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
문수산에서, 친구에게살며 생각하며|최철호(청석학원 원장)

   
지난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거실에 등산용 바지, 윗옷, 양발을 내놓고 잠자리에 들며 혼자 슬며시 웃었다네. 선거가 끝나고 모처럼 아침시간이 한가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느긋한지 귀한 손님이 찾아온 듯 잠시 감정이 출렁이더라구. 지난 겨울 내내 일주일에 두번씩 매번 거르지 않고 오르던 문수산의 진달래나무 옆을 지날 때마다 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었으니 정말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기분이 이럴꺼야.

자넨 늘 내가 늦은 나이에 뭔 정치판을 기웃대느냐고 비아냥대지만 난 그래도 사람들 속에서 부딪치고 감정을 교감하는 번잡함이 늘 싫지 않다네. 하지만 그런 번잡함 뒤에 언제나 내속의 것들을 묵언으로 되집어 보는 즐거움이 없다면 그런 번잡함 또한 먼지 나는 길 위를 걷는 것에 불과할 것일세. 내가 이렇게 급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오자마자 자네에게 글을 쓰는 것은 문수산 꽃소식을 전하려는 것이네.

모란각 식당 앞에 도착해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니 내 차 앞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더라구. 그 내용을 정확하게 옮길 수는 없지만 "모란각 주차장이니 밥을 먹지 않는 사람은 주차하지 마라 또는 밥을 먹으면 주차해도 된다" 뭐 대강 그런 것이었네. 음… 드디어 주인께서 인내력의 한계를 드러낸 것인지 아님 장사가 얼마나 안 되면 저런 심통이 발동할 것인가 싶었네. 사실 새벽시간에 산에 오르는 등산객들 주차 때문에 영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건만 이제 주인은 장사에 도움이 안 되는 차량의 번거로움에 짜증이 났나 싶었다네.

솔밭 길을 오르자 드문드문 연분홍 물감의 옅은 안개를 드리운 듯 진달래꽃의 운무가 보이더니 오를수록 만개한 진달래꽃들이 내게로 달려와 나를 얼싸안듯 반긴다. 그도 그럴것이 지난 겨울 마른 가지만으로 밤새 찬바람으로 견디던 너희들에게 새벽마다 내가 안부를 물어주었으니 그럴법하지 않은가. 정상까지 오름이 몇 번인지 십여년 전에는 살펴보지 못했지만 요즘은 늘 오름을 세면서 오른다네. 첫 번째, 두 번째… 이렇게 내 나름으로 열한 번쯤 오르면 정상에 오른다네.

네 번째 오름을 올라 능선에 서니 키 큰 참나무 새잎들이 푸른 싹으로 구름을 덮듯 산능선을 감싸고 그 아래층에 연분홍빛 진달래의 운무가 그 아래층에 융단처럼 깔리었다네. 그리고 말이다 그 아래 낙엽사이로 작은 아기별꽃, 제비꽃, 먼저 피었다 꽃잎을 떨군 노루귀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네. 오늘 문수산은 새벽안개가 바람을 타고 비냄새를 풍기며 산을 감싸고, 성벽 끝에 유달리 진홍빛인 진달래꽃들은 꽃잎을 일찍 떨구고 있었네. 아마 그 낙엽위에 떨어진 진홍의 꽃잎을 보면 자네도 처연함을 느낄꺼야. 동백꽃이 질 때 송이채 떨어지듯 진달래도 꽃송이채 떨어지더라구, 아주 냉정하고 결연하게.

그래도 내가 요즈음은 자네가 하던 어록들을 되짚어 보며 웃곤 한다네. 최근에 내게 한 말 중에 가장 근사한 말이 뭔줄 아는가. 내가, 자네가 대한민국에서 성공한 사람 중 한명이 될 거라고 부추겨주자 자네 왈… "내가 과거에는 잘나가는 삼류였는데, 이젠 아류로 살기로 했네" 여전히 자신을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자네가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이젠 나도 아류려니 해도 아무렇지 않을 법 싶네. 아마 삼류건 아류건 그건 우리 몫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몫일까 싶네. 겨울 칼바람을 이기고 묵묵히 능선을 지켜 꽃을 피운 저 진달래꽃의 군무를 보면 우리 삶의 무게가 무에 그리 대단할까 싶기도 하네. 그래서 내 오늘 산에 오르며 자네가 스스로 아류라고 치부하고 내가 내 자신을 아류라고 치부해도 너그러워지는 걸세.

   
꽃길을 따라 오르며 친구를 생각하고, 그 옛날의 그리움들이 모퉁이마다 새록새록 거리고 언덕이 아득한 오름 위에 진달래꽃 무더기 진홍빛이 내가 고등학교 시절 방학을 하고 시골집으로 돌아올라치면 날 기다리던 어머니의 분홍저고리처럼 울컥거리는 그리움들이 있었다네. 이토록 많은 내안의 사연들이 새벽안개와 비내음에 젖은 푸른 바람, 진달래꽃의 군무 속에 어울어지니 이 새벽길이 얼마나 황홀한지 네게 이 문수산 꽃소식을 전할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 난 오늘 자네 말을 새기며 정상에 거의 다 올라 정상을 오르는 계단을 세고 정상비를 한번 쳐다보고 막상 정상을 오르지 않고 그냥 내려왔네, 자네가 스스로 아류라 칭하던 그 겸손함의 성찰이 내게 닿았다는 것을 표하기 위해서.

최철호  opulent3@naver.com

<저작권자 © 미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철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2
전체보기
  • 분홍립스틱 2008-04-22 15:13:04

    피천득님의 대표수필'인 연'.언젠가 감동깊게 읽었던 수필입니다.그때 가슴속 깊이 저미는 아릿한 감정 그대로. 본 수필을 읽는 내내 가슴시린 아린 여운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그때 그기분이 새롭게 다시 일었습니다.최철호님의 한편의 이 글이 아릿한 기분과 함께 잘 정제된 십분간의 철학강의를 들은냥 감동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글을쓰시고 마음이 넉넉한 분은 착한 심성의 소유자라 할수 있습니다.그 따뜻한 마음처럼 세상을 보는 눈이 선하게..이 사회를 리더하시는 첨병이 되실거라 믿습니다.글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삭제

    • 오류 2008-04-19 16:16:05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