직을 국민방위군으로 재편해 국민방위군을 조직·이동·훈련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1953년 9월 10일 이승만의 명령으로 대한청년단의 해산이 선포되었다. 이로써 해방 후 8년 동안 지속되어오던 남한에서의 우익청년단체의 활동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10)대동청년단은 1947년 9월에 지청천을 중심으로 창설되었던 반공주의 우익 청년단체이다. 1947년 4월 광복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이 귀국해, 청년단체의 대동단결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우익계열의 32개 단체를 통합, 결성하였다.
11)金浦文化(제11호) 김포문화원. (2000년 1월), 56쪽.  
12)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단기4284년 형제351호」(1952. 6. 28)
]3)「신청인 김동묵 진술조서」(2007. 5. 31), 6쪽.
14)대한민국 호국군은 1948년 11월 20일에 창군된 대한민국의 국군의 예비군 부대이다. 정규군 창설이후에도 1949년이 되기 전까지는 지원병제를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비병력 확보의 차원에서 조직되었다. 이는 국군조직법(법률 제9호) 제 12조에 근거 육군총사령부(육군본부의 전신) 예하 호국군무실(초대 실장 신응균 소장)을 기원으로 한다. 세부규정은 1949년 1월 20일 공포한 호국군 병역에 관한 임시조치령(대통령령 제52호)으로 정해져 확장을 꾀했으나, 1949년 8월 31일부로 해체에 들어갔다. 그 후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 정규군과 완전히 통합되었다. 하지만, 이후 징병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까지 호국군을 대신하여 민병 조직으로서 청년방위대를 창설했다. 기본적으로 육군 정규군을 보조하는 역할로서, 전투부대와 특수부대로 나뉘었고, 필요에 따라서 정규군(현역)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장병들은 예비역 신분으로 본인 거주지에 주둔하는 연대에 소속되어 생업에 종사하며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15)金浦文化(제11호) 김포문화원. (2000년 1월), 57쪽.   
 

2) 인민군의 김포 점령16)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자 김포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은 경찰서장(당시 이무영 경감)의 지휘아래 오전 11시경 김포경찰서 본서로 집결하였다.

그 후 트럭을 타고 서울 시내를 지나 문산 경찰서 관내 성동(개풍 건너편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으로 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임)에 배치되었다. 이들이 주로 한 일은 피난민 통제였다고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군에게 포위당하자 다시 김포경찰서를 거쳐 후퇴하였다고 한다.17)

김포군의 주민들은 대부분 가까운 곳으로 피난하였다가 되돌아 왔으며, 당시 인민군 점령기 동안 피난을 나간 주민들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인민군이 김포를 점령하자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김포군 인민위원장은 어수갑, 김동춘 또는 김문흠, 고촌면 신곡리 인민위원장은 이경창, 김포면 운양리 인민위원장은 심성기, 감정리 인민위원장은 김부걸, 양동면 마곡리 인민위원장은 이의철, 하성면 인민위원장은 어수갑(魚秀甲) 또는 강○○, 하성면 마곡리 인민위원장은 여이헌이었다고 한다.18)

판결문에 따르면, 임병석은 고촌면 조국보위위원회 서기장, 임범일은 조국보위위원회 위원, 이한선은 면 자위대장, 윤흥섭은 면 자위대 부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19), 신분장 자료에 따르면 양촌면 수참리 인민위원장은 한상익(韓相翊)이었음이 확인된다.20) 인민군 점령 당시 김포군의 주민들은 의용군에 많이 끌려가기도 했으나 도망하여 다시 국군으로 입대한 일도 많았다고 한다.21)

각주)
16)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김포부역혐의희생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8
17)「참고인 유학현 진술녹취록」(2008. 8. 28), 3쪽. 당시 검단지서에 근무하고 있던 유학현은 전쟁이 났는지 몰랐으며, 무슨 이유로 집결하는지, 어디로 이동하는 지도 몰랐다고 하였다.
18)박점문, 어후경, 장상래, 송요수, 심순옥, 정○○, 이의연, 이재구 진술
19)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단기4284년 형제351호」(1952. 6. 28)
20)「신청인 김동묵 진술조서」(2007. 5. 31), 7쪽;「참고인 김정숙 진술조서」(2007. 5. 31), 5쪽. 한상익이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사실은 치안본부 「신원기록편람(1984년)」에서도 확인된다.
21)「신청인 김동묵 진술조서」(2007. 5. 31), 6~8쪽. 마곡리의 젊은이들은 모두 의용군으로 끌려갔으나 대한청년단이었던 김창길(당시 28세)과 김흥길(당시 31세)은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았다.

3) 9․28수복과 경찰 치안 활동22)

김포경찰서를 비롯한 비상경찰총사령부(치안국)는 경인지구의 치안확보를 위하여 경찰 선발대를 편성한 후 1950년 9월 25일 대구를 출발, 부산을 경유하여 10월 1일 인천에 상륙하였다.23) 상륙 직후 이들은 인천내 모 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경기도 경찰국장(한경록)으로부터 “부역혐의자들을 A, B, C로 나누어 모두 죽이라”하는 지침을 받았다고 한다.24) 박점문씨에 의하면 당시 김포경찰들이 인민군이 진격해 왔을 때 모두 후퇴했지만 5명이 후퇴를 하지 않은 경찰이 있었으며 수복후 김포에 들어오니 좌익이 되어 있어 구속시켰었다고 한다.
김경문씨에 의하면 김포가 수복된 후 후퇴했던 경찰이 들어왔는데 좌익들과 부역했던 사람들을 검거하기 시작해 총살시키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촌면에서는 9․28수복이 되자 고촌지서 김용창(金容昌) 순경25) 등이 선발대로 도착했으며, 고촌의 유지인 임병석, 임범일 등의 협조를 받으며 부역혐의자들을 색출하였다.26)

김포면 감정리에서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이에 저항하며 후퇴하던 인민군이 마을 반장이 정해 준 집에서 쉬고 간 일이 있는데, 국군 수복 후 이에 대해 조사한다면서 각 집안을 뒤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27)

그 후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참전에 의해 한국전쟁의 전세가 반전되었으며 12월 12일 전선은 다시 38선 이남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12월 23일 시민의 피난을 공식 명령하고, 12월 24일 서울시민 소개령을 발표하였다.28)

1950년 12월 15일경 경기도경찰국이 양주경찰서장(경감 가창현)에게 경찰관 가족 등 우익인사들에 대한 후퇴 지시를 내리자 양주경찰서장은 12월 19일경 이를 다시 각 지서에 전달하였으며29), 강화경찰서장(경감 김병구)은 같은 해 12월 20일까지 각 경찰관과 우익인사의 철수를 지시했다고 한다30).

이로 보아 경기도경찰국은 경기도내 각 경찰서에게도 같은 내용의 지시를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각 경찰서는 이를 계기로 인민군에게 협조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민들을 다시 연행함과 동시에 그때까지 구금상태에 있었던 주민들을 살해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31).

자료에 의하면 따르면, 김포 하성면에서도 이 시기 희생 사실이 확인되며, “피난을 못해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에게는 1․4후퇴 당시 도민증을 발급해 주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멀리 피난을 갈 수 없었다”고 한다.32)

각주)
22)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김포부역혐의희생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8
23)『한국경찰사 2』, 내무부치안국, 1973. 292~293쪽. 이때 선발된 인원은 치안국 116명, 서울시 경찰국 809명, 경기도경찰국 1,054명 등 모두 2,049명이었다고 한다. 참고인 유학현에 따르면, 당시 신흥환이라는 일본배를 타는데, 여수 순천에 인민군이 있으므로 제주도를 돌아서 인천으로 상륙했다고 한다.
24)「참고인 함국주 진술녹취록」(2008. 6, 20), 14쪽. 참고인 함국주는 가평경찰서 소속 경찰관으로 “인천상륙작전 직후 선발대로 인천을 통해 복귀하면서 경기도 경찰국장으로부터 부역자 처리 지침에 대한 연설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25)김포경찰서, 「직원명부 월례보고에 관한 건」, 1950, 1951. 김용창은 전쟁 전 김포경찰서 사찰계에서 근무했다.
26)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단기4284년 형제351호」(1952. 6. 28)
27) 「참고인 신성철 진술녹취록」(2008. 4. 11), 3쪽.
28) 양영조, 『한국전쟁과 동북아 국가정책』, 선인, 2007, 211~223쪽. 서울의 경우 1951년 1월 3일까지 114만 명이 철수하였다고 한다.
29)양주경찰서장 가창현 청취서」, 28~29쪽. 이 문서를 통해 경기도 경찰국은 양주경찰서장에게 “관공서 직원, 우익 단체원, 경찰관 가족을 한강 이남으로 피난시키며 특히 중요물자 및 청장년을 계획적으로 수송하라”고 통첩을 보냈음이 확인된다.
30)「강화(강화도․석모도․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8 상반기 조사보고서 2』, 진실화해위원회, 2008, 673쪽.
31)진실화해위원회는 1950년 12월 19일 남양주 진건면에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229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끌려가 희생당한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진실화해위원회에는 경기도 포천지역과 용인지역에서도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으므로 진실규명을 해 달라는 신청사건이 있다. 신청인 김순배(9217호 사건)는 “1․4후퇴 당시 포천군 소홀면 치안대가 피난을 시켜준다며 가족들을 모두 끌고 가 총살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신청인 원용철(21호 사건)도 같은 시기 “용인군 원삼면 치안대가 ‘남겨두면 보복한다’며 좌항리 노인 5명을 사암리 안골 광산에서 총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32)「신청인 김동묵 진술조서」(2007. 5. 31), 2쪽;「참고인 김정숙 진술조서」(2007. 5. 31), 6쪽. 

4. 민간인 학살에 대한 주민증언 및 실태

44여명의 증언자 대부분이 김포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이 대규모적으로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으나 일부 증언자를 제외한 다른 증언자들의 증언내용은 주로 전해 들은 내용이 많았다. 따라서 직접 민간인 학살에 참여한 당사자와 상황을 본 증언자의 증언 내용과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 진술한 내용을 보충하여 정리하였다.

민간인 학살 상황에 내용은 두 가지 방향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먼저 증언자 44명의 증언내용 속에서 밝혀진 민간인 학살상황을 소개할 것이며 두 번째는 조사 자료를 통해 진술한 희생자 유가족 및 참고인들의 진술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증언자에 의한 민간인 학살 실태를 지역별로 소개한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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