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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김포에서 슬피 운 까닭은?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27)

인조실록 5년(1627년) 1월 27일자 기사를 보면 인조 왕이 김포에 있는 어머니 구씨의 묘인 육경원을 참배하는 기사가 보도되고 있다.
기사내용은 인조가 양천을 출발해 김포를 지나가다 자신의 어머니가 묻혀있는 묘를 지나칠 수 없어 예를 갖추고자 하는데 동행한 신하 이정구가 출정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곡을 하지 않는다고 인조를 만류한다. 그러나 인조는 이를 뿌리치고 혼이 모셔져 있는 혼궁에 들어가 슬피 울고는 감사 이명에게 김포현령에게 제사를 빠트리지 말도록 하고 군인을 세워 보호하도록 지시하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기사내용을 보자.
<상이 양천(陽川)에서 출발하여 김포(金浦)를 경유하면서 육경원을 참배하였다. 하교하기를, “비록 소상은 지났으나 곡례를 행하고자 한다.”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군중에서는 거애(擧哀)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드디어 혼궁(魂宮)에 나아가 슬피 곡하였다. 그 뒤 막차(幕次)로 들어가 소복을 벗고 융복으로 갈아 입었다…중략>
그런데 왜 인조가 자신의 어머니 묘에 들러서 슬피울었던 것일까? 물론 어느 자식인들 부모의 묘 앞에서 슬픔의 예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인조 왕의 슬픈 곡례는 깊은 까닭이 숨어 있었다.

 

실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몇가지 궁금한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인조가 무슨 일로 김포를 지나 어디를 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부분이다. 둘째로 동행한 신하가 출정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곡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무슨 뜻인가? 셋째는 왜 인조는 슬프게 곡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강화도 피난길에 찾은 어머니 묘
첫 번째 궁금증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아가 보자.
인조의 목적지는 강화도였다. 두 번째로 신하 이정구가 출정한 상황에서는 곡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지금 상황이 부모의 묘를 참배하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다시말하면 애초 목적이 부모의 묘를 참배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정구가 말하는 그 특별한 상황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해답은 세 번째 인조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머니 혼이 모셔져 있는 신궁에서 슬피 울어야 했던 그 처절한 상황의 속뜻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한양 궁궐을 뒤로한 채 강화도로 도망을 가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을 가던 중 자신의 어머니 묘가 있는 김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을 가던 차에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묘를 보고는 기막힌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슬퍼했던 것이다.

그러면 인조가 강화도로 도망을 가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인조가 강화도로 도망가게 된 직접적인 사건은 제1차 조청전쟁, 즉 1627년에 발생한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정묘호란은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後金: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청) 사이의 싸움을 말한다.

1627년 l월 13일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 5천의 병력으로 후금군(軍)은 조선을 침공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全州)로 피신했다.

인조는 후금의 파죽지세로 침입해오자 서둘러 강화도로 도망을 가던 중 김포 풍무리에 묻혀있는 자신의 어머니 묘를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괄의 난, 호란을 부르다
그러면 정묘호란이 일어난 배경을 추적해 보자.
인조는 어떤 왕인가? 역사는 일명 보수세력의 반동적인 쿠데타로 비판되고 있는 ‘인조반정’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광해군 15년 3월 이귀, 김규, 김자점, 최명길, 이괄, 이서, 신경진 등 눌려지내던 서인들이 북인의 폐모사건을 명분삼아 능양군을 추대해 역모를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선조의 소손 능양군은 선조의 아들 정원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중종반정 때 허수아비 노릇을 한 것에 반해 능양군은 친병을 이끌고 반정의 주도세력으로 참가했다. 인조가 반정에 적극 참여한 것은 동생 능창군이 역모로 몰려 광해군에게 처형당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인조는 동생 능창군의 구명운동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아버지인 정원군은 병을 얻어 사망했다. 이러한 배경하에 인조는 광해군에게 앙심을 갖고 때를 기다린 것인데 반정의 명분은 그렇지 않았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중립외교를 벌였다는 것 즉 친명정책을 펼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궁궐을 지었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창덕궁, 창경궁을 재건했다. 셋째는 폐모살제, 즉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분의 속뜻은 광해군의 개혁정책으로 기득권을 잃은 층과 서인세력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역모였음이 드러난 사건이다.

인조는 쿠테타(인조반정) 후 친명배금 정책을 채택하고 후금(청)을 위협하고 있던 명의 장수 모문룡에게 병력과 군량을 지원하였으나 후금(청)에 대해서는 사신 왕래를 중단해 버렸다.
한편 쿠테타 후 공신들의 권력투쟁이 가열되어 마침내 반정의 일등공신이었던 이괄이 난을 일으키고 만다.

쿠테타가 시작되었을 때 반정군의 대장은 김류였으나 반정군의 실질적인 지휘는 이괄이 맡았다. 그러나 쿠테타 성공 후 김류는 일등공신이 되었고, 병조판서를 기대했던 이괄은 평안도 절도사의 이등공신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논공행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괄이 한명련, 기자헌 등과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문희와 이우가 고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문제는 이괄이 직접적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 이괄의 아들이 수상하다는 내용이었는데 결국은 인조는 이괄의 아들인 이전을 잡아오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이괄은 가뜩이나 쿠테타의 공을 빼앗긴 아픔이 끝내 가시기도 전에 자신의 아들을 역모주모자로 송환하라는 인조의 명에 격분하게 된다. 결국 이괄은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를 살해하고 평안도 토병과 전라도에서 올라온 부방군 1만2천명을 이끌고 한양을 향해 진격해 간다.

약화된 국방력, 후금 평양 무혈입성
사실 이괄의 난 사건 속에는 중앙의 서인세력들의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던 이괄을 제거하기 위한 조작된 역모였던 것이다. 이괄이 정부군을 격침하고 한양으로 진격해오자 인조는 공주로 피신한다. 우여곡절 끝에 이괄의 난은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기에 이르는데 그 휴유증은 너무 컸다.

이괄의 난을 통해 큰 교훈을 얻은 인조 정권은 이때부터 무인들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이에 무인들은 군사훈련을 기피하는 사태까지 이르러 결국 국방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괄의 난은 가까스로 진압됐지만 청의 조선침공을 불러일으키는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된다. 살해된 이괄의 부장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가서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여 청을 끌어들여 조선을 침공하게 만든 것이다.

1627년 1월13일 새벽 청은 파죽지세로 조선의 한양을 향해 진격해왔다. 청이 안주를 점령하고 평양에 무혈입성한 후 황주로 진격하자 도체찰사 이원익은 세자와 함께 전주로 피신하고, 인조는 영의정 윤방과 함께 강화도로 도망을 친 것이다.

후금은 강화도로 피신해 간 인조에게 화의를 제안하게 되는데, 화의 내용은 후금이 조선의 형의 나라가 되고, 압록강을 경계로 국경일대의 시장을 개방할 것 등이었다. 결국 조선이 이를 받아들여 후금의 아우가 되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또 이곳에 이르니 슬픈 감회갉”
강화도에서 청과 형 아우관계를 맺고 돌아오는 인조의 마음은 어땠을까?
한 나라 왕으로 다른 나라의 동생 처지로 전락한 그 마음은 혀를 깨물고 죽고싶은 심정이었으리라. 인조의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알아준 김포사람이 있었다.

통진사람 유학 한숙일이라는 사람이다. 인조가 후금과 화의를 맺고 돌아오는 길, 통진에 도착했을 때 한숙일은 후금과 치욕적인 화의를 맺어 가슴 아플 임금의 심정을 헤아렸다.

인조실록 5년(1627) 4월11일자 기사에 “대가가 통진을 출발하여 김포(金浦)에 이르렀다. 유학(幼學) 한숙일(韓肅一)이 대가 앞에 나와 진언(進言)하기를,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마음을 가다듬어 강화(江華)의 치욕을 잊지 마소서.’하니, 상이 술을 주라고 명하였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백성이 있어 인조는 고마워했는지 한숙일에게 술을 권해주는 여유를 가지기도 했다.

인조는 김포에 도착해 강화도로 도망을 가면서 슬피 울었던 어머니 묘 앞에 다시 참배를 했다. 1627년 1월27일 혼궁에서 슬피운 지 75일만에 다시 찾은 것이다.

인조는 자신의 어머니 묘를 참배한 후 그 심경을 털어놓는다. 인조실록 5년(1627) 4월 11일자 기사내용이다. “<중략>오늘 또 이곳에 이르니 병란을 겪은 뒤라서 슬픈 감회를 억제할 수 없다”며 청과 형 아우의 치욕적인 화의를 맺은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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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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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2009-04-14 12:18:19

    미래신문 김진수목사님이 쓰고있는 김포역사는 김포의 가치를 새롭게 하고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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