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한국의 시민운동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이래도 비난받고 저래도 비난받는다. 어떤 일을 하면 왜 그렇게 백화점식으로 일하냐고 비난하고 안 하면 또 왜 그런 일 안 하냐고 비난한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고 비난하는 그 사람은 막상 시민단체의 회원이 아니기 일쑤다. 정권의 홍위병이라고 하다가 때로는 왜 정권을 비판만 하냐고 비판한다. 영락없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누인 길손의 운명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운동가 박원순 변호사가 저서『한국의 시민운동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당대)의 머리말에서 한 지적이다. 현재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다.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여성단체연합…. 이들이 NGO(Non Govermental Organization)다. 비정부기구면서 비영리 기구로 시민사회의 공공선을 지향하면서 시민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를 의미한다. 현대는 'NGO의 시대' 또는 'NGO의 르네상스시대'라고 부를 만큼 NGO들이 우리 생활 가까이 있고 사회적 위상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최근에는 NGO대신 시민사회단체(CSO)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다. NGO가 ‘비정부기구’라는 뜻으로 모호한데다 환경, 경제정의, 여성, 빈민구제, 노인 등 전문화되고 있는 시민단체의 활동영역을 포괄하지 못해 시민단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와 상대해 적극적으로 국가권력을 견제하고 시민권리를 옹호하는 CSO가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CSO(시민사회단체)는 Civil Society Organization의 약자다. 

시민사회가 1990년대 이후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글로벌 시민사회다. 글로벌 시민사회의 태동은 세계화에 따른 지구적 정치균열의 등장에 대응한다. 헬싱키 시민평화포럼을 주도하는 메어리 칼도어는 민족국가 시대의 ‘좌파 대 우파’의 균열선에 ‘일국주의 대 세계주의’의 새로운 균열선이 중첩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근대 국민국가가 일국주의 프로젝트에 주로 머물러 있었다면 시장과 시민사회는 세계주의적 우파와 세계주의적 좌파의 기획에 이미 진입해 있다. 글로벌 시민사회를 세계주의적 좌파와 단순히 동일시할 수 없지만 국가와 시장이 배제해 온 지구적 차원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글로벌 시민사회를 주도하는 것은 지구적 NGO다. 이 규모는 1981년에 1만3천개 정도였지만 2001년에는 4만7천개 이상으로 증가했다.

국내에서 최근 시민운동에 대한 논란이 많다. 원래 경실련이 처음 시민운동을 할 때는 실사구시적 대안 모색, 정치적 중립 등의 철학과 방법론을 내걸고 기존의 재야운동과 명확히 선을 그었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재야운동이 간판을 바꾸어 시민운동에 재합류하고 386세대가 시민운동의 실무를 장악하면서 크게 변하게 됐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시민운동이 합리적 대안 모색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기보다는 한편에 치우친 문제 제기에 더 힘을 쏟았고 이로 인해 갈등 조정자가 아닌 갈등 촉발자로 국민에게 비쳐지게 됐다.

둘째, 진보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 열중하다보니 노동자, 농민의 집단이기주의 표출을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침묵하거나 편드는 길을 택했다.

셋째, 노무현 정부 이후 주류 시민단체들은 권력비판 기능을 상실하고 권력을 함께 나누어 갖는 길로 나아갔다.

넷째, 진보적 시민운동은 미국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비판적이었고 반면에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특히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침묵은 진보의 명분을 크게 훼손시켰고 나아가 보수운동이 커지는 명분을 제공, 보수-진보의 양극화를 초래했다.

다섯째, 겸손하게 국민과 함께 하기보다는 국민 위에 군림하며 권력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민단체는 지난 10년간 사실상 숨겨진 권력실세였다. 김대중 정부 출범을 눈앞에 둔 1998년 1월 김대중 당선인은 시민단체연합 신년 하례식에 참석,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시민단체 신년하례식에 대통령 당선인이 참석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8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시민단체와의 유대를 강조했다. 이에 발맞춰 경실련 등 시민단체 출신들이 청와대 경제수석과 농림부 장관 등에 임명되고 각종 대통령 자문위원회에도 거침없이 진출했다.

김대중 정부는 이어 2000년에는 비영리민간단체 지원법을 만들어 시민단체 100여 곳에 연간 75억 원의 사업비를 배정했다. 정부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제도권에 들어선 시민단체는 이후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시민단체들은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적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2002년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지자 250여 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범국민대책위원회는 연일 촛불집회를 벌였고 수십만의 시민이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당시 촛불집회가 대선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시민단체는 김대중 정부와 상호협력 관계를 형성하면서 제5의 권력으로 자리 잡아갔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시민단체를 국정운영의 한 축으로 흡수했다. 노무현 대통령 인수위는 전문위원 이상 고위급 인사 55명 중 10명을 시민단체와 노동권 출신으로 채웠다. 헌정 사상 최초의 탄핵정국이 촛불시위로 봉합된 직후인 2004년 5월에는 청와대 비서실에 시민사회수석실이 신설됐다. 시민단체들은 즉각 청와대가 시민사회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며 크게 환영했다.

국내 시민단체의 대표격인 참여연대는 지난 10년간 정부 두뇌의 산실 역할을 했다. 전현직 임원 416명 가운데 36.1%인 150명이 청와대와 정부기관 등에 진출했다. 김영삼 정부 시기에는 22석(7%)에 불과했던 참여연대 출신 인사들이 김대중 정부 113석(36.1%)에 이어 노무현 정부에서는 158석(50.5%)까지 팽창했다.

그러나 지난 2월 보수적인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시민단체들은 변혁의 갈림길에 섰다. 가장 직접적인 요인 중 하나는 정권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례가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폐지다. 권력과 시민단체가 만나는 통로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는 결국 보수정권과 진보좌파적 시민사회단체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1970년대의 반독재 운동, 1980년대의 사회주의적 민중운동의 흐름에 이어 1990년대에 태동했던 시민운동은 2000년대 진보좌파정권 수립과 함께 대거 정계에 진출했지만 이제는 과거와 전혀 다른 정치 환경에 휘말리고 있다.

2개월 이상 이어진 서울 도심의 촛불집회는 문화행사의 성격을 떠나 정치집회로 보수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진보의 조직적인 저항으로 분석된다.

이제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던 보수인사들도 진보에 맞서 단체를 결성하고 집회와 시위를 전개하면서 시민단체는 어느새 사회갈등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기존의 시민운동은 권력에 대한 감시를 통해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가 거의 완성된 지금, 시민단체들은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직면해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분배와 친북은 진보, 성장과 친미는 보수로 보고 있다. 친북반미는 한국 진보좌파의 슬로건이자 행동방향이다. 이에 따라 국가보안법 폐지와 한ㆍ미FTA협정 반대를 가열차게 주장해 왔다.

지난 정부에서 장관까지 지낸 한 지식인은 TV에서 진보의 반대말은 파시즘이라고 주장했다. 군사정부가 반공과 민족 도약을 지상 목적으로 삼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를 통제하던 독재체제 말이다. 대한민국 보수의 가장 큰 숙제는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이러한 보수의 이미지들을 걷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서유럽과 미국에서 보수의 원류는 자유주의다. 서양이 과학과 경제에서 동양을 압도하고 세계 최초의 ‘선진화’에 성공한 것은 이 자유주의 덕분이라 생각하고 있다. 선진국의 문턱에 선 한국에서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보수의 정신은 국가주의를 극복한 자유주의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순수와 도덕성이 생명인 시민단체답게 스스로 자정 능력을 회복하고 시민을 위한 시민운동을 해야 한다.

그동안 시민운동이 겪어온 길에는 비난도,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은 여기에 있다. 국민을 위한 정치, 투명한 행정, 지배구조가 개선된 기업활동, 소비자의 주권과 유권자의 권리가 실현된 사회, 삶의 질과 인간다운 삶이 보장된 사회, 이 모두가 시민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이며 시민운동이 존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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