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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원종대왕 만들기’ 프로젝트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27)

인조는 반정, 즉 오늘날 표현으로 쿠데타에 의해 추대된 왕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가 스스로를 옥죄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왕으로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 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조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어머니 계운궁을 모신 김포의 산소 이름도 육경원(毓慶園)이라고 명명했다. ‘사친을 왕비의 예로 대접하면 안 된다’는 신료들의 반발과 공론을 무시하면서까지 ‘추대된 왕’으로서 자신이 지닌 정통성의 약점을 만회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인조 자신의 어머니 능성구씨를 ‘인헌왕후’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왕으로 만들어가야 했다. 어머니가 왕후인데 아버지가 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지난 26호 연재를 통해 필자는 인조의 첫 번째 프로젝트 ‘인헌왕후 만들기’를 살폈다. 이번 연재에서는 인조의 두 번째 프로젝트였던 이른바 ‘아버지 정원군 원종대왕 만들기’ 프로젝트 과정을 살펴본다.

인조는 어머니를 인헌왕후로 만들고 더 나아가 작고한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고자 했다. 이에 신하들은 더 격렬하게 반발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그것을 둘러싼 논란은 길고 지루하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추숭을 둘러싼 논란은 정원군(이부)과 인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예학(禮學)-예법(禮法)에 관(關)한 학문(學問)-의 권위자였던 김장생(金長生)은 인조실록 1623년 5월3일(임진) 기사에서 상소를 통해 사묘에 대한 전례에 대하여 입장을 밝혔다. ‘인조가 선조를 계승한 이상 왕통으로 볼 때 인조의 아버지(考)는 선조’라고 못 박았다. 왕통은 사적인 혈연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내세워 정원군을 ‘아버지’로 대접하려는 인조의 의도를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인조는 “어느 사람이건 할아버지가 있고 난 다음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있고 난 다음에 자기 몸이 있는 법인데, 어찌 할아버지만 있고 아버지는 없는 이치가 있겠는가. 예관-고려 초기에 둔 육관의 하나. 예의·제향·교빙·과거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로, 성종 14년(995)에 상서예부로 고쳤다-의 소견에 예를 잃어버린 점은 없는 듯하다”고 불편함을 드러낸다.

인조 1년(1623) 5월7일 기사는 인조가 예조판서 이정구를 불러들여 사묘에 대한 전례-왕실이나 나라에서 경사나 상사가 났을 때 행하는 의식-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이 보도되고 있다.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는 ‘선조와 인조를 부자 관계로 하면 정원군과 인조는 형제가 되는’ 문제점이 있다고 김장생의 의견에 반대했다. 대다수 신료들이 ‘왕통은 사적 혈연보다 우선한다’는 김장생의 의견에 동조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귀와 박지계(朴知誡) 등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은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아들’이라고 거리낌 없이 주장하여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았다. 인조에게 철저히 영합했던 것이다.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는 논의는 정묘호란-조선 인조 5년(1627)에 후금의 아민(阿敏)이 인조반정의 부당성을 내세우고 침입하여 일어난 난리-때문에 중단되었다가 1630년(인조 8) 8월2일 음성(陰城) 현감 정대붕(鄭大鵬)이 다시 소장을 올려 제기되기 시작했다.

정대붕은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계운궁(啓運宮)의 초상(初喪)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소 절목을 일체 국상(國喪)의 예법에 따른 것은 반드시 천리와 인정의 자연스러움에 연유된 것입니다. 참봉(參奉)을 설치한데 이르러서도 능침(陵寢)과 다름없이 하였는데 유독 추숭하는 일절(一節)에 대해서만 아직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략>상사(喪事)는 모두 국상에 의거하였는데 추숭을 버려두고 행하지 않으니, 성현이 예법을 제정함에 있어 어찌 선후를 다르게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하며 ‘인조의 어머니 계운궁의 상례를 국상으로 치르고도 아버지 정원군을 추숭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추숭’ 상소 올리게 해 ‘여론 조작’까지
인조는 정대붕의 의견이 반가웠지만 대다수 신하들은 또 다시 반발했다. 하지만 인조에 영합한 신하들은 정대붕의 상소를 계기로 다시 불을 붙이기 시작했는데 이귀가 선봉에 나섰다. 이귀는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고, 그를 모시는 묘(廟)를 세우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인조 8년(1630) 8월24일 기사에서 이귀는 차자(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를 올려 추숭하는 전례(典禮)를 속히 거행할 것을 청하면서 아울러 주자(朱子)의 조묘의장(祧廟議狀)을 써서 올리니, 인조는 “경의 식견은 남보다 뛰어난 점이 많다. 차자의 내용은 마땅히 의정(議定)-의논해서 결정하겠다는 뜻-하도록 하겠다”고 칭찬하고 나선다.
 
이귀는 인조의 인정(?)을 계기로 무리를 동원하여 추숭을 요청하는 상소를 연달아 올리게 하는 등 ‘여론 조작’까지 시도했다.

이원익, 김류, 오윤겸 등 대부분의 신료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대신들은 모든 대소 신료들을 이끌고 인조를 압박했고, 성균관 생도들까지 나서 인조에게 ‘공론을 따르고, 비례(非禮)-예의에 어긋남-에 집착하지 말라’고 외쳐댔다.

인조 9년(1631) 5월 2일 기사는 태학 유생 이지항이 추숭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지금 이 추숭하는 거사는 천칙(天則)(우주의 원칙. 또는 대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인기(人紀)를 문란하게 하여, 사은(私恩)을 높이고 의리를 무시한 혐의가 있으며 조종(祖宗)을 존경하는 도리를 잃었습니다. <중략> 하물며 전하의 거사는 선조(先朝)의 비례(非禮)보다 더 심한 경우인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더구나 종묘 소목(昭穆)-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 왼쪽 줄을 소(昭)라 하고,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하여 1세를 가운데에 모시고 2세, 4세, 6세는 소에 모시고, 3세, 5세, 7세는 목에 모신다-의 차례는 한쪽을 올리면 한쪽은 내려야 되는데, 선조(宣祖)한테 성종은 임금이자 조부이고, 대원군은 지자(支子)이자 신하이거늘 어찌 올려서는 안 될 신위를 올리고 조천(祧遷)-종묘 본전 안의 위패를 그 안의 다른 사당인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던 일-하면 안 될 때에 조천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선조의 혼령도 반드시 마음에 편치 않게 여기실 것입니다. <중략> 더구나 전하께서는 사기(辭氣)가 매우 준엄하여 신료들을 꺾으시니 성조(聖朝)의 기상에 걸맞지 않고 백성들이 바람에 어긋납니다. 대오 각성하시고 흔쾌히 조정 신하들의 청을 따르소서”하니,

인조는 답하기를, “중국에 주청하는 일은 윤리를 깨뜨리거나 나라를 손상하는 일이 아닌데 너희들이 와서 성가시게 구니, 지나치다 하겠다”하였다. 이지항 등이 다시 상소하여 극력 말하였으나, 인조는 끝내 따르지 않았다.
 
격론, 소수의 ‘추숭 찬성론자’ 대다수의 ‘반대론자’
계속해서 인조 10년(1632) 2월 11일 기사는 윤방·오윤겸·이정귀 등이 추숭의 불가함을 진언하고 나선다.
영의정 윤방(尹昉)은 이 추숭하는 일로 의논드리기를, “<중략> 성상께서는 추숭할 생각만 하시고 성찰하지 않으시기에 신은 감히 그 설을 다 마치지 못하고 물러나왔습니다. <중략> 추숭하는 한 조항은 의논함을 용납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영돈령부사 오윤겸(吳允謙)도 “<중략> 성상께 근심과 번뇌를 이렇게까지 끼쳤으니 죄가 만번 죽어야 마땅합니다. 삼가 예관(禮官)에게 내린 전교를 받들고 보니 황공하고 떨려서 감히 의논드리지 못하겠습니다”하고, 이정귀(李廷龜)는 “이 일은 전대(前代)에 근거할 만한 정례(正禮)가 없지만, 성상께서 지극한 정을 펴고자 하시니 신하로서 누군들 순종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막중한 예가 혹시라도 중정(中正)함을 잃으면 참으로 후세에 비난을 받을까 염려됩니다. 하찮은 저의 소견은 전에 이미 여러번 전달했으니, 황공하게 죄를 기다립니다”하며 인조의 독단을 끝내 막지못하고 만다.
 
결국 인조는 “<중략>생각건대 이 예는 천경지위(天經地緯)로 만대에 우러러 볼 바이며 일은 순조롭고 이치는 정당하여 후세에서 취할 바이니 속히 추숭하는 예를 거행하여 봉선(奉先)하는 도리를 다하게 하라”고 하였다.

정치판은 바야흐로 인조, 이귀, 박지계, 최명길 등 소수의 ‘추숭 찬성론자’들과 대다수의 ‘반대론자’들로 나뉘어졌다.

1632년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의 시도는 사실 앞뒤가 맞지 않는 무리한 것이었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이후, 지난날 광해군이 생모 공빈(恭嬪)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하고 무덤을 성릉(成陵)이라 했던 것을 비판하고 성릉의 석물 가운데 참월한 것을 없애라고 지시한 일이있기 때문이다.

인조 8년(1630) 5월 21일 기사는 “과거 선조(宣祖) 때에 공빈김씨(恭嬪金氏)-광해군의 어미이다-가 죽자 양주(楊州)에 장지를 잡았는데, 고려의 상주국문하시중(上柱國門下侍中) 조맹(趙孟)의 묘소가 그 곁에 있었으므로 그 부분을 허물 것을 의논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광해가 왕위에 오른 뒤 공빈을 왕후로 추존하고 묘호(墓號)를 성릉(成陵) 으로 올렸는데, 조맹의 묘소를 파낼 것인지에 대해 광해가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불가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봉분만 헐었다. 광해가 폐위되자 김씨도 따라서 공빈으로 폐해지고 마침내 능호도 고쳐졌으나 조맹의 무덤은 여전히 봉분이나 표석도 없는 상태였다. 그의 후손 조수이(趙守彝) 등이 상소하여 봉분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고 이어 공빈의 묘소에 법에 어긋나게 세운 석물들을 헐도록 명하였다.

반대하는 신료는 ‘시정잡배’, 유생들은 ‘괴물’ 매도
인조는 반대하는 신료들을 ‘시정잡배’로, 성균관 유생들을 ‘괴물’이라고 매도하면서 추숭을 강행하려 했다. 이귀는 그 과정에서 솔선해서 ‘총대를 멨다’ 그는 경연(經筵) 자리에서 추숭을 주장하다가, 반대하는 신료가 있으면 소리를 지르고 주먹으로 바닥을 치면서 성토하고 모욕을 주었다. 인조의 존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추숭 문제를 놓고 신료들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결국 1632년(인조 10) 2월, 추숭도감(追崇都監)을 만들어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켰다. 이어 5월에는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여 원종(元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다. 원종과 계운궁을 모신 산소는 장릉(章陵)으로 승격되고, 1635년에는 그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데도 성공했다. 신료들의 반대와 조야의 공론을 모조리 무시하고 밀어붙여 얻어낸 ‘성과’였다.

이렇게 인조의 어머니 능성구씨와 아버지 정원군 이부는 아들 왕에 의해 10년간의 긴 논쟁과정을 통해 인헌왕후와 원종대왕으로 추존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원종 추숭을 통해 왕권을 어느 정도 높일 수 있었지만 물경 10년 가까이 계속된 ‘추숭 논란’은 신료들 사이에 불신의 벽을 높이고 국력을 갉아먹었다. 그 와중에 민생을 추스르고 국방력을 제고해야 하는 긴급한 과제는 아무래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실록을 기록한 사관이 인조의 친부모 추승논란과 관련 신하들의 처신에 대해 재미있게 평을 해놓았다. 인조 10년(1632) 5월 3일자 기사이다.

“이전에 오윤겸(吳允謙), 김류(金瑬) 등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추존이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최명길(崔鳴吉)은 별묘(別廟)를 세울 것을 주창하였다. 사람들은, 최명길이 사실은 추존하고 싶으나 남들의 말이 두려워 겉으로만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하였다. 윤겸 등이 체직되고 나서 윤방(尹昉)이 영상이 되자, 상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여 비로소 별묘의 주장을 좇아 결국 추존하는 예를 시행하였다. 이정귀(李廷龜)와 김상용은 좌상과 우상으로서 처음에는 오윤겸과 주장을 같이 했으나, 결국 윤방의 뜻에 끌리어 자기 주장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굽히지 않는 대신의 기풍이 없다고 나무랐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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