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을 맵시 있고 곱게 짓는 여성이 있다. 오래 만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이를 만나는 순간부터 오랜 인연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예사롭지 않은 예술적인 기운을 가진 분이 어쩜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셨어요?”

이야기를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그이의 과거가 아주 소중한 이력이 있어 보인다는 것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깊은 인생공부를 하는 시험적인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을 만나 ‘인연’임을 알기까지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서로 주고받는 눈길에서 입으로 이야기하지 않은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올해 추석에는 마음이 아주 많이 가볍다는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 어머니 아버지를 대전 국립묘지에 한 자리에 모시고 합장을 했다는 것. 국가 유공자인 아버지의 곁으로 강화에 계시던 어머니의 유골을 모시고 다녀왔다는 이야기다.

살과 뼈를 여물게 해 주신 어머니지만 이 땅에 머물다 가셨다는 증거로 남겨진 한 줌의 유골. 어머니의 지상의 흔적이 담긴 항아리를 모시고 가면서 마주 무릎을 대하며 하지 못했던 생전의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차안에서 오랜 시간 어머니와 이야기를 했단다.

“어머니, 그때 내가 어머니가 그렇게 입고 싶어 하셨던 보라색 모시저고리를 해드리지 못한 이유는 손님들 옷 만들어 주느라 그렇게 여유를 못 가졌던 거예요. 살기가 폭폭해서 그랬던 거 아시지요?”

“어머니, 여기쯤에는 몇 째네가 살고 있는 거 아시지요? 지금 그곳을 지나가는 거예요”

“어머니, 이제는 혼자 외로워 마시고 아버지 곁으로 가셔서 함께 편히 쉬세요”

어머니 유골을 모시고 가는 길이 그리 멀고 힘들었단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 소중한 경험의 시간이었단다.

수많은 세월 어머니와 미처 주고받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어머니를 옆에 모시고 가면서 그렇게 하고나니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이 어찌 대화를 가로막을 수 있으랴.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손이 꼭 잡아졌다.

추석명절이 가까워지면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긴 행렬이 또 이어지겠고 우리는 또 텔레비전에서 민족의 명절 이동을 볼 수 있을 거다.

고려공원의 여러묘역들도 여름내 자라난 풀들이 깨끗하게 이발이라도 한 듯이 낫질이 되어있다. 이른 아침 햇살이 깨어나는 시간에 이슬을 스치며 이 길을 걷노라면 늘 숙연해지는 마음이 된다. 

미리 왔다 간 자손들이 한 조각 남긴 과일조각들을 날아가는 새들이 쪼아 먹는 모습도 본다. 들판을 멀리 바라보면서 걷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앞서 간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을 쫓아 산길을 걷노라면 산자와 죽은 자들의 소리 없는 만남을 본다.

걷고 있는 발길 아래에는 죽은 자들이 그렇게 또 누워있다. 중요한 것은 한을 갖지 않고 인생을 마치는 일은 너무나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가끔은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사건이나 사람들이 있지만 그 사건이나 사람을 가슴에 묻고 가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아 우리는 용서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 사람에게 내어줄 마음의 터가 우리에게는 없다. 다 털어내고 나쁜 기운마저 털고 갈 일이다.

우리는 늘 하고 싶은 말과 마음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오랜 슬픔의 기운으로 눌려서 산다. 화해와 축복을 하기까지 수많은 고통이 있겠지만 그래도 눈물과 함께 털어버릴 일이다.

나는 가끔 힘들면 마음속에 무덤 하나를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 이것저것 다 담고 뚜껑까지 하나 만들어 덮어씌운다. 그리고는 안녕이다.

삶에도 담겨지고 죽음에도 담겨지는 마음의 여유로움이 우리에게는 동량으로 필요하다.

임자 없어 보이는 무덤에도 말을 걸어볼 수 있는 여유, 비록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어머니의 육체일지언정 마음속의 어머니는 색이 바랠 수 없는 현재와 같이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번 추석 보름달을 보면 그렇게 삶과 죽음에 한계를 짓지 않는 한량없는 자비심을 빌어볼 일이다.

유인봉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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