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늦은 시간에 딸아이가 돌아왔다.
아주 좋은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몇 날 며칠을 밤 세워 무엇인가 그리고 있었고, 아침이면 지우개 가루가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의 주인공들이 할 수 있을 법한 상상을 그린 것이 “패러디”(모방·개작)라고 한다니?

책을 만들고 직접 코믹월드에 나가서 부스를 설치하고, 패러디한 얇은 책을 역시 만화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팔았는데 1백권 중 80권을 파니 20여만원을 천원짜리로 가득 담아가지고 왔다.

제 손으로 그린 만화를 발간하는데, 그 동안 모은 용돈 32만원을 들고 충무로를 헤집고 다니며 만들더니, 다시 밥을 굶어가며 하루종일 행사에 참여해 20여만원을 들고 온 것도 나는 다 모르는 일이고 그저 지켜만 본 이상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

나머지는 인터넷으로 판매할 예정이란다.
중3 아이들이 모두 머리를 싸매고 공부할 시간, 딸아이는 까매진 양말을 벗으며 아주 딴전이다.

다음에는 직접 스토리를 구성하고 그림을 그려 볼 예정이라는데, 제흥에 겨운일이라 그럴까, 신나고 재미있어 한다.

반에서 15등 밖에 나면 김포 시내 고교엔 들어갈 수 없는 현실 때문에 가끔은 시무룩해 하지만 ‘자기발견’의 보람스런 깜양에 몰두하는 모습에는 ‘창조’의 좋은 기회같아 어미 마음도 흐믓해진다.

아무리 부모라고 하여도 아이들이 자신의 세계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기쁘다.

나는 아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인생이 재미있니?”
“재미있게 살려고 이렇게 뛰고 있잖아. 엄마는?”
“......?”

사람마다 사는 재미가 다르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기보다는 하루에 열두 번씩 변하는 마음(?)을 안고 사는 사람살이가 아닐까?

쉽게 자신의 짐을 지고 일어나서 다른 일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정말 주저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역시 변화에 빠르고, 얼른 적응하나보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밤잠을 안 자면서 열정을 쏟는 티없는 냅뜰힘(추진력)엔 내심 기쁘고 흐믓하다.

어느 정도 세월을 살면서 어른이 되면 열정이 어디론가 슬며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좋은 게 좋은 듯이 세상과 타협하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적당히 얼버무린다.

욕먹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처신으로 살기가 쉽다.
이것저것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두루뭉술하게 살아가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느끼며 새로운 도전이나 행위에 무디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정말 살 맛나게 혹은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른이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것은 또 다른 열정과 도전일게다.
자신이 어느 영역에 있든지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해내면서 얻는 즐거움과 성취감은 어른들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에너지가 아닐까?

사실 어른들이 살아가는 복잡한 세계를 아이들은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 오히려 행동의 폭이 더 자유로울 수도 있는 것도 때로는 부럽다.

어른들은 이런 것은 이래서 안되고, 저런 것은 저것에 걸려서 안 된다고 미리 틀을 짜 놓으면서 스스로 덫에 걸려 꼼짝 못하는 경우도 많다.

삶은 단순할수록 좋은 듯 싶다. 그러면서 정말 가치로운 일, 하지않으면 못견딜 일에는 전 생애를 거는 자유와 열정, 그것을 잠시 생각해 본다.

유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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