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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포1,2,3동 지역김포6.25전쟁비사- Ⅲ. 증언, 김포지역 민간인 학살실태조사 P218쪽

1) 김포1,2,3동 지역

김포1, 2, 3동 지역의 증언자는 북변동 4명, 감정동 2명, 걸포동 2명, 사우동 1명, 풍무동 3명, 총12명이다.

증언자 구정회씨는 당시에 중학교 1학년 14살이었으며 외삼촌 정준현씨가 인민군 시절에 반장 일을 시키니까 반장일 4-5일 했는데 인민군이 후퇴하자 치안대에 의해 경찰서에 잡혀가 국군 쪽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또한 이 일로 외할머니도 끌려가 여우재 고개에서 죽였고, 치안대가 장롱부터 숟가락까지 다 가져갔다고 한다.

그 일로 외숙모(조씨)는 항의하다 구속돼 어린 막내를 업고 서대문 형무소에 9년이나 복역한 후(복역 중 어린애기 감옥에서 사망) 5-6년도 못살고 죽었다고 한다.

증언자 두병환씨에 의하면 김포에서는 8월 10일경부터 9월 초순까지 좌익에 의한 우익 가족학살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학살을 할 때 끌고 가는 사람이 많은 때는 20명쯤이었고, 이틀 건너 사흘 건너 15명 정도씩 끌고 가는 거를 마당에서 구경했다고 한다.

장릉산에서 5-6미터의 계곡(고려공원 골짜기)깊이 낭떠러지에서 죽였으며 끌려가는 사람들 중에 애기업고 가는 여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낭떠러지 앞에 일렬로 세워놓고 따발총으로 쏘면 자동적으로 골창으로 떨어져 들어갔으며 삽을 가지러 완장을 찬 사람이 와서 삽을 빌려다가 얇게 덮었다고 한다.

8월 20일 넘어서 인천에서 함대사격을 김포에도 밤낮 10일 이상 사격을 했는데 8월 말에 함포사격을 할 무렵에 더 많이 죽였다고 한다. 예비군 훈련장 앞 엉구렁텅이에서 죽였다고 한다.

서울이 수복되고는 그 반대가 되었으며 9월 이후에는 빨갱이 가족들이 희생물이 되었다고 한다. 여우재 고개에서 많이 죽었고, 독자골(고려공원)에서도 처형사건이 몇 번정도 있었다고 한다. 형님이 치안대 예비경찰로 지원해서 들어가 2개월 정도 근무했는데 좌익을 희생시켰다고 한다.

증언자 유선종씨에 의하면 9.28수복 당시 좌익들을 충현탑 밑에 채석장에서 총살시켰으며, 치안대들이 여럿이 가서 열 명씩, 열 명씩 전화 줄로 묶어서 놓고 쏘았다고 한다. 일부 치안대는 빨갱이들을 패서 죽였다고 한다.

증언자 유연종씨에 의하면 치안대 하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힌 7명이 구 경찰서에서 삼각창(총 끝에 꽂혀있는 칼)에 찔려 죽었는데 수복된 후 치안대가 보복을 했었다고 한다.

증언자 박점문씨에 의하면 김포경찰서 소속경찰 중 후퇴하지 않은 다섯 명이 있었는데 복귀해보니 좌익이 되어 있어 구속시킨 일이 있으며, 여우재 고개 오른쪽 땅이 사태가 나서 파진 곳에서는 우익, 좌익 수백 명이 묻혀 있었다고 한다.

증언자 송영환씨에 의하면 잔존 부역 가족들이 많이 희생되었으며 ‘여우재 고개 구렁텅이’와 ‘신방축(한강제방 뻘)’, ‘감정동 독자골, 고려공원 안쪽의 엉구렁텅이’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증언자 윤종호씨에 의하면 상이용사탑(충현탑) 아래(채석장) 강훈석씨가 처음에 집 지을 때 사람의 뼈가 나와서 삼태기로 담아내 공동묘지 위에 묻어주었다고 하며 김포초등학교 뒷산에서도 학교 지을 때 뼈가 나와서 어린 학생들이 보았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는 40년 전만 해도 비가 오면 흙이 패어지면서 뼈다귀가 나와 반짝거렸고 그것이 무서워서 직원을 데려다 주기도 했다고 한다.

증언자 김경모씨에 의하면 9.28수복때 경찰서에 좌익빨갱이 40명을 잡아넣었는데 인민군이 별안간 왔다는 바람에 다 놓쳐버린 적도 있었으나 밤으로 집집마다 다 뒤져서 5,60명 다 잡아서 경찰이 가두어놓고 20-30명씩 데려가서 죽였다고 한다. 이 때 70명을 큰 굴창이에다 잡아넣고 죽였으며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인민군이 구 경찰서 담 밑에서 7-8명의 걸포리 사람을 대창으로 죽이니까 약이 올라 10월 6,7일경에 경찰이 70명의 패잔병들을 죽였다고 한다. 사우리 안동네 사람 5-6명 바닥빨갱이를 죽였는데 본인이 직접 사살했다고 한다.

고려공원 세 곳 골창(골짜기)에서 밤 12시가 넘으면 끌고 와서 죽였는데 첫 골창에서는 10명, 두 번째 골창은 17명, 세 번째 골창에서는 30명을 죽였다고 한다.

여우재 고개도 3곳이 있었는데 첫 번째 곳에서는 20명, 두 번째에서는 10명, 세 번째 더 큰 골짜기에는 70명 모두해서 110명을 죽였다고 한다.
여우재 고재는 경찰이 들어와 10월 초에 총살이 이루어졌고 지금의 신명 아파트 뒤쪽 20미터 더 간 지점이었다고 한다.

예비군 훈련장 뒤 이곳은 두 군데에서 옹주물, 사우리 사람들 6-7명을 죽였다고 한다. 감정동 성인교회 뒤쪽 산골짜기에서 20명을 총살했다고 한다.

북변동 충현탑 밑 채석장 자리 이곳에서는 정확한 명수로 31명을 죽였는데 바닥 빨갱이 가족, 위원장을 한 남편, 욕을 심하게 한 여자, 부위원장을 한 아들 등 일가와 조리미 사람도 있었다고 하며 여성은 7명(여선생 2명, 여성인민 위원장과 욕한 여자, 그리고 술집 영업자 2명) 여자는 7명, 남자는 24명이었고 밥도 주는 것이 아까운 진짜 빨갱이라서 낮에도 4-5명씩 데려다 죽였다고 한다.

증언자 이재근씨에 의하면 풍무동에서는 인민군이 밀려가고 정식 경찰이 들어오기전 치안대가 빨갱이라고 동네 처녀들을 강간하고 끌어다 여우재 고개, 향교자락(김포초 뒤편) 있는데서 철사로 묶어 쏴 죽였는데 40명이 된다고 한다.
또한 죽은 남편의 부인들을 빨갱이 여자들이라고 머리 빡빡 깎이고, 재산을 몰수해 갔다고 한다. 

이상 증언자 12명에 의한 김포1, 2, 3동 지역의 민간인 학살은 치안대에 의한 학살과 좌익의 우익주민학살 실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김포1.2.3동 민간인 학살 실태

■ 증언자가 말하는 학살현장

김포1, 2, 3동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 상황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증언했다. 또한 증언자들의 증언내용 속에서 학살상황과 현장 등에 대해 대체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특별한 점은 이 지역의 학살 증언자 대부분 자신의 행위 등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위치에서 증언을 해주었으나 몇 분의 증언자(치안대활동)는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김포1동 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학살 장소로 지목한 곳은 일명 ‘여우재 고개’로 불리는 곳이다. 여우재 고개 위치는 지금의 김포시 감정동에서 인천광역시 불로동(불로동은 1995년 3월 이전까지는 김포군이었다)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이 지역은 증언자 대부분이 ‘김포 여우재 고개’에서 민간인 학살이 대규모로 행해졌다는 사실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① 여우재 고개 신명아파트 자리

   
▲ 여우재 고개에서 불로동 방향으로 내려가는 오른쪽 방향의 신명아파트 오른쪽 동에서 20미터 후방지점

여우재 고개는 김포시 감정동과 인천시 불로동(1995년 3월 이전까지 김포군이었다)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김포시 감정동에서 불로동 방향으로 여우재 고개를 넘어가면서(고개 정상지점) 오른쪽 방향(50여 미터)에 신명아파트가 위치하고 있는 지점이 김포1동의 대표적인 학살현장으로 지목한 곳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신명아파트 102동 뒤편으로 20여 미터 지점이다.

당시 이곳은 세 곳의 골짜기(증언자는 골창이라고 함, 2개는 작고, 하나는 큼) 가 있었으며 길이 꼬불꼬불 했다고 한다.

증언자에 의하면 이곳에서의 학살은 1950년 10월초 김포군 경찰이 후퇴했다가 김포로 복귀하면서 경찰에 의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현장이다. 치안대보다 경찰이 더 심하게 했으며 밤 12시가 넘어야 이곳으로 끌고 와 학살시켰다고 한다.

증언자 김경모씨에 의하면 학살 장소로 가는 도중 개머리판으로 머리 오른쪽을 내리쳤는데 훌러덩 머리가 벗겨지면서 즉사한 일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증언자는 학살규모에 대해서 골짜기 세군데 장소에서 110명을 죽였다고 증언했다.(작은 골짜기 한곳에서 30명,  중앙에 있는 골짜기에서 10명, 가장 큰 골짜기에서 70명; 사진에서 바라보는 방향에서 왼쪽)
 

② 예비군 훈련장 뒤편 골짜기

   
▲ 증언자가 서있는 위치는 여우재 고개 정상지점이며 증언자 오른쪽에 아치형 탑 뒤가 예비군훈련장이 위치하고 있다. 증언자가 가리키는 방향은 김포방향이다.

예비군훈련장은 감정동 여우재 고개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방향은 김포시 감정동에서 인천 불로동으로 넘어가는 도로상에서 왼쪽방향이다. 당시에는 골짜기를 따라 좁은 길이 놓여 있었는데 증언자가 가리키고 있는 반대편(왼쪽)에 길이 있었다.

위 사진에서 증언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은 김포방향이다. 증언자 오른쪽(아치탑)이 예비군훈련장 입구이다. 입구에 아치형 탑이 놓여 있다.

학살 장소는 증언자가 서있는 위치에서 손방향의 아치탑 뒤 보이는 산위 방향이다.
당시 이곳의 골짜기는 크지 않았다. 골짜기가 두 곳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지금 도로가 만들어진 지점인데 많이 깎아내렸다고 말한다. 

이 두 골짜기에서 6-7명을 죽였으며 특히 옹주물(감정동)과 사우리(현 사우동) 주민들을 총살시켰다고 증언했다.

③ 감정동 성인교회 뒤편 골짜기

   
▲ 증언자가 가리키고 있는 성인교회 뒤편 산골짜기 지점

증언자가 서있는 위치가 인천시 불로동으로 넘어가는 여우재 고개 중간지점이다. 증언자가 가리키는 사진속의 성인교회 뒤편 산이 보이는 곳이 세 번째 학살 장소다.

이곳에서 일명 바닥빨갱이들을 총살했는데 창으로 죽이면 더불쌍해 총으로 죽였다고 증언했다. 증언자는 ‘빨리 죽여 달라거나, 살려달라며 울고 매달리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이 골짜기에서 20명을 총살시켰다.

④ 북변동 충현탑 밑 채석장자리

   
▲ 이 충혼탑에는 6.25전쟁 중 전사한 김포출신 영령을 모신 위령탑이다. 여기에는 민간인으로서 호국군을 조직해 전투에 참가 인민군에게 총살당한 김덕문외 12용사가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김포시 충현탑은 장릉산 줄기 끝자락 작은 봉우리에 세워져 있다. 이 충현탑은 김포지역에서 지역방위를 자체적으로 지켜내기 위한 청년단(호국대) 12명이 인민군에게 잡혀 고양군 송포면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일명 12용사로 불리는 호국단 회원들과 무명용사 및 전사사 607명의 위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이 충현탑 앞으로 장릉산으로 올라가는 4-5미터 폭의 아스팔트 도로가 놓여있다. 충현탑 입구(문)와 맞닿아 있는 도로 반대편 끝이 낭떠리지 형태의 지형이다. 바로 이 낭떠러지 밑이 당시에는 채석장 자리였다.

   
▲ 사진속의 파란지붕이 보이는 집 지점이 당시 채석장자리이다. 사진 속 오른쪽의 파란지붕 짤린부분 위가 충현탑이 있다.

이곳 주변은 당시 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며 골짜기(채석장)만 뻥뚫려 있었다고 한다. 돌을 캐는 곳이라서 인적이 없었으며 이곳에서 정확히 31명을 학살했다고 증언한다. 이 학살 장소에서는 바닥빨갱이로 손가락질을 당한 사람들만 총살시켰다. 여성 7명을 총살시켰으며 여선생이 2명, 여성인민위원장, 증언자에게 욕한 여자, 술집영업자 2명을 학살했다.

이곳에서의 집단학살은 다른 곳에서는 낮에는 총살을 시키지 않았지만 악질 빨갱들은 밥도 주는 것이 아까워 낮에도 4-5명씩 총살시켰다고 증언하고 있다.
증언자는 다른 곳에서 죽인 사람들 중 억울한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었지만 이곳 채석장에서 총살은 악질 바닥빨갱이들이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⑤ 감정동 고려공원 골짜기

   
▲ 감정동 고려공원 내 골짜기/증언자가 가리키는 산 왼쪽 방향에 골짜기가 있었다.

현 고려공원(감정동 신안실크아파트 끝자락 공동묘지) 안쪽이다.(그림; 사진에서 증언자가 가리키는 지점) 장릉산 서쪽 능선을 말한다. 당시에는 이곳에 3곳의 골짜기가 있었으며 울창한 숲으로 조성되어 있어서 이곳에 들어오면 밖에서 사람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큰 아름드리나무 숲으로 돼 있어서 당시 인민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이곳 아름드리나무 꼭대기 위에 올라가서 숨으면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 다른 증언자는 당시 골짜기 위에서 치안대가 좌익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쏘면 골짜기 밑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그 중 한사람이 일어나 목지 쪽으로 도망을 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도망가는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았지만 잡지 못했다고 한다.

   
▲ 고려공원안 사진정면에 보이는 큰나무 뒤 골짜기가 학살지점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김포경찰서 유치장에 인민군이 걸포리 사람 7-8명을 가두고 있었는데 인민군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창으로 찔러 죽이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인해 치안대에서 복수가 이루어졌으며 좌익 가족들을 마구 죽였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좀 더 추려야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곳 세 골짜기에서 67명을 학살했다. 세 골짜기 중 한곳에서 17명, 다른 골짜기에서는 10명, 좀 더 큰 골짜기에서는 30명을 학살했다. 증언자는 이곳에서의 총살은 경찰이 들어오기 전에 이루어졌던 곳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또 다른 증언자에 의하면 이 골짜기 위에서 인민군에 의한 우익주민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총을 쏘면 골자기 밑으로 굴러 떨어졌으며 바닥으로 떨어진 시체위에 삽으로 흙을 덮어 놓았다고 한다. 증언자가 직접 삽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학살은 2-3일에 한 번씩 수십 번을 진행했으며 어린아이를 밴 여자도 살해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곳에서 학살된 사망자의 뼈가 지금의 감정동 굳은물까지 비가 많이 오면 흘러내려 왔었다고 증언한다.


⑥ 걸포동 한강제방 둑 전방 개흙뻘

   
▲ 사진속의 초소 후방 20미터 지점이 집단학살이 있었던 한강 개흙뻘이 있다.

이곳의 위치는 걸포리 우리병원을 왼쪽에 두고 홍도평을 가로져 있는 도로를 따라 가면 제방도로와 만나는 삼거리와 만난다. 사진에서 보이듯이 한강방향으로 제방도로에 초소가 있다. 이 초소 양쪽으로(제방도로) 철조망이 쳐져있다. 이 철조망 안쪽(한강쪽)으로 20미터 전방 개흙뻘 지점이 학살 장소이다. 이곳은 물이 찰 때는 개흙뻘이 보이지 않지만 물이 빠져 있을 때는 개흙이 드러난다.
 

   
▲ 철조망 너머 개흙뻘이 보이는 곳(20미터지점)에서 40여명이 집단학살 당했다.

증언자에 의하면 이곳 개흙뻘에 큰 구덩이를 파놓고 묶인 채로 흙을 덮어두면 물이 들어와 수장을 시켰다. 당시 40여명을 수장시켰다고 증언하고 있다.

 

⑦ 북변동 구 김포경찰서 유치장 자리

   
▲ 사진은 구 김포경찰서 뒤편 담장이다. 이 담장 안에서 주민학살이 이루어졌다.

이곳에서는 인민군이 유치장에 가둬놓았던 걸포리 주민 7-8명을 묶어놓고 삼각창(총 끝부분에 달린 칼)으로 학살했다고 증언했다. 이 학살로 인해 인천상륙작전 후 국군이 김포지역으로 들어왔을 때 유치장에서 학살당한 걸포리 주민 가족에 의해 좌익가족들이 집단적으로 보복 학살했다고 한다.

⑧ 북변동 김포초 뒤편 골짜기

   
▲ 사진 철조망 뒤로 김포초등학교 건물이 보인다. 오른쪽 보이는 길이로 내려가면 김포향교가 나온다. 이기서 오른쪽으로 30여미터 올라가면 충현탑이 있다.

풍무동 지역에서 증언한 내용으로서 치안대들이 주민 40여명을 현 향교 뒤편 김포초등학교 올라가는 산길 골짜기와 여우재 고개에서 학살했으며 그 후 학살당한 좌익남편의 부인들에게 빨갱이 표시를 한다고 모두 머리를 깎여 구분하도록 했으며 머리를 깎인 부인들은 머리 없는 표시를 감추기 위해 2년 동안이나 수건을 감쌀 수밖에 없었는데 짐승취급을 당했고 이들의 재산과 곡식 모두를 치안대에서 압류해 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치안대 사람들이 좌익 가족의 처녀들을 집단 강간을 해 마을 어른들한테 야단을 맞기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⑨기타지역 ; 고양군 송포면

강 건너 고양군 송포면에서는 김포지역 방위를 위해 호국단을 만들어 인민군과 전투를 전개한 지역청년단 김덕문외 11명이 인민군에 잡혀 끌려가 총살을 당했던 장소이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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