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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덕포진’은 다른곳에 있다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⑮

경기도가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 107번지 일원의 덕포진 주변지역 26만5540㎡를 15번째 관광지로 지정, 고시했다.

도는 덕포진 관광지 조성계획을 수립, 2010년까지 사업비 1200억원을 들여 수도권 내 새로운 관광거점지로 개발할 계획이다. 관광지에는 역사문화 체험장, 박물관, 전시장, 펜션 빌리지, 가족휴양촌, 전망대 등 다양한 시설을 설치, 주변의 대명항 함상공원, 조선 왕릉묘역인 장능, 안보 관광지인 애기봉 등과 연계해 관광벨트를 구축한다는 복안이다.

그러나 관광지로 개발계획중인 지금의 ‘덕포진’이라 불리는 곳은 실제 ‘덕포진’이 아니다. 현재 덕포진이라고 불려지는 포대가 발견된 장소와 역사적으로 당시 진(鎭)이 설치된 ‘덕포’ 장소가 다르다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우리가 알고있는 덕포진이라고 하는 곳은 엄밀하게 말하면 ‘안행동포대’로 불려져야 하고 진이 설치된 덕포지역에 대해 이제라도 발굴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실제 ‘덕포진’은 지금의 덕포진이라고 불려지는 위치에서 약 2키로미터 정도 북쪽방향에 존재한다. 더 구체적으로 지도상으로 말하면 부래도라는 섬 앞이 바로 진(鎭)이 설치된 ‘덕포’라는 포구마을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의 포대가 발견된 곳이 ‘덕포진’이라고 불렸졌을까? 추측되는 점은 1980년 포대를 발견할 당시 이곳에서 포대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덕포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것이 아닌가 한다. 왜 이곳이 덕포진이 아니고 ‘안행동포대’라고 해야하는지를 문헌적으로 찾아보고 실제 덕포진에 대해서 알아보자.

역사적 문헌으로 찾아본 본래 ‘덕포진’
본래 덕포포구에 설치된 진(鎭)에 대해서 가름할 수 있는 문헌적 근거는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8년(1616년)5월 7일자 기사이다.

이 자료는 “<중략> 往在先王朝, 新設 德浦於 江華, 地必有意 <중략>”(왕재선왕조 신설덕포어 강화, 지필유의)” 이를 국역하면 “지난 선왕조 때에 강화 땅에다 덕포(德浦)를 신설한 것은 필시 생각이 있어서였을 것인데” 라는 내용을 통해 덕포진이 선조때 설치된 진(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진(鎭)’이라함은 군사상 중요한 지역에 설치한 지방 행정 구역을 말한다. 진은 돈대[墩臺](평지보다 높직하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라고 부르기도 한다. 

1871년에 제작된 <김포읍지>에 보면 “수첩군관 : 4명, 대전 8냥 8전, 덕적진:수군 49명, 대전 98냥, 덕포진:수군 38명, 대전 76냥, <중략>”에 덕포진에 주둔하는 수군이 38명이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통진읍지>(1694년 부로 승격된이후) <진보(鎭堡)> 편에 “덕포진에는 수군첨사(水軍僉使) 1인이 있는데 수영(水營)에 소속한다. 관문에서 남쪽 20리 거리에 있다.<중략>” 고 기술되어 있고 <통진부읍지>(1871년 9월 현재) <창고(倉庫)> 편에 “<중략>손돌목에는 포를 매설하고 군기고 3칸이 안행동(현 신안2리 마을로 안냥굴, 안앙굴, 안항, 안항동, 안항리로도 불렀다)에 있는데 신미년에 새로 지었다”고 되어 있으며 <진보(鎭堡>편에는 “덕포첨사(德浦僉使) 1인은 총어영(摠禦營)에 속한다.

방선(防船)이 2척이고 병선은 1척이며 사후선(伺候船)(수영(水營)에 속하여 적의 형편이나 지형 따위를 살피는 데에 쓰던 전선(戰船))이 3척이다. 객사(고려 조선 시대의 숙박시설로, 객사(客舍)라고도 함. 외국 사신이나 중앙과 지방의 사신이 왕래할 때 묵거나 혹은 왜인이나 야인(野人)들이 무역을 행할 때 이용된 곳)가 3칸이고, 내외진사(內外鎭舍)가 9칸이고 3문과 행랑이 아울러 10칸반이고 어변정(禦變亭)이 10칸이다.

신미년에 중건한 군기고(무기고)가 3칸인데 진옆에 있다. 포사들의 파수청(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고 포병을 지휘하는 곳)이 4칸인데 손돌목에 있다. 솔하군관(率下軍官)은 3인이고 이예(吏隸)가 9인이다. 소속 수군은 본부에 316인 김포에 38인 부평에 64인 장단에 9인인데 군포를 받아 진졸(鎭卒)에게 요(料)로써 지급한다. <중략>”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듯 덕포진에 대한 역사적 설명은 그 문헌이 다양하며 덕포진은 수군과 육군의 역할을 다했던 포구에 설치된 진(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덕포진에 대한 구체적인 위치를 알수있는 것이 위 통진부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용역보고서. 덕포진이라고 기술된 위치는 잘못 표기한 것이다. 그림 위쪽 부래도 섬 앞이 본래 덕포진이다
 

위 그림내용 중 ‘부래도’라는 섬 바로 앞부분에 ‘덕포진’이라고 명칭이 기술되어 있는 곳이 본래 덕포진 장소이다. 그런데 용역보고서 그림중 덕포진이라고 표기된 위치는 본래 손돌항(손돌목) 위치에 잘못표기하고 있다.

그러면 1980년대 발견된 지금의 ‘덕포진(포대)’은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설치되었는가를 찾아보자.

 조선왕조실록 고종11년(1874년) 11월 20일자 기사에 이에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자료는 ‘통진 경계의 안행동 등에 포대를 설치하게 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로서 영의정 이유원이 임금에게 경기 암행어사가 별단을 올린 사항에 대해 보고하는 내용으로 시작이 된다.

내용인즉슨 암행어사가 ‘통진 경계의 안행동에 진(鎭)을 설치하는 것의 편리여부를 강화 진영에 물었다’는데 해당 수령의 보고는 ‘암행어사의 논의가 틀린것은 아니지만 덕포가 가깝게 있으니 덕포진의 진장이 망을 겸해서 보는 일이 좋으며 안행동을 비롯한 여러곳에 별도의 포대를 설치하는 것이 진을 설치하는 것보다 더좋다’는 의견이니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영의정 이유원이 ‘해당 수령의 장계의 내용이 좋은 의견이니 진을 설치하지 말고 포대를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하니 왕께서 윤허하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다시 요약하면 이미 덕포진이 설치되어 있으니 안행동에 진을 설치하는 것보다는 별도의 포대를 설치하는 게 더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덕포진처럼 진을 안행동에 설치하려 했지만 포대를 설치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본래 덕포진과 포대는 각각 다른 진지였다는 사실이다. 덕포진은 덕포에 설치된 진이었고 포대는 안행동에 추후 설치된 포대라는 점이다.

따라서 본래 덕포진과 포대가 설치된 지역은 따로 존재했던 것이고 포대가 설치된 동네이름이 안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덕포진 포대는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와는 관계없다
김포군 지명유래집 389쪽에 보면 덕포진 포대를 설명하는 내용중에 ‘덕포진포대 전투를 설명하면서 고종3년(1866년) 병인양요때 별군관 이기조(李基祖)의 지휘로 철수하는 프랑스군을 요격한 것과, 신미양요때인 1871년 미국해병대가 기함 콜로라도 등 5척의 전함, 대포 80문, 병력 1230명으로 통상을 거절한 조선조정을 공격하려 한강어귀로 향하는 것을 이곳 포대와 강화의 광성보, 덕진에서 발포하여 퇴각시킨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병인양요는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을 말한다. 또한 신미양요는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을 말한다. 

이 두사건이 발생한 년도는 1866년과 1871년이다. 하지만 안행동에 포대가 설치된 때는 1871년에서 3년이 지난 1874년에 포대설치를 허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덕포진 포대는 오히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사건을 통해 포대설치 필요성이 제기되어 뒤에 설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덕포진에서 두 양요의 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다면 지금의 덕포진이 아니라 부래도 앞에 설치된 덕포진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된다. 따라서 지금의 덕포진이라고 하는 곳에서 포대가 발견되었지만 병인양요때 전투가 벌었졌다면 본래 덕포진에서도 포대가 기 설치되었있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하겠다. 그러므로 본래 덕포진이 설치된 지역을 발굴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하겠다. 지금까지의 발견된 포대주위지역을 더 확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덕포진과 지금의 덕포진 포대
그렇다면 ‘덕포진’과 ‘덕포진 포대’는 어떤 관계인가? 결론적으로 1980년대 처음 포대를 발견할 당시 이름을 잘못명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역사적으로 덕포에 진이 설치되어 ‘덕포진으로 불리고 있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덕포는 신안1리에 위치하고 있다. 위치상으로 보면 덕포진 건너편에 부래도라는 섬이 하나 있다. 이 부래도 섬과 덕포진는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포대가 발견된 곳은 현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신안2리에 위치하고 있다. 안행동이라 불리는 마을이다. 덕포진과 포대위치 거리는 약 2키로 정도 떨어져 있다.

고종 8년(1871년)에 집필된 <통진부읍지>의 <창고(倉庫)>편에 “손돌목에는 포를 매설하고 군기고 3칸이 안행동에 있는데 신미년에 새로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덕포진과 발견된 포대의 이름은 달리 불려져야 했었다. 덕포진이 본진이라면 포대가 발견된 안행동 포대는 OP개념이거나 포대의 전략상 본진과 떨어져 있는 챠리포대 기능일 것으로 보인다.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안행동포대’이어야 하며 덕포진 본진과 구별해야만 할것이다.

조선후기 통진부 지도에도 뚜렷이 덕포진이 부래도 앞에 표기되어 있으며 지금의 덕포진포대가 발견된 곳은 포청과 군기고 표시가 되어 있다. 또한 손돌목이라 불리는 위치도 손석항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아래 그림참조) 덕포진에도 무기고 터가 발견되었고, 안행동 포대 부근에서도 무기고가 지도상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무기고가 2개이며 포대도 각각 존재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 통진부지도
 

조선왕조실록 고종11년(1874년) 11월 20일자 기사에서 강조한 것처럼 이미 덕포진이 설치되어 있으니 또다른 진을 설치하는 것보다 별도의 포대를 설치하는 것이 현실적인 일이라고 여겨 안행동 즉 지금의 신안2리에 포대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이미 수군이 활동하고 있는 덕포진과 달리 포대를 설치하였으므로 포대이름이 달라야 마땅한 것이다.

지금의 덕포진이라 불려지는 곳을 관광지로 개발한다면 본래 덕포진에 대해 발굴작업에 착수해야만 한다. 본래 덕포진을 발굴하지도 않은채 덕포진 아닌 지역을 덕포진이라고 개발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맞지 않는 행위이기도 하고 사실과 다른 지역이므로 바로잡아야 할것이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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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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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광지 2008-05-07 20:18:59

    덕포진 관광지 개발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합니다.   삭제

    • 진짜로 2008-05-01 01:13:11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이 그렇다면 당연히 발굴하고 이름이 잘못불려졌으면 당여히 원상회복시켜야 한다고 보는데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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