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읽는 선비의 방에, 그것도 한밤중에 웬 처녀가 쳐들어왔다.

“아닌 밤중에 웬일이오？ 아녀자가 밤에 울담을 넘어 오다니？”
“처녀가 밤에, 이렇게 울담까지 넘어서 온 이유를 꼭 듣고 싶으십니까？”
“뜻을 모르는 바 아니오마는…”
“저와 결혼한다는 약속을 해 주십시오. 안 그러면 소리를 질러 대판 소란을 피울 것인즉…”
“알겠소. 밝은 날에 어머니께 말씀드려 정식절차를 밟아 맞이하리다”

처녀는 소원성취의 흐뭇함에 겨워 볼그레 미소지으며 고요히 물러났다.

이튿날 청년선비는 어머니께 사실대로 아뢰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쓰얄데 없는 소리 하지도 마！”하며 이사를 작정코 가버렸다. 그 처녀는 상사병에 걸려 드디어 죽고 말았다.

세종대왕 때의 집현전 학자로서, 훈민정음을 만든 대표공신 정인지의 설화다.

밤에 정인지의 글읽는 소리가 얼마나 낭랑했던지, 그 동네 처녀들은 소피 보러 측간을 열두번이나 들락거렸다. 그래서 육탄전의 정열파까지 등장했다.

밤깊도록 불밝혀 책읽는 모습도 아름답거니와, 그 창구멍으로 새어나오는 해맑은 총각의 앳된 목청！ 뜨락에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도 얄궂거니와, 웬 가을달은 저리도 맑은지！ 골방에 처박혀 있기엔 너무 부풀어 오르는 젖가슴！

짜던 베틀을 밀어젖히고선, 달 아래 섰다가 장난끼 반 모험심 반, 울담넘기로 작심을 한 것이리라.

“사랑은 장난이 아니다”고 어느 노랫말에 있었던가. 처녀의 몸까지 바칠 각오로 뛰어든 ‘첫사랑의 고백’이 작살난 위에 냉가슴 앓다 죽어간 그 처녀！

그러나 그 처녀의 원혼을 위하여 쓰는 글이 아니다. 그 처녀가 부러워하던 ‘독서광에의 예찬’을 얘기하려는 거다. 요즘에 책읽는 소리를 듣기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다.

한창 책읽을 나이에 학원가랴. 컴퓨터 배우랴, 시간에 휘둘려서 도시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으랴！？

아니다. ‘시간'이란 무대에서 광대놀이 하는 현실들！ 참자신의 발견을 위해서도 읽히자. ‘순간의 만족’(학원·컴퓨터)보다 ‘영원한 투자’를 찾는 길은 독서다.

컴퓨터 게임이나 즐기고, 체력으로 단을 따는 것보다, 마음이 취하는 책 한 권을 정독함이 얼마나 인생을 살찌울 것이랴.

장하늘 한글학회장, 본지편집고문

장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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