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김포역사 김진수의 김포역사이야기 실록을 펼쳐 김포를 말하다(2013)
‘갑곶나루’는 김포에 없다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16)

강화를 가려면 김포시를 관통하는 48국도를 지나가야 한다. 지금은 대곶면 대명리에 초지대교가 건설되어 강화 가는 방향이 두 곳으로 확대되었지만 초지대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강화대교를 건너야만 가능했다. 그렇지 않으면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데 김포반도를 둘러싼 철색선에 가로막혀 배를 탈 수 없다. 

지금의 강화대교 이전에 또 다른 강화대교가 1969년에 건설된 다리가 있다. 지금은 새로운 대교로 인해 사용하지 않는다. 이 사용하지 않는 대교 이전에 강화를 건너기 위한 나루터가 있었다. 두 곳으로 하나는 1920년대까지 사용해 왔던 나루터인데 일명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다.(사진참조)

다른 하나는 1920년 이후 사용하던 나루터로서 강화군의 신정리와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를 오고가던 나루터다. 이 나루터는 강화군 갑곶리와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를 잇는 강화대교가 1965년 7월 착공하여 1969년 12월에 준공된 후 폐쇄됐다. 일명 구강화대교라 불린다. 그러나 이 대교도 노후되어 새로운 강화대교를 1993년 8월에 착공하여 1997년 12월 준공 후 사용하지 않는다.

1920년대까지 강화를 오고가던 일명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나루터는 왜 김포지명에 없는 강화도 지명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이 부분이 이 글에서 궁금해 하는 내용이다.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는 하나가 아니라 같은 이름이 두 개다. 하나는 강화군 갑곶리에 있는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다른 하나는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에 있는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다. 하나의 이름으로 두 지역에 나루터가 존재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곳은 같은 이름으로 김포쪽 나루터는 1988년 3월21일자로 김포시 시도 기념물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강화쪽 나루터는 1995년 3월1일자로 강화군 시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포쪽 이름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강화쪽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는 지명과 일치된 이름을 가진 것으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 실제 갑곶리라는 지역명칭이 있으며 이곳은 갑곶진이 설치되어 있고, 갑곶돈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김포지역의 나루터 이름을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로 명명하고 있는 것일까?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라는 나루터가 기술된 김포지역 관련 모든 문서(자료)에는 이같이 기술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강화지역 갑곶리에 있는 나루터 이름을 왜 김포지역 나루터에서 똑같이 사용했을까?

우선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는 언제 만들어졌는지부터 찾아보자.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를 만든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26년 윤7월 12일자 기사 ‘전 이조판서 박신의 졸기’에 기술되어 있다.

“<중략>통진현(通津縣)의 서쪽에 갑곶(甲串)이라는 나루가 있었는데, 오고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물속을 수십보(數十步) 걸어가야 비로소 배에 오를 수 있고, 또 배에서 내려서도 물속을 수십 보 걸어가야 언덕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릴 때면 길 다니는 나그네들이 더욱 고통을 당하였는데, 신(信)이 재산을 의연(義捐)하고 고을 사람들을 이끌어 양쪽 언덕에 돌을 모아 길을 만들었더니, 길 다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공로를 힘입고 있다고 한다. 아들이 있으니, 이름을 종지(從智)·종우(從愚)라고 한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 없이 이용되었다가 1419년 이조판서였던 박신(朴新.1362(공민왕)-1444(세종26)이라는 사람이 사비를 들여 14년간 석축로 공사를 완성(1432)하여 약500년간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박신은 고려 말과 조선총의 문신으로 자는 경부(敬夫), 호는 운봉(雲峰)이라 한다. 본관은 운봉이며 정몽주의 문인이었다. 1385년(우왕11) 문과에 급제, 사헌부 교정을 거쳐 예조, 이 조의 정랑을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봉상사소향, 감문위대장군겸사헌중, 좌산기상시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또 대사헌, 한성부윤, 동북면도술문찰리사, 공조, 호조,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나 선공감의 부정사건에 관련되어 13년 동안 통진현에 유배되었다가 1432년(세종14) 풀려나왔다. 월곶면 한재당을 지나 가좌동 마을을 지나쳐 동쪽으로 직진하면 가금리로 들어가게 되는데 마을입구의 좌측 산비탈에 동쪽을 향해 묘역이 마련되었다.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의 이름에서 ‘갑곶’이라는 지명은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를 말한다. <갑곶>이란 지명은 고려 고종 때 몽고가 침입하자 왕이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었을 때 이곳이 강 건너와의 거리도 짧고 얕아서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 놓고 건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후 정묘호란 때 인조 임금이 건넜던 사실이 있고, 1637년(인조15) 병자호란 당시에는 봉림대군에게 항복하기를 재촉하였던 곳이며, 1866년(고종3)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 전함이 이곳에 상륙하여 강화도를 점령하였고, 1876년(고종13) 일본의 구로다 기요타카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수호조약을 체결하기위해 이곳에 상륙하였던 곳으로 역사상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렇듯 강화에 있는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를 왜 김포지역에도 같은 이름을 사용한 것일까? 이에 대한 역사적인 근거를 찾아보자.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10권) <통진현(通津縣)> <산천>편에 “갑곶진(甲串津) : 현 서쪽 9리 지점에 있다. 강화부에 건너가는 나루이다”와 <역원>편 “갑곶원(甲串院) : 갑곶 언덕에 있다”로 기술되어 있으며 <대동지지> <성지>편에 “문수산성 : 문수산성의 서쪽 성인데, 갑곶진(甲串津)에 닿았다, 자세한 것은 강화에 보임”과 <진도>편 “갑곶진(甲串鎭) : 서북쪽으로 10리인데 강화에 보임, 도포진(島浦津)”으로 기술되어 있는 내용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으로 보면 어느 곳에서도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즉 갑곶나루가 지금의 김포시 월곶면에 있는 나루터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대동지지>의 <성지>편에 문수산성을 설명하는 부분 즉 “문수산성의 서쪽 성인데 갑곶진에 닿았다”라는 표현이 갑곶나루가 김포지역에 있다는 내용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뒷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김포지역에 있는 나루터를 강화에 있는 나루터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두 가지로 추측을 해볼 수 있다. 하나는 실록에 있는 내용대로 “통진현의 서쪽에 갑곶이라는 나루가 있었는데, 오고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물속을 수십보 걸어가야 비로소 배에 오를 수 있고 <중략>”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는 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 기술된 내용을 근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통진현의 서쪽에 갑곶이라는 나루가 있었는데’라는 문장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즉 통진 지역에서 서쪽에 염하강에 석축으로 된 나루터가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이곳이 갑곶나루터로 이해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두 번째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 기술된 ‘문수산의 서쪽 성인데 갑곶진에 닿았다’라는 내용을 근거로 문수산성 서쪽 끝자락에 석축로로 된 나루터가 있으므로 또한 갑곶나루터로 이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앞서 밝힌대로 이조판서였던 박신이라는 사람이 석축로 공사를 14년 만에 완공했다고 밝혔다. 바로 이 석축로 공사는 김포 성동리에 있는 석축로만 공사한 것이 아니라 강화 갑곶리 석축로, 즉 두 곳에 석축공사를 14년 동안 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강화의 갑곶나루터를 가기위한 김포지역의 나루터인 것이다.

따라서 김포지역의 일명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로 부르고 있는 옛 나루터는 김포고유지명을 딴 나루터 명칭으로 변경되어야 한다. 나루터가 있는 장소가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 지역임으로 이곳을 ‘성동리 나루터’로 혹은 박신이 사비를 들여 만들었으므로 그를 기념하여 ‘박신의 나루터’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저작권자 © 미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진수 발행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