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이 맛을 알아?

읽고 싶었던 책이 귀하고도 귀했던 초등학교시절, 나의 책읽기는 꿈과 같이 달콤하고 너무나 맛있었다. 교장실에 자물쇠 챙겨진 작은 책장에서 간신히 빌려서 읽었던 책들은 나에게 별이 되고 달이 되고, 상상력의 바다가 되었다.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였던 충신들의 이야기. 생육신, 사육신… 살아보지 않았던 과거가 나에게는 현재보다 더 재미있고 숙연하고 의미를 가졌다.

게다가 약간의 말재주가 있던 나는 읽었던 책의 대부분을 오리 길을 오가는 등하교 길에서 친구들에게 구성지게 이야기로 전해주는 즐거움을 가지고 살았다.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친구들은 그렇게도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언니들 몰래 이수일과 심순애를 다 읽고서 그렇게 경험도 못해본 연애담을 들려줄 때면 어린 시절 내 친구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내 책 보따리조차 대신 들어다주곤 했다.

이맘때 진달래가 필 때면 친구들과 그 진달래꽃을 입술이 빨갛도록 따먹으면서 백설공주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도 하고 수많은 상상력의 피터팬이 되기도 했다.

이다음 크면 초가집에 살더라도 하루 종일 책을 읽을 수만 있다면 갇혀서 밥 한공기만 준다 해도 족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야금야금 귀한 과자조각 베어 먹듯이 그렇게 책은 나에게 행복한 그루터기였다.

부부로 만나서 사는 남편과 한 가지 취미는 확실히 통일되어 있는 것도 우리는 너무나 책을 좋아한다는 거다. 분야도 다양하고 서로 29년의 인연으로 묶여 살면서, 우리의 유일한 즐거움은 책읽기에 있다. 관심 가는 분야가 정글처럼 넓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의식의 세계가 한없이 자유로움을 경험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고독을 씻어 주는 구원의 신이기도 했다. 답이 안 나오는 것들을 우리는 거의 책을 통해 해결한다.

부부가 같이 살면서, 그리고 지인들이 있다고는 해도 우리는 그렇게도 외로움을 탄다. 같이 있어도 외로워서 어쩌지를 못할 때 우리는 정말 배 쭈욱 깔고 같이 따로 책읽기에 들어간다. 살면서 울음이 가득하도록 슬프고 아플 때도 책을 통해 구원을 경험한다.

때로 너무나 지쳐있을 때는 가만히 누워서 가득한 책들의 제목을 눈으로 읽어간다. 어쩌면 그렇게도 책 제목들은 진리로 가득한지. 정말 인간이 깨달을 수 있는 진리들의 엣센스라고 느낀다.

침대도 없는 방에 전기장판 한 장에 좌우로 책이 전혀 가지런하지 않은 채로 날마다 쌓여가는 것을 바라다보면서 스스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점점 타인들에게 우리의 공간을 보여준다는 것을 포기하는 상태가 되어간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부부는 스스로 보아도 참 건조한 것 같아 보인다. 옷도, 집을 멋있는 장식으로 꾸미는 것도 아름다운 장식장도 없다. 23년 된 장롱은 자꾸만 어딘가가 고장이 난다. 서랍을 열다가도 문짝이 낡아서 떨어진다.

우리 부부의 나이인 50대 초반으로 들어서는 집을 가볼라치면 여유가 가득한 이들의 모습도 많다. 하지만 우리의 집은 늘 아직 공사중인 집처럼 늘 완전한 모습이 없다. 여기저기 보이는 곳마다 책이 더욱 늘고 쌓여있을 뿐.

그래도 남편은 중고책방을 인터넷으로 드나들며 택배로 날라 온다. 아마 술을 좋아하는 사람의 빈 소주병이 쌓여가듯이 우리집도 늘 그렇게 책들로 만원이다.

영화를 같이 보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같이 여행을 다닐 만큼 생산력이 높은 인생도 아니고 여유롭지도 않은 살림살이를 살면서 우리에게 하나의 공통점은 인생을 통틀어 책을 찾아 나서는 여행을 많이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솔직히 이사를 가려고 해도 “이 책들을 다 어떡해 하느냐?”며 서로 웃기도 한다. 방이란 방마다 널린 것이 책일 만큼 아무런 장식 없는 집에 살면서, 나는 그 유명하다는 생활 용품들의 명품의 이름은 하나도 모른다. 하지만 읽고 쓰는 일을 평생 하면서 살았다. 게다가 이제는 남편이 김포에 관한 책을 써대면서 넘쳐나는 자료들로 더욱 붐빈다.

치우기를 거의 포기하고 나는 겨우 먼지만 훔치면서 사는 중이다. 누구나 사람마다 자신이 가장 많이 지출하고 사는 분야가 있다.

우리는 술도 안마시고 과자도 안 먹고, 옷도 잘 안사고 물정도 모르고, 놀러 다니지도 않지만 과자를 즐겨먹듯이 그 취미 하나는 같이 하고 산다. 부부로 산다는 것, 무엇하나가 배짱이 맞아도 맞아서 사는 것일 게다. 하나도 부부사이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