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이 필요해서 조명기구 전문점에 갔다. 주인이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곳에 무엇인가를 사러온 사람이 물었다. “어쩌다 그리되셨어요?”.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내리다가 물건이 넘어오면서 다쳤어요”. “아이구, 만약 그 물건이 쇠나 유리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염려를 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힘든 사람에게 더 공포를 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가만히 물건을 사가지고 오면서 생각을 해보니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말들이었다. 유리나 쇠가 얼굴로 쏟아지는 상상을 해보라!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나는 ‘만약’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이라는 말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상상이나 판단, 비난, 절망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근거 없는 희망을 바람 넣은 풍선처럼 불어대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만약’이라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지는 오래됐다. 어릴 때 우리 아버지는 내가 무엇인가를 조금 잘 한다 싶으면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아이구 만약 저것이 아들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지금 나는 여성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데 조금도 억울해하지 않는다. 만약 남자였다면 얼마나 단조로운 옷차림과 사회적으로 강요당하는 무거운 틀 안의 삶을 살았을까?

여성으로 치마폭 넓게 펴고 안아줄 수 있는 사람 다 안아주며 치맛자락 넓게 살아 좋다. 긴 머리카락 빗어 넘기며 화장할 수 있는 것도 좋고 내 속으로 낳은 자식하고 소통하는 것도 더 긴밀하고 잘 된다는 것을 알겠다.

오죽하면 “여성은 다 하느님을 알게 되게 되어있다”고 신학자 한 사람이 말했었다. 여성의 몸은 창조의 섭리를 몸소 실천하는 잉태와 출산의 경험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근거를 갖는다고 말이다.

정말이다. 어미가 되어보면 자식이 아프면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같이 체험한다. 한 사람의 아픔을 똑같이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이 신의 마음이다. 한 인간을 길러내면서 나 자신이 같이 성장해가는 길이기에 축복이다. 그러므로 나는 절대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만약 내가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이라면서 부부간의 불화를 이야기하는 것도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암이라는 경험을 통해 현재 남편이 나 아닌 다른 여성과 결혼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니 남편이 다르게 보였다.

“만약 내가 구제해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뻔 했어?”라고 으쓱해 할 근거가 없었다. 나 없어도 이 사람은 살아가야 하고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방식에서 더 잘 살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러므로 무엇이나 크게 잘해주는 것 같이 “만약… 어쩌구 저쩌구” 할 필요가 없다. 만약이라는 상상보다는 현재 내게 오는 것을 모두 다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이라는 상상속의 임금님 밥상이 무슨 소용이 있나? 고추장에 풋고추 찍어 물 말아 먹을지언정, 오늘 여기서 살아서 먹는 모든 밥은 생일 밥이다. 스스로를 믿고 흔들림 없이 자신을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만약이라는 허구나 상상으로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만약이라는 상상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실체가 아닌 이상 내가 선택한 사람과 내가 선택해서 사는 오늘이야말로 최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 때로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묵묵하게 걸어가는 기도도 필요하다.

오직 흔들림 없는 정진과 사랑에 충만한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세상이 만들어낸 틀에 나를 맞추지 않고 내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으며 씩씩하고 소신있게 살아가는 힘, 그것은 ‘만약’이 아니다.  

오직 나에게 온 것 까지만 받아들이고 오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미련도 상상도 하지 않고 온전히 오늘을 끌어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유인봉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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