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주룩주룩 왔다. 산길에는 아무도, 그야말로 아무도 없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걷든지 가벼운 마음으로 걷든지 늘 걸어야 살겠다.

머리가 무거움으로 가득차도 왜 그런지 걷기만 하면 별것이 아닌 것들로 되돌아오니 날마다 감사할 뿐이다. 그렇게 조석으로 걸었다. 지켜보는 남편이 징그러울 정도로 철저하다고 말하지만 걷지 못하는 날에는 늘 인내에 한계가 있었다.

금방 참을 수 있을 것 같은 사소한 것들에 화가 나고 마음이 풀떡이고 그랬다. 그래서 걷고 또 걸으면서 돌들에게도 말을 건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만이 생명이 아닌 것을 더 잘 느끼고 더 잘 알겠다.

호흡을 내어뿜으며 산길을 걷노라면 그렇게 여름내 무성했던 풀들은 다 누웠다. 그렇게 눈앞에 무성했던 풀들이 그렇게 가녀리게 누워버리니 무상하기도 하다지만 산은 더 차분해진 것으로 보인다. 떨어진 잎들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소리들이 살아있다.

한참을 걷다보니 그 자리에 바위가 두 덩어리나 앉아 있었다. 늘 지나던 그 길의 그 바위가 왜 오늘에야 그렇게 눈에 들어온단 말인가?

본다는 것도 그렇다. 관심으로 보는 것이다. 늘 있어왔건만 의식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에 대한 발견이다. 함께 있다 해도 결코 같이 보는 것이 아니다. 보는 눈만큼 보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본다.

힘든 마음을 바위에 기대어서 한참을 있었다. 안개가 살포시 왔다가 조용히 가고 빗방울이 왔다가고 그렇게 정말 한참을 길 아닌 숲에서 바위에 기대어 있었다.

“얼마나 이 자리에 있었던 거야?” 바위에게 물어봤다. 말이 없었다.

백년일까? 천년일까! 무게가 느껴졌다.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갑자기 나보다 더 큰 존재가 되어 엄청난 에너지로 느껴지는 경험.
바람같이 이 길을 지나가는 나는 너무나 가벼운 존재 아닐까! 일어나야 할 모든 일은 일어날 것인데 마음을 졸이며 애달파 할 일이 무엇이랴!

단지 영원을 지키며 기다리고 빈 마음으로 바라볼 일 인 것을! 산이 바다처럼 느껴졌다. 출렁이는 바다처럼 산이 느껴지기도 하다니!

소나무의 살도 사람의 살과 무엇이 다르랴! 소나무껍질이 모두 사람의 살결처럼 느껴진다. 다 호흡이 있어 숨을 쉬는 나와 무엇이 다르랴! 더구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도 않으면서 한 자리에 서서 도를 닦는 모습.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흔들림 없는 경지에 다다르는 것일까! 얼마나 더 살아야 완전한 자유를 느끼는 것 일까!

어제 통화 한 지인의 한마디가 머릿속에 남아있다. “지나고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인생이 정말로 그렇다는 것, 그걸 다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야하다니요”

유인봉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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