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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던 백성, 장릉을 방화하다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25)

김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국가유적중 하나인 장릉이 두 차례나 불에 타 사라질 뻔한 사건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편은 2년을 주기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방화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실록만으로는 정확한 실체적 사실을 규명하긴 어렵지만 김포군수의 폭정에 분노한 백성의 짓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관리자의 소홀도 불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올초 있었던 숭례문 방화사건과 비교하면 재미있는 역사에 접근할 수 있다.


2008년 숭례문 방화사건
2008년 2월10일 오후 8시 40분쯤 국보 1호인 숭례문(남대문)이 방화에 의해 전소된 사건이 있었다. 방화를 한 이는 69세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숭례문에 불을 지른 이유에 대해 “오죽하면 이런 짓을 했겠는가?” 제목으로 2006년에 작성된 편지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본인이 창경궁에 놀러 갔으며 그곳에서 우연히 불이 났는데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로 방화범으로 몰렸고, 방화범으로 몰리면 어쩔 수 없으니, 거짓 자백을 하라는 변호사의 말에 따라 거짓 자백을 하였고, 또 공탁금을 500만원을 걸었는데 국가에서는 오히려 1500만원의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며, “내 자식이라도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어줬으면 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이런 억울한 누명을 써서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고 그는 진술했다. 그는 법원으로부터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됐다.

그런데 문제는 숭례문 화재를 진압하는데 5시간 이상이 소요되면서 화재 초기 소방 당국과 문화재청의 대처가 문제가 있었다는 논란이 일었다. 또한 숭례문 내에 배치된 소화기가 1, 2층에 나눠 배치되고 상수도 소화전이 설치된 것과 사설경비업체의 무인경보시스템에 의존하였으며, 화재 감지기, 경보 설비 등은 전혀 없었다는 점도 화재 예방의 취약점으로 드러났다.

숭례문을 개방한 서울시청과 중구청에 대한 이 사건의 책임과 비판이 일었었다. 더욱이 2004년 5월27일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은 숭례문 개방을 공약하였으며 문화재청의 부정적 견해를 무시하고 공사를 해 2006년 6월28일 숭례문의 홍예문까지 개방하여 일반 시민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하였다.

이러한 숭례문 개방 사업이 청계천 복원사업과 함께 중요 치적으로 선전되었다. 이후 주간에는 근무자가 경비하였으나 2008년 초부터는 무선용역경비 업체인 KT텔레캅이 경비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방화범이 접근이 용이하게 하였다는 화근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5년부터는 삼성 에스원에게 유료로 맡겨오다가, 예산절감을 이유로 2008년 1월 문화재 지킴이 캠페인으로 무료경비를 자처한 KT텔레캅측으로 경비를 넘기며 경비인원과 경비재 및 경비횟수가 대폭 감소했던 것이다.

장릉, 두 번 불타다
우리 김포에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왕릉을 방화한 사건인데 방화이유나 그 과정이 현대의 숭례문 사건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그 능은 ‘장릉’으로 조선 16대 인조의 부모인 원종(元宗, 1580~1619)과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구씨를 모신 능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처음엔 양주군 곡촌리에 묻혔다. 큰아들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정원군은 대원군에 봉해졌고, 묘가 원으로 추숭되어 흥경원(興慶園)이라 했다.

1627년 인조는 정원군묘를 김포현의 북성산 언덕으로 천장했고, 1632년 다시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원종,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인헌왕후는 아들(인조)이 즉위하자 연주부부인이 되었고, 궁호를 계운궁(啓雲宮) 이라 했다. 1626년 4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김포 북성산 언덕에 예장하고 원호를 육경원(毓慶園)이라 했다. 흥경원을 이곳으로 다시 천장하면서 원호를 흥경원이라 합쳐 불렀다.

조선왕조실록은 이같이 인조의 아버지 원종과 그의 부인 인헌왕후를 모신 장릉에 누군가가 방화를 일으킨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실록상으로는 장릉에서 두 번 화재가 발생했다. 첫 번째 방화는 인조 15년(1637) 2월 17일자 기사로 장릉(章陵)이 누군가에 의해 실화(失火)되어 임금이 3일 동안 소복(素服)(상복)을 입었다고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상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아 범인이 누구이며, 어느 정도 화재가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두 번째 불로 왕릉 절반 소실
두 번째 화재는 2년 후인 인조 17년(1639년) 3월 30일자 기사가 전해주고 있다.

불은 왕릉 전체면적의 반가량이 탔음을 전해주고 있다. 이 일로 왕은 내시와 사관을 현장에 보내 철저한 조사를 지시한다. 또한 중신(重臣)(정이품이상 벼슬)을 장릉에 보내 위안제(慰安祭)(산소나 신주가 놀라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정전(正殿)(왕이 나와서 조회(朝會)를 하던 궁전)을 피해 거처하고 수라상의 반찬을 줄이고 백관(조정의 모든 벼슬아치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 예로 문무 백관이란 말을 흔히 들어보는데 문관과 무관의 모든 벼슬아치라는 뜻이다)들에게 아문에 모여 사흘 동안 소복을 입게 하였다.

인조는 자신의 부모 묘 방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속내를 드러낸다. 인조 17년(1639) 3월30일자 기사는 장릉 화재에 대해 “<중략> 장릉의 화재는 참으로 극히 놀랍고 참혹하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의심할 만한 자를 적발하여 캐어 물어 정죄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그런데 같은날 또 다른 기사는 예조가 현장조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보고한다. 그 내용은 장릉을 관리하는 참봉이 왕릉 위 혼유석(魂遊石)(왕릉의 봉분 앞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 사이에서 목패(木牌)(나무로 만든 패)를 발견한 것이다. 장릉참봉은 이 목패를 볼 수 없도록 하여 예조에 보낸 것이다.

예조는 능 위의 변고와 관계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 목패를 열어보니 목패에 지방(紙榜) (종잇조각에 지방문을 써서 만든 신주(神主)) 하나가 붙여있고 모두 김포군수가 백성을 학대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군수의 폭정에 항거한 방화
예조는 이 목패의 내용에 대해 왕에게 보고하기를 ‘간사한 자가 토주(土主)(김포군수)를 모함하기 위해 능 위에 변을 만들어 낸 것으로 더 놀랍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우승지 허계(許啓)는 왕에게 “익명서를 서로 전하지 못하게 한 것은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장릉의 지방 목패(紙榜木牌)를 참봉이 해조에 봉해 보낸 것은 이미 극히 부당한데, 해조가 또 본원(本院)에 올린 것은 법례에 어긋납니다. 그러므로 신이 감히 입계하지 못합니다. 해조에 도로 보내어 태워버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왕은 우승지 허계의 의견에 따른다.

위 내용으로보면 장릉의 화재는 단순화재가 아닌 의도된 방화이며 그 의도는 지방수령의 탐욕을 고발하고자 하는 방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은 방화범을 색출하도록 간청하지만 왜 방화를 했는지에 대한 그 목패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 자체를 태워버리는 이해 못할 처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다음날(인조 17년(1639) 4월 1일자 기사) 우의정 심열, 호조판서 이명(李溟), 공조판서 남이공(南以恭), 예조참의 이덕수(李德洙)가 장릉에서 현장조사를 마치고 왕에게 보고하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다.

“<중략> 신들이 능침에 달려가서 불이 난 곳을 봉심하였더니, 불이 처음 일어난 곳은 곡장(曲墻)(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안으로, 들불이 타들어왔을 리가 없고 또한 횃불의 불똥이 떨어져서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엄히 적발하여 다스리소서<중략>”하고 보고하니 왕이 따랐다고 보도하고 있다. 즉 불이 난 것은 어떤 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방화임을 보고하면서 그 방화범을 잡아 엄히 다스릴 것을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큰 사건이지만 ‘묻어두기’ 급급
또 그 다음날(인조 17년(1639) 4월 2일자 기사) 사간원[司諫院](조선 시대에, 삼사 가운데 임금에게 간(諫)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서 장릉 화재 건에 대해 업무보고를 하는데 “<중략> 장릉의 화재는 참으로 극히 놀랍습니다. 호위하는 사람은 사리상 죄를 면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그 사정이 실로 의심할 만한 점이 있는 데이겠습니까. 듣건대, 당직 참봉(參奉)이 멀지 않은 곳에 거처하고 있는데도 그날 밤 숙직하지 않았으며 일이 발생한 뒤에 하인이 달려와 고하자 비로소 첩보(牒報)하였다 합니다. 재랑(齋郞)(제향 때 향로를 받드는 제관)이 맡은 직분이 어떠한 일인데 돌려가며 숙직하고 교대로 번을 드는 것도 신중히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통렬히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봉 및 수복(守僕) 등을 아울러 잡아다가 국문하여 정죄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대간과 대신이 형신(刑訊)(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며 캐묻던 일)을 하지 말 것을 요청하자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것마져도 중지되고 말았다.

하지만 인조 17년(1639) 5월 4일자 기사는 왕이 대신과 금부ㆍ병조ㆍ형조의 당상과 양사의 장관을 불러 다시 죄인을 직접 심리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자 좌의정 신경진이 “<중략> 장릉참봉(章陵參奉) 이돈림(李惇臨)은 숙직을 거른 죄에 지나지 않은데, 형신(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며 캐묻던 일)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하고 심문하지 말 것을 요청하자 왕은 “<중략> 실화의 변고가 수호군(守護軍)에게서 나왔다. 참봉이 숙직하였다면 어찌 이런 변고가 있었겠는가. 다만 형추하지 말고 가두고서 기다리라”며 좌의정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만다. 이후 장릉참봉에 대해 어떤 처벌을 가했는지는, 혹은 면책되었는지는 기술된 내용이 없어 알 수 없다.

결국 김포군수로부터 학대를 받아오던 김포 백성들이 왕의 부모능 방화를 통해 자신들의 어려운 상황과 김포군수의 폭정에 대해 고발하려던 의도는 위 내용만으로보면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신하들이나 왕은 왕릉을 지키지 못한 관리들의 처벌로 끝내거나 이것마저도 흐지부지 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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