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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책선에 의해 사라진 김포의 옛나루터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19)

철책선에 의해 사라진 김포의 옛나루터

한강하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과거 물류의 거점으로 활용했던 한강 등의 나루와 포구의 활용 가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배가 드나드는 곳을 포구(浦口)라고 부른다. 지명중에 포(浦)자가 들어있거나 곶(串)자가 들어있는 지명에는 배가 드나드는 곳이었음을 말한다. 나루는 한자표기로 도(渡;건널도), 진(津;나루진) 또는 도진(渡津)으로 설명한다. 도(渡)는 주로 관용 나루를, 진(津)은 주로 민간 나루를 가리켰다.

김포지역의 나루터는 대부분 과거 수상교통 시대의 거점으로 삼국시대 또는 고려․조선시대부터 교역이 활발해 상권이 번창한 곳이 많았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둘로 갈라지면서 대부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철책선 안에 갇히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월곶면지역 나루터

   
  ▲ 월곶면 조강나루. 멀리 보이는 산 아래 왼쪽지점 논이 마주친 곳이 조강포였다.
 

월곶지역의 옛나루터는 6곳이다. 조강리에 ‘조강나루’, 용강리에 ‘강녕나루’, 성동리의 ‘산성나루터’, 보구곶리의 싸렴(추여)나루, 고양리의 ‘원모루나루’, 포내리의 ‘대나루’이다.
 
조선왕조실록 속에 김포지역의 나루터에 대한 첫 공식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 “통진현” 편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조강나루’와 ‘강녕포’이다.

“조강은 현 북쪽에 있다. 나룻배가 있다”

   
▲ 1950년 한국전쟁으로 조강마을이 포구에서 소개된 후 마을주민이 기억으로 1945년 당시조강포 마을지도를 그렸다.
 

이 조강나루터에 대한 또 다른 기술은 <대동지지>이다. “통진현” ‘진도(津渡)’편에 “조강진(祖江津) 북쪽으로 13리에 있다. 개성으로 통한다”고 소개하고 있으며 <동국여지승람> ‘통진’편에서는 조강나루터를 ‘도진’으로 소개하고 있다.

“조강도(祖江渡) 고을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한강과 임진강이 이 강에서 합해진다”

조강나루터 이외 용강리에 있는 강녕포도 소개하고 있는데 조강포나루 보다 자세하다.

“강녕포(江寧浦) 북쪽으로 15리, 조강의 아래쪽에 있다” ‘도서’ 편에 “유도(留島) 강녕포 앞에 있는데, 서쪽으로 연미정(燕尾亭)과 대치하고 있다. 주선이 경유하여 정박하는 곳이다”

또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설치한 한국통감부가 1908년 간행한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에도 조강포와 강녕포를 소개하고 있다.

“통진군 북측으로는 대안(對岸)의 풍덕군에 이르는 도진이 2곳 있는데, 하나는 조강포고, 다른 하나는 강녕포다.

이 두 포구의 전면은 한강 및 임진강의 공통 하구로서, 강폭은 광대하지만 양우(兩雨)에는 물흐름이 급격하여 물살이 잠잠해질 때가 아니면 도선이 불가능하다. 또한 이 두 곳에는 배가 지나갈 수 있는 물때를 기다리기 위해 계류하고 있는 배가 많다”

강녕포와 조강포는 물흐름이 빨라 물때를 맞춰 대기하는 배가 많은 나루임을 전해주고 있다.

월곶면의 다른 나루터는 고양리의 ‘고양포(高陽浦)’라 불린 ‘원머루나루(원루포(遠陋浦))’이다. 원머루나루는 고양리 안말 서쪽 1㎞로 정도의 거리에 있고 염하수로에 연해 있는 포구마을이다. 원모루, 원포, 원동 등으로도 부른다. 예전에는 강화의 화도를 오고가는 나룻배가 있었다.

 

   
  ▲ 월곶면 고양리 원머루나터 자리. 멀리 보이는 산아래 왼쪽이 포구였다. 오른쪽 둑(방죽)은 간척지를 만들기 위해 세운 방죽(둑)이다.

포내1리 포내(浦內)마을이다. ‘대나루’라 하는데 한 개, 호개라고도 부르며 한 개, 호개가 큰나루의 뜻이므로 대나루가 큰나루의 뜻임을 알 수 있다. 포내포(浦內浦)로 불린다.

또 성동리의 ‘성동나루터’를 들 수 있다. 이곳은 1970년 강화대교가 건설되기 전 김포 강화간 도선을 위해 사용하던 나루터로 조선시대 문신 박신(朴信)이 13년 동안 통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사재를 들여 축조한 선착장으로 세종14년에 완성되었다.

또한 보구곶리(甫口串里)에 싸렴(추여), 머무루섬이라는 유도(留島) 섬이 있는데 이곳으로 배가 드나들던 싸렴나루터가 있었다. 싸렴나루는 미도진(米嶋津)으로 불렸다.

   
  ▲ 월곶면 성동리 갑곶나루석축로. 세종때 이조판서 박신이 선공감 관리의 부정에 관련되어 13년 동안이나 통진현(通津縣)에 유배되었다가 갑곶나루터를 석축으로 세웠다.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월곶면 위곡리(개곡리) 교항포(橋項浦) ‘다리목기’가 소개되고 있다. 개곡리에 다리목기라는 나루가 있었음을 자료는 전하고 있는데 조강포구에서 조수가 밀려와 ‘밀다리’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개곡천을 말한다.

개곡리 지명은 일제가 ‘개야리’의 개자와 ‘위곡리’의 곡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이 나루는 조강포구까지 가기 위한 작은 나루가 아닐까 싶다. 

양촌면지역 나루터

양촌면 지역의 옛나루터는 2곳이다. 대포리의 ‘대포’와 유현리의 ‘나루세기’이다.

김정호의 <대동지지> ‘통진현’편에 ‘대포’가 소개되어 있다. “대포(大浦)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김포 가현산을 나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대포는 지금의 양촌면 대포리(大浦里)를 말한다. 이곳은 ‘향모포(香毛浦)’라 불러왔다.

대포1리는 향동(香洞)이라 했고, 대포2리는 황포(黃浦)라 불렀다. 그러나 이곳 모두가 서해안 지역 매립으로 포구가 사라졌다.

   
 ▲ 대포는 양촌면 대포리(大浦里)를 말한다.‘향모포(香毛浦)’라 불렀다. 대포1리는 향동(香洞)이라 했고, 대포2리는 황포(黃浦)라 불렀다. 이곳 모두가 서해안지역 매립으로 포구가 사라졌다.

향모포는 <조선지지자료>에도 통진군 상곶면(대포리) 향모포리에 소재하고 있음을 전해주고 있다.  향모포리는 ‘상무지’로 불렀으며 나루터를 ‘상무지나루’로도 불렀다.

또한 양촌면 유현2리 서현마을이 한강 조수가 드나들었고 배를 대던 나루터였음을 알려주는 명칭이 있는데 ‘나루세기’라 부른다. 서현마을 앞에 예전에 큰 개가 있었는데 그곳을 ‘나루세기’라 불렀고 나룻배를 이용하다가 ‘괸돌다리’를 놓은 다음부터는 ‘괸돌개’라 불러왔다고 한다.

 

 

  ▲ 양촌면 유현2리 서현마을이 한강 조수가 드나들었고 배를 대던 나루터였음을 알려주는 명칭이 있는데‘나루세기’라 부른다.


대곶면지역 나루터

대곶면 지역의 옛나루터는 7곳이다. 대벽리의 ‘어모루포구’와 ‘북동메’, 송마리의 성포, 신안리의 덕포, 쇄암리 나룻개(바삭바위)나루터, 대명리의 ‘대명포구’, 약암리의 ‘적암나루터’이다.

대곶면 대벽5리 어호(漁湖)마을 즉 ‘어모루포구’가 있었다. 이 마을은 예전 서해의 간척사업을 하기 전에는 이 일대에서 가장 큰 포구였다. 예로부터 ‘어모루’라 불렀다. <조선지지자료>에 어모노리포(漁毛老里浦)(어모루기)는 통진군 대파면(대곶면) 어모노리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기잡이가 시작될 때인 정월 초 사흗날 마을 뒷산인 당재에서 용왕재를 지내왔다.

또 어모루 앞 500미터에 섬이었던 북덕도(北德島)가 있다. 이곳은 제방을 막아 섬이었던 것이 내륙의 낮은 등성이가 됐다. ‘북동메’라 부른다. 이 곳은 조감(潮減)(초8일, 23일)때 포구로 사용되던 곳이다


그림  송마리 성포마을의 조구나루터가 있던 곳

송마2리 성포(城浦)마을의 ‘조구나루터’를 말할수 있다. 예전에 조깃배가 드나들던 포구였다고 하며 ‘조구나리’라고도 부르는데 집 한 채가 있었다고 한다. 쇄암1리 구룡촌(龜龍村)마을의 ‘나룻개’ 나루터이다. 구룡촌의 해변마을로 예전 강화도의 광성진으로 건너가는 나루가 있었다.

그림  배가드나들던 박순터. 덕포

<조선지지자료>에는 ‘바삭바위나루’라 기록되어 있다. 나룻개의 안쪽은 안나룻개, 바깥쪽은 바깥나룻개라 부른다. 신안1리 덕포(德浦)마을의 포구이다. 예전에 포구가 있어서 인천이나 서울로 향하던 운반선, 어선들이 기착했기 때문에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림  쇄암리 바삭바위나루터(나룻개)로 불리던 곳

덕포는 조선왕조실록 선조(1597) 25년에 영의정 유성룡이 수군 강화책을 상소한 내용중에 덕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수군이 주둔하는 포구였음을 알 수 있다.

대명3리 한정(寒井)마을 포구이다. <조선지지자료>의 <포구>편에“전막(全幕)이 대명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바 이것이 이 마을 이름으로는 처음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전막(全幕)은 점막(店幕)이다. 즉 예전에 음식을 팔고 나그네를 유숙시키는 집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 대곶면 대명리 대명항(대명포구)에서 '풍어제'를 매년 개최한다.

 

식사하는 곳을 ‘한바’라 하고 이것이 ‘한정(停)’이 되었다가 ‘한정(寒井)’으로 쓰인것이 아닌가 한다. 대명나루, 대명포구, 전막, 점막, 점막개로 부른다. 최근 대명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대곶면 약암1리 마을의 ‘적암(赤岩)포구’이다. ‘붉은배’로 불리운다. 변성퇴적암의 색깔이 붉어 인근의 토양이 모두 붉은색을 띄운다. 붉은배 적암으로 부르는 이 바위는 거북의 형상을 한 큰바위였으나 풍화되어 많이 부서졌다. 바로 바위 앞이 포구였다.

하성면지역 나루터

하성면 지역의 옛나루터는 6곳이다. 하성면 석탄4리 곡촌동(谷村洞) 마을이다. ‘풀막’이라고 하는데 가작동(후평리) 남쪽 한강변 산부리 지역을 말한다.

그림  석탄리 풀막주막이 있던 느티나무 뒤편 나루터

한강의 제방이 없던 예전에 이 마을까지 배가 드나들었는데 배를 대고 술을 마시던 주막으로 현재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다. 그 앞의 논은 ‘풀막주막’이라 부른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강감동주막(江甘東酒幕)’이라 기록하고 ‘풀막주막’이라 고유지명을 달았다.

시암2리 영촌(鈴村)마을이다. ‘개머리’라 하는데 감바위에서 동북편 등성이 너머에 있는 강과 접해 있던 산부리였으나 제방을 쌓았다. 예전에는 배가 닿던 포구였다.

마곡2리 신기(新基)마을이다. ‘나룻개’라 했는데 안골 서쪽에 있던 예전의 개(浦)이다. 다음으로 마근포(麻近浦)을 말할 수 있다. ‘마근개’라 하는데 부엉바위산 서남쪽에 있는 마근개 마을로 예전에는 포구로 큰 마을이었으나 6.25전쟁 후 현재의 ‘마음두’로 마을 전체가 이주하였다.

여기서 ‘마음두’는 '신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이곳 나루는 강건너 개풍군 임한면 정곶리 사이를 왕래하던 곳이었다. 옛날 ‘마근포’라 부르던 곳이다.

하사1리 중촌. 하사2리 사포(蛇浦)마을이다. ‘배다리’리라 하는데 하사교 앞의 들에는 예전에 갯골이 있어서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배다리라 부른다. 그 일대의 들을 ‘배다리개’라 했다. 옛지명 사포(蛇浦)가 현지의 지명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봉성1리 상동. 봉성2리 하동마을이다. 봉성리 주막터가 있었다. 현 배수펌프장 위 길섶에 있던 예전의 주막터로 차씨라는 사람이 최후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조선지지자료>에도 봉성리 주막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였음을 알 수 있다.

전류1리 내촌(內村)마을의 ‘전류정나루’이다. 낭모뎅이 안쪽에 있던 예전의 나루터이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이 나루와 함께 전류리 주막도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인적의 왕래가 빈번했던것 같다.

북변동지역 나루터

북변동 지역의 옛나루터는 1곳이다.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읍전포(邑前浦)’ (읍읍기)라는 이름의 포구가 북변리(동) 있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당시 위치는 김포군 군내면 북변리이다. 현재 읍전포가 있던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걸포동지역 나루터

걸포동 지역 옛나루터는 2곳이다. 걸포동 돌방구지라는 곳이다. 신향마을 동쪽 고새기 동산의 부리가 계양천과 맞닿은 곳으로 바위덩어리들이 능선에서부터 계양천까지 연이어 있었다. 지금의 걸포 다목적체육관(배드민턴)이 위치한 곳이다. <조선지지자료>는 이곳에 ‘암우포(岩隅浦)’(밤모퉁이기)라는 포구로 배가 드나들었다고 전해주고 있다..

또한 걸포리 동쪽 지금의 제방도로 부근에 섬이 있었다. 오염(五念), 고도(孤島), 독도(獨島)로 불렀다. 마을이 있었으나 을축년(1925년)에 없어졌다. 이곳에서 고양군 이산포로 가는 나룻배가 기착하는 나룻터가 있었다.

감정동지역 나루터

감정동 나진교(포) 지역에 나루터가 있었다면 믿을까 싶다. 나진교는 다리를 놓은 다음부터 쓰기 시작한 지명이고 그 이전부터 사용해 오던 명칭은 ‘나진포’였다. 나진교 아래로 흐르는 나진포천은 조수가 드나들기는 하지만 하사리, 즉 매월 보름과 그믐때만 배가 출입할 수 있기 때문에 ‘낮은개’로 불려오다가 음이 유사한 한자지명인 나진포가 되었다.


사우동지역 나루터

사우동(沙隅洞) 지역의 옛나루터는 2곳이다. 사우동은 조수가 드나들던 한강변에 위치한 까닭에 개펄에 모래가 많이 쌓여 ‘모래모퉁이마을’이라 했다. 모래모퉁이마을을 한자명으로 한 것이 사우동이다.

사우동의 마분교(馬糞橋)가 있던 자리의 포구이다. 지금의 사우지역 건영아파트 뒤편으로 흐르는 계양천 다리를 말한다. 일명 양수장 다리라고 했는데 이  다리밑이 암반이 있어 포구로 사용되었다.

육로로 말을 타고 이곳에 도착해 선편을 이용하게 되므로 이곳에다 말을 매어놓다 보니 말이 똥을 싸 마분, 그곳의 다리를 마분교라 불렀다.


<조선지지자료>에 ‘소평포(小坪浦) (소풀기) 나루가 고현내면(풍무리) 신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신리는 지금의 개양천 가기전 농어촌공사 수로다리(사우교)이다.

운양동지역 나루터

운양동 지역의 옛나루터는  2곳이다. 운양1리(천현마을) 감바위 나루터이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감암포’로 기재되어 있다. 감바위나루에서 고양군 이산포나 서울 마포를 오가던 나룻배가 정박하던 곳이었고 광복이후까지도 ‘감바위 주막’이 운영되었다.

감바위가 있는 산의 이름은 ‘감박산(해발35m)’이다. 이곳 감바위에서 중봉 조헌선생이 우국충정을 달래며 낚시질을 했다는 감바위 전설이 서리어 있다.
 
운양4리 대촌(大村)마을의 ‘운양나루’가 있다. 위치는 지금의 용화사와 앞 삼거리에서 직전 왼쪽지점이다. 예전 절말(지금의 용화사 아래마을)에 있던 나루로 나루가 기능을 잃은 현재도 지명은 여전히 운양나루로 남아있다.

예전에는 서울 마포나루와 파주군 법곶리를 왕래하던 나루터였다. 소구모 어선의 기항지로 사용되었다.

고촌읍지역 나루터

고촌읍 지역은 옛나루터가 3곳이다. 고촌읍 풍곡리 지역의 섶골나루(나룻개)는 ‘신동진(薪洞津)’(섶골)으로 불린다. 신동(薪洞)은 풍곡4리 마을로 소애, 큰말, 웃말로도 불린다. 임진왜란때 행주산성 싸움을 당하여 왜국의 전선(戰船)이 이 마을쪽 산밑 강을 지날 무렵 주민들이 장작에 불을 붙여 산 아래 강을 지나는 왜선에 던져 불살랐다하여 ‘장작마을’이라는 뜻에서 ‘섶골’이라 했고 이를 한자지명으로 신동(薪洞)으로 썼다고 한다. 한강제방을 막기전에는 한강물이 이 마을까지 올라와 배를 대곤 했으므로 배대이(渡船場)라고도 불렀다.

고촌 신곡양수장이 조성된 한강쪽의 섬으로 백마도(=오유도(梧柳島))가 있다. 옛 문헌에는 ‘박말도(朴抹島)’로 기재되어 있어 배가 드나들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전호리 마을의 ‘향주진(香洲津)’이다. ‘향쥬나루’로 불린다. <조선지지자료>에는 향쥬나루가 위치가 임촌면 전호리로 설명한다.

전호리는 제진리로도 불렸는데 옛 문헌의 지도나 읍지에는 제진리를 ‘제진도(濟津島)’라 기록하고 있다. 제진도는 ‘나루를 건너는 섬’의 뜻으로 한강 제방이 들어서기 전에는 전호리가 섬의 형태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통진읍지역 나루터

통진읍 지역의 옛나루터 흔적은 4곳이다. 통진읍 도사 1리 속사(束沙) 마을이다. 예전 한강에 제방이 없던 시절 한강의 조수가 이 마을 앞까지 밀려와 물결이 출렁거릴 때마다 땅이 패어나가 모래를 섬에 담아 묶어서 토사의 유실을 막아서 속사(束沙)라고 했다고 전해온다. 따라서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수참(水站)리는 예전의 역참(驛站)으로 문헌에 기록된 바는 없으나 한강에 제방이 없던 시절 한강의 조수가 이 마을까지 드나들었기 때문에 나룻배를 이용해 고양, 마포 등을 통행했는데 조수관계로 물참을 맞추느라 역처럼 쉬어가던 곳이라 하여 수참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가현1리 가진포(佳辰浦)마을이다. 옛 지명 ‘가진개’는 이 마을 앞까지 한강조수가 밀려왔기 때문에 붙인 이름으로 ‘가진포’로도 불렀다. 동을산1리 갑곶마을이다. 아랫말 남쪽의 곶이다. 예전에는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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