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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ㆍ효자ㆍ열녀의 고장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23)

부모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허벅살을 네 번 베어서 먹인 효자아들
오랑캐 청군에 능욕을 당하느니 온 가족 12명 순절
“내가 먼저 죽어 나의 남은 수명 남편 수명 잇게해 달라”부인자결

조선시대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정려(旌閭)라는 제도가 있었다. 정문(旌門)이라고도 한다.
정려는 국가에서 효자(孝子)ㆍ순손(順孫)ㆍ의부(義夫)ㆍ절부(節婦)와 행실이 바른 사람을 표창하기 위해 그 동네나 집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세우던 붉은 문을 말한다.
마을에는 정문(旌門)을 세워 포창하고, 복호(復戶)로써 그 집의 부역(賦役)을 면제했으며 나아가 벼슬을 주기도 했다.
세종 13년(1431)에는 고금의 충신ㆍ효자ㆍ열부(烈婦)에 관한 사실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로 편집해 냄으로써 풍속을 장려하고 백성을 교화하고자 했다. 

김포지역은 전통 충효세가(忠孝世家)의 본향으로서 특히 충ㆍ효ㆍ열의 정려가 많은데 여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인조 14년(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의 영향이 크다 하겠다. 당시 인조대왕은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남녀 귀족들을 강화도로 피난시킨 후 자신도 건너가려 했지만 이미 길이 막혀 부득이 길을 변경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된다.

두 왕자와 비빈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김포지역의 주민들도 함께 따라서 피난하였다가 강화도가 청군에게 함락되자 대부분 청군의 포로가 되거나 능욕 당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한 끝까지 항전하다가 청군에게 피살되어 충신이나 열녀가 많게 된 것이다.

김포지역에 국왕으로부터 하사된 정려가 정확하게 몇 개인지는 파악할 수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것을 중심으로 김포지역의 충신과 효자 및 열녀를 살펴보고자 한다.(대표적인 내용 몇 가지만 설명하고 나머지는 지면관계로 명단만 소개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김포지역의 정려에 대한 첫 기록은 중종 14년(1519) 12월15일자 기사다. 이 기사의 내용은 “경기 김포현(金浦縣)에 사는 김기정(金奇貞)의 아내인 양녀(良女) 수덕(水德)이 산골짜기에 갔다가 어떤 사람에게 강박당했으나, 한사코 항거하다가 마침내 살해되었다. 이 일이 문달(聞達)되니, 정문(旌門)을 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 일은 훗날 1530년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열녀(烈女)’편에 “조선, 덕수(德水) 김기정(金奇貞)의 아내이다. 나이 19세에 길에서 사나운 놈을 만났으나 끝내 몸을 더럽히지 않고 죽으니 금상(今上) 15년에 정려가 내려졌다”고 기록됐다.

또한 중종 38년(1543) 12월22일자 기사는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홍섬(洪暹)이 왕에 올리는 계본에 “<중략>김포(金浦) 사는 유학(幼學) 홍한인(洪漢仁)은 13살 때에 어미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하며 염장(鹽醬)을 먹지 않고 죽만 먹으며 몸소 제물을 가지고 조석으로 곡하면서 잔을 바치고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아비가 병을 얻었는데, 허벅살을 네 번 베어서 아비를 먹였으나 끝내 효험을 얻지 못하고 죽으니, 모든 전례(尊禮)를 시종 초상 때와 같이 하고 삼년상을 마친 뒤에는 시집가지 않은 누이를 때맞추어 혼인시키되 가난한 데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예문(禮文)대로 하였습니다. 동기간에 재산을 나눌 때에 가산(家産)을 죄다 나누어 주었고, 두 누이의 전민(田民)(전택(田宅)과 노비(奴婢)임)은 누이들 스스로 선택하게 하였는데, 다시 제 전민을 선택하여 요구하면 자기 것이라도 그들이 바라는 대로 문서를 고쳐서 주었습니다”라는 계본에 따라 왕이 정문을 허락하였고. 또한 명종 19년(1564) 윤2월2일자 기사는 “<중략> 김포(金浦)의 사비(私婢) 자근금(者斤金), 나이 16살에 그 아버지가 고창병(鼓脹病)(헛배가 땡땡하게 부른 병)을 만나 죽게 되자,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태워서 재를 만들어 가지고 술에 타서 드리니 한참 후에 병이 나았다고 정문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정문을 내린 김포지역의 충신(忠臣)을 살펴보면 먼저 경정공(景靖公) 인백(仁伯)의 장남으로 김포군 하성면 봉성리에서 출생하여 음직(蔭職)으로 충좌위(忠佐衛) 부사직(副司直)이 된 민성(閔?)을 말할 수 있다.

인조18년 경진에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와 12정려 충신 정성지문을 하사했다. 왜 12정려를 내렸는가는 민성을 포함하여 전 가족 12명이 순결을 했기 때문이다. 정려인 정성지문은 하성면 전류리에 있다.

민성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모든 가족과 함께 강화에 들어가 아들 삼형제와 의병활동 중 강화성이 함락하자 전등사 모퉁이에 있는 토실에서 모든 가족이 목을 매 자살했다.

순절한 이들은 장남 지곽(공조참판을 증직하고 충신 정려했다), 삼남 지핵(참군을 증직하였다), 사남 지익(참군을 증직하였다), 장남 지곽 부인 이씨(李氏), 삼남 지핵의 부인 김씨(金氏), 사남 지익의 부인 유씨(柳氏), 이녀(二女) 처녀, 삼녀(三女) 처녀, 사녀(四女) 처녀, 장녀 최여준(崔汝峻)의 처(妻), 소실 우씨(小室 禹氏), 서누이(庶妹) 소동(蘇仝)의 처이다.

그밖에 정려를 받은 충신은 강위빙(姜渭聘), 심척(沈?), 윤계(尹啓), 양지(梁誌), 조수헌(趙守憲), 조탁(趙濯) 등이다.

정려는 한 문중에 한두 분이 받아도 문중 전체가 영예로 알고 타 문중에서는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하물며 한 문중에 6대 13정려를 받은 문중이 있다.

바로 연안이씨 문중인데 현존하고 있는 연안이씨 문중에 충신 2명, 효자 7명, 열녀 1명, 절부 3명의 13정려를 한 건물의 각을 지어 봉안하고 있다.(감정동 나진교 방향 왼쪽소재) 13위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각 내용은 생략한다)

절부(節婦)(절개를 지키는 부인) 안씨(安氏), 효자 이지남, 절부 정씨(鄭氏), 효자 이기직(李基稷), 효자 이기설(李基卨), 효녀 이씨(李氏), 충신 이돈오(李惇五), 열녀 김씨(金氏), 충신 이돈서(李惇敍), 절부 이씨(李氏), 효자 이후잠(李后潛), 효자 이후성(李后晟), 효자 이상기(李相琦)이다.

효자로 정려를 받은 김호신(金好愼)은 경주김씨로 중종 38년(1543)에 하성면 시암리에서 출생했다. 선조대왕이 선조 34년(1601) 공에게 효자 정려를 시암리 샘말에 내렸다.

김숙(金塾)은 고종 28년(1891) 조봉대부 동몽교관을 증직하고 예조에서 정려의 포전을 입안 효자정문을 세웠다. 그 밖에 효자 정려를 받은 인물은 양익선(梁益善), 이능문(李能文), 조여학(趙汝學), 이씨(李氏)가 있다.

열녀(烈女)로 정려를 받은 사람은 이씨(李氏), 홍씨(洪氏), 민씨(閔氏), 안씨(安氏)가 있다.
이씨는 족친위(族親衛)(조선 시대에 둔, 임금의 먼 친척이나 인척으로 구성한 군대)로서 병자호란에 강화성에서 비빈을 보위하던 심정부의 처 이씨로서 강화성이 함락되고 남편인 심족친위가 적군에게 사로잡히자 이씨는 패도(佩刀)로 목을 질러서 자문(自刎)하여 인조 16년(1638)에 김포군 장기리 고창에 열녀 정려가 내렸다.

홍씨는 김중정의 처 남양홍씨로 열행을 하여 철종6년(1855)에 열녀정려가 세워졌다.

민씨는 자헌대부 호조판서 평양조씨 세발의 처이다. 여흥민씨 봉(烽)의 딸로 효종 3년(1652) 9월10일 출생하였으며 부덕을 갖추어 평소 시모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았다.

부군 판서공이 2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3년 동안 의복을 갈아입지 않았으며 머리도 빗지 않고 조석으로 상식을 올릴 때나 겨우 손만 씻었으므로 벼룩이 모이고 이가 생겨 피부병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갖은 예절에 맞추어 정성을 다 받쳤다.

대상일 돌아오자 여러 동서들을 모아 놓고 “이미 공의 대상도 지나고 궤연까지 거두었으니 이제 내 뜻을 결단하리라”하고 열흘동안 단식한 후 향년 31세로로 자진하니 향리의 모든 사람들은 경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숙종대왕이 이를 알고 정려를 내렸다. 정려는 감정동에 소재한다.

안씨는 무의공(武毅公) 평양조씨 심태(心泰)의 처이다. 죽산 안씨 병사 윤정의 딸로 영조 12년(1736) 9월24일에 출생하였다. 부군의 신환이 매우 위중하자 “내가 먼저 죽어 나의 남은 수명을 공의 명에 잇게 하여 달라”고 천지신명에게 지성껏 빌고 아무도 모르게 정조 23년(1799) 8월 6일 자진하였다고 한다.

“옛적에 남편을 따라 죽은 사람은 혹간 있었으나 자신의 수명을 남편 수명에 이어주기 위해 자결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며 순조 1년(1801) 정문을 세우고 이를 본받게 하였다고한다. 정려는 감정동에 소재하고 있다.

   
 
 
 
이렇듯 김포지역은 충신과 효자 및 열녀가 많이 배출된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이제 이들의 정신적 가치를 오늘에 되살려내는 일이 우리 후대들의 과제일 것이다.

김포시에서 김포를 알릴 수 있는 관문설치를 준비하고 있다. 김포를 지나가는 타 지역의 사람들에게 김포를 알리려는 노력은 이해하나 오히려 우리 김포 시민들이 지역의 자랑스러움을 스스로 다짐하는 상징물이어야 한다고 본다.

기왕에 김포를 알리는 관문을 설치한다면 김포의 역사적 가치를 드러내는 내용을 그 상징물에 새겨 넣으면 어떨까 싶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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