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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우리나라에 구제역 없을 것”소와 개밖에 모르던 그가 길바닥으로 나선 이유
   

대곶면 무쏘목장 윤장희 씨

지난 3월 28일 구제역으로 젖소를 살 처분한 낙농가들이 구제역 피해낙농가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김희동, 포천)를 구성하고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모여 현실적인 보상을 요구하며 노숙농성에 돌입했다. 이들 낙농가들은 “다 필요 없다, 소를 다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낙농산업의 특수성으로 인해 보상가가 시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정부에 젖소 보상가 현실화와 보상금 관련 고시 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태어나 처음으로 농성이라는 걸 시작한 이들 낙농가들은 피켓을 만들어 매일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전철역과 버스 정거장 등에서 서울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면서 자신들의 기막힌 처지를 호소했다. 매일 시군마다 돌아가면서 100여명이 농성장을 지키고 비대위 간부들은 유정복 농식품부 장관을 비롯하여, 돌아가면서 국회의원과 관련 인사들을 만나 비현실적인 보상규정을 현실화 시켜 줄 것을 호소했다. 농성은 4월 29일까지 32일간이나 진행 됐다.

이번 살 처분 낙농가들의 농성 기간 동안 사무차장으로 참여 하고 돌아 온 대곶면 송마리 무쏘농장 윤장희(42)씨를 만났다. 그는 이번 구제역으로 20여 년간 혈통관리를 해 오며 길러온 젖소 80여 마리를 살 처분 했다. 우직하고 목장밖에 모르던 그가 거리에 나오게 된 사연을 들어봤다. 어수룩하지만 단호한 말투에서 군인을 연상시킬 만큼 다부지게 살아온 삶이 묻어난다.

어려서부터 농장을 하는 것이 꿈이었던 윤 씨는 김포종고 축산과를 졸업하자마자 낙농을 시작했다. 축산과에 들어갈 때만 해도 사슴, 곰,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에 관심이 있었지만 졸업 후 89년, 90년에 하성 양택리에서 목장을 하던 누나에게 숫송아지를 사서 처음 홀스타인을 비육한 것이 계기가 돼 지금까지 낙농을 이어왔다.

“처음에는 아버지 목장 한켠에 얹혀서 길렀다. 한 마리 팔아 두 마리, 두 마리 팔아 네 마리로 소를 불렸다. 일을 하다 보니 용접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동네 형님네 철공소에서 일을 하면서 철공 일을 배웠다”는 윤 씨. 그렇게 해서 과하게 투자하거나 빚을 내지 않고 차근차근 늘려 지금에 이르렀다. “사회성이 없어서”라는 윤 씨는 행정에 드나드는 일도 꺼려 정부자금은 후계자자금밖에 받은 것이 없단다. “구제역에 걸리기 직전에 모아놓은 1억 원으로 집을 살까, 트랙터를 살까 하다가 트랙터를 샀다. 그런데 소가 한 마리도 없어서…(웃음)”

그는 낙농을 시작하면서부터 목표가 있었다고 한다. “윤장희, 무쏘목장이 만든 소다 하는 소를 만드는 게 내 꿈이었다. 품평회에 나가는 것도 수상이 목적이 아니다. 나는 많은 소가 아니라, 혈통 있고 수준 있는 소를 기르고 싶었다”는 윤 씨. 그래서 품평회를 열심히 나갔지만 수상경력은 별로 없다. ‘무쏘목장’의 순수 혈통이 아니면 아무리 좋아도 절대로 내보내지 않았기 때문.

윤 씨는 젖소뿐만이 아니라 혈통 좋은 사냥개와 진돗개도 7~8마리씩 키우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취미생활이라고 한다. “거의 팔지는 않고, 달라는 사람 있으면 주고…”

아내와 우등생인 초등학생 자녀가 둘씩 있지만 그의 일과는 목장을 돌보고 개들과 함께 산을 오르는 게 전부였다. 담배도 안하고, 술은 맥주와 와인만 한다는 윤 씨는 말 그대로 “소와 개만 알던 사람”이었다.

그런 윤 씨를 사회로 나오게 한 것은 구제역과 정부였다. 윤 씨는 지난 11월 시작된 지독한 구제역으로 81마리의 젖소를 전부 축사 곁에 묻었다. 1마리만 걸렸지만 당시에는 전두수를 묻어야 했다. 이 일로 윤 씨는 전국 구제역 피해 낙농가 비상대책위원회의 사무차장을 맡아 낯설고 물설은 여의도 거리 복판에서 32일간 노숙 농성을 했다.

품평회를 많이 다니다 보니 얼굴이 알려져 사무차장 자리를 맡게 됐지만 정치도 모르고 집회도 몰랐다. 그저 형님들이 시키는 일만 했던 윤씨지만 정부에 대한 반감은 깊어졌다. 윤 씨는 “정부도 낙농에 대한 (살 처분)보상 기준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이 정부는 출범할 때부터도 농업 정책이 빠져있었다”고 비판했다.

윤 씨는 “낙농인들끼리 모이면 ‘앞으로 구제역은 없다’고 한다. 누가 신고를 하겠냐는 것이다. 지금까지야 이웃에 피해를 줄 까봐 억지로 살 처분 했지만. 백신도 맞았는데…”라며 정부의 잘못된 보상 정책을 비꼬았다. 일본처럼 보상을 많이 해줘야 일찍 신고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보상을 줄이니 아무도 신고를 하지 않을 거라는 것.

이번 노숙농성을 통해 얻어낸 것이 있다면 정부가 낙농의 살 처분 보상 기준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점이라고 한다. 농성을 하지 않았다면 어느 누가 알아줬겠냐는 것. 이제는 한국낙농육우협회를 존중하고, 대변인으로써 인정하면서 협회가 협상을 잘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20년…앞으로 20년만 있으면 ‘무쏘’라는 이름으로 혈통등록을 할 자부심이 있었다던 윤 씨. “20년 세월을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다. 그게 허무하다. 이제 또 새로 시작해야  하는데...아깝다”는 말로 구제역으로 받은 상처를 표현한다.

윤 씨의 앞으로의 계획은 다시 꿈을 이루도록 농장을 재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빚지지 않고 일궈왔지만 앞으로는 소를 사려면 빚을 얻어야 한다. 그럼에도 윤 씨는 “난 행복하게 산 사람이다. 큰 빚이 없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왔다”며 오히려 다른 축산인들을 위로한다.

“내가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태어났으면 인정받는 사람이었을 텐데…. 내가 정직하게 열심히만 살면 되는 줄만 알았는데 국가 시책이 안 맞춰주면 꿈은 꿈으로만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윤 씨. 정부관계자나 같은 농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저희 같은 사람이 농업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이 없다는 것은 농업의 미래가 없는 것”라며 짧지만 굵은 메시지를 남겼다.

윤 씨와 같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자신의 꿈을 일궈온 농민들이 두 번 다시 일상이 파괴되고 거리로 나앉는 일이 없길 바라본다.
 

김규태 기자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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