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내린 아침이슬을 맞으며 산길을 걷노라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밤톨 하나에 집중된다. 꼭 밤을 주우려 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저곳에 한 두알 씩 떨어져 있으니 줍다보면 한 주머니가 불룩해지는, 의도하지 않은 그 순수한 행복감이라니!

6년째 밤톨줍기에 즐거웠다. 이것 또한 암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얻어진 순수함이다. 그런데 문득 발견한 것은 늘 걷는 자리, 맴도는 자리에만 집중했다는 것을 알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밤톨의 유인을 받으며 숲으로 숲으로 가보니 6년 동안 그 지점은 한 번도 얼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나는 모험보다는 단선형 울타리형의 인간상으로 살았다. 아무튼 가던 길로만 가는 맹꽁이 같은 모습이 내게 많이 있음을 느꼈다. 어쨌거나 밤톨을 줍기 위해선 바짝 엎드려야만 한다.

거만하게 서서 대충 눈길을 주면 밤은 절대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뿐만인가, 걸어온 자리도 다시 들여다보면 다시 보석처럼 새로운 생명, 밤톨이 어느사이 또 모습을 보인다. 내가 걸어온 길의 아름다움이나 가치가 있음을 우리는 쉽게 간과하는 것은 아닐까!

흙속이나 떨어진 잎새 뒤에 숨어 한 귀퉁이만 보여주며 자신의 존재를 살짝 드러내는 밤톨, 앞서간 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녀석을 줍는 순간은 기가 막히다.

그렇게 보석 같은 밤톨들이 내 손 안에 한 웅큼 들려 있을 때가 있다. 인생의 자리도 마찬가지가 아닐런지. 자리라고 누구나 같은 자리가 아니고 복이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는 복이 되는 자리도 누구에게는 의미도 안 되는 자리가 있고, 오히려 화가 되는 자리도 있다. 밤알 하나 하나에, 시름도 미움도 갈등도 잦아들거나 사라져가고 마는 행복을 누리는 데는 잠깨고 신발 신으면 되는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미해결되어 있는 과제들이 같이 잠을 깬다. 앙금같이 가라앉아 있다가 뿌옇게 올라오는 현실감으로. 당장 내 손을 거쳐야만 해결되는 것도 아니면서 아침결에까지 혹처럼 달라붙어 있는 찌뿌드드한 느낌과 현실들이 밤톨 줍는 마음에 녹아버릴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언젠가부터 나는 빚쟁이가 되어 있다. 아프기 전까지는 빚을 지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아프면서는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갚는다는 신념으로 우선 생존하는 일에 더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무거울 만큼의 무게로 은행빚을 지었다. 엊그제 통화한 친구도 빚만 없으면 어디로 도망가겠다고 했다. 그 친구는 큰 사업을 하는 이라서 이자만도 수천만원이고 자칫해서 무는 벌금도 2억 단위가 넘는다. 가끔 그의 큰 사업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그의 마음은 더 가난하다. 그놈의 이자를 갚느라고 죽을 수도 없단다. 그렇게 크던 작던 바위같은 무게가 우리를 짓누른다.

그런데 그렇게 숨 가쁘게 무게감을 주는 것들이 아침산책 한 톨의 밤 때문에 가벼워질 수 있고 지고 갈 수 있는 짐이라고, 질 수 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 기적 아닐까?

그 생각을 하면서 젖은 낙엽 뒤에 살포시 얼굴을 내미는 밤알 한 톨 줍는 행복이 며칠간은 더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나면 또 기대가 되는 즐거움이 있다. 아마도 단풍이 들 것이다. 사계절을 바라보고 살면 늘 희망이다.

봄의 새순, 여름날의 아카시아 향기. 가을의 밤알들, 그리고 단풍, 또 있다. 자신이 살려낸 잎새를 떠나보내는 겨울나무의 준수함,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은혜로운 세상이다.

유인봉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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