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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숨결이 숨어 있는 월곶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⑭

지난호에는 월곶면 고양리 태봉산의 태실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김포에 공주의 태가 고양리의 태봉산에만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2곳이 더 있다. 공교롭게도 지역내 3개의 태가 묻혀 있는 곳은 모두 월곶면으로 고양리와 고막리, 조강리에 태실이 존재한다.

고막리에 있는 태실은 지금의 조각공원에서 용강리 방향으로 직진해 문수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 오른쪽에 있는 해발 100미터 남짓한 낮은 산 정상부에 있다. 일명 태봉산이다.

태봉산 정상부를 가보면 빽빽이 소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평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다.

태실비는 정상에서 마을쪽인 남쪽으로 5미터 남짓 지점 사면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나 태실은 이미 도굴을 당해 훼손돼 있었다. 비석도 대좌에서 뽑혀 아래로 굴러 내려져 있었으나 이마저도 누군가 손을 대 지금은 없어졌다.

처음 발견할 당시 비석은 연화형 비갓을 한 돌에 새긴 것으로서 연봉은 떨어져 나갔었다고 한다. 비석면도 일부 훼손되어 비문역시 일부 글자는 판독이 불가능하다. 비석전면에는 ‘王00阿只氏胎室’(왕00옥지씨태실) 정도가 판독되었고 뒷면에는 1584년(萬歷14年12月初6日立)(만력14년12월초6일립) (1584년, 선조17), (萬歷14年12月初6日改立)이라는 2행의 명문이 있고 장태(藏胎)(태(胎)를 안치(安置)하여 묻는 일)한 시기와 개립(탑이나 기념물 따위를 고쳐 세우거나 다시 세움)한 시기가 명시돼 있었다. 크기는 비갓(비석의 머리부분)62×18×32㎝, 비신(碑身)(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은 116×49×14㎝였다고 한다.

비석 대좌(臺座)(상(像)을 안치(安置)하는 대(臺))는 네 면에 안상(眼象)(안상연에 새겨진 눈 모양(模樣)의 장식(裝飾))과 복련(覆蓮: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밑단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다. 대좌와 130㎝ 떨어져 있는 화강암제 개석(蓋石)(무덤을 조성할 때 석실 위에 덮는 한 쪽이나 두 쪽으로 된 방형(方形)의 석재(石材). 혹은 비석 등을 세울 때 위에 지붕형태로 만들어 그 위에 얹는 돌)도 기울어진 채 2/3가량 지표에 노출되어 있었다.

개석 둘레에 22×22㎝ 크기로 자라머리 형태의 돌출부를 만들었는데 다른쪽이 땅에 뭍혀 전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네 기둥이 모두에 이런 돌출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지름이 102㎝이다.

나머지 하나는 조강리 저수지에 붙어있는 태봉산이다. 태봉산 정상부 10평 정도의 좁은 평지에 태함(胎函, 石函)과 태실비(胎室碑)가 남북선상에 위치한다. 현재 태실비는 동쪽을 보고 있으며 태실비 뒤쪽에 태함이 있다. 태실비는 연봉을 갖춘 연화형 비갓과 몸돌을 한 몸에 만들었으며 방형 대좌를 갖추었다.

태실이 있었을 곳에는 반구형 석재가 일부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태실의 개석처럼 보이나 사실은 바닥에 있던 받침돌이 올라온 것이다. 주변 마을의 주민에 따르면 개석(蓋石)(무덤을 조성할 때 석실 위에 덮는 한 쪽이나 두 쪽으로 된 방형(方形)의 석재(石材). 혹은 비석 등을 세울 때 위에 지붕형태로 만들어 그 위에 얹는 돌)은 오래전에 마을에서 방앗간 절구로 사용했다고 한다. 여기도 이미 도굴되어 움푹파여 있다.

비석 명문은 크게 훼손되어 판독이 어렵다. 건립시기를 타나내는 뒷면도 긁힘과 자연적인 마모로 판독이 불가능하다. 전면에는 ‘0000阿只氏胎室’(0000옥지시태실), 뒷면에는 ‘嘉靖貳拾三年0月000癸時0’(가정이십삼년0월000계시0)인데 판독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가정23년’이라함은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를 말하는 것으로서 가정 원년은 조선 중종 17년(1522)에 해당한다. 따라서 가정23년은 1544년(중종39년)을 뜻한다. 중종때 장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선원록>(璿源錄)(조선시대 왕실 족보의 하나)을 통해 보면 인순공주(仁順公主)의 태실로 파악된다. 인순공주는 중종의 셋째딸로서 문정왕후(文定王后)와의 소생이다. 시집가기전에 일찍 죽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비석의 크기는 비갓이 가로62㎝, 두께 20㎝, 높이45㎝, 비신이 높이 84㎝, 너비41㎝, 두께 15㎝, 대좌 가로95㎝, 두께52㎝, 높이42㎝이다. 태실부 함몰 지름 250㎝, 석함이 노출된 곳과 태실비와는 210㎝ 떨어져 있다. 석함 높이 60㎝ 추정지름 70㎝이다.

우리나라에 있어 태를 봉안한 최초의 기록은『삼국사기(三國史記)』의 김유신의 장태(藏胎)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고려의 왕실에서 태봉안 양식(胎奉安 樣式)이 성립된 후 조선시대까지 그 맥락이 이어진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태봉(胎峰)에 태를 봉안하기 위한 석물구성은 우리나라에서만 행해졌던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화라 할 수 있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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