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꿈적 않고 지내던 지인이 모처럼 밥을 사겠다고 연락이 왔다.

‘밥이야 아무나 사면 어떠랴!’ 겨울 내내 틀어박혀 지내더니 이것 저것 느낌도 많고 깨달음도 많아졌다. 밥 먹으면서 그이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이 귀에 잘도 들어왔다. 왠지 많이 부드러워진 그의 모습이 좋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소위 “백일기도”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석달 열흘, 자신이 고요하게 침잠해 있는, 멈추어진 것 같은 겨울 내내 그 긴 기간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무언가 보이지는 않지만 에너지는 돌고 돌아야 하고 때로는 밝음만이 아닌 어두움이 필요하다. 동굴에서 백일기도를 통해 인간으로 거듭났던 곰처럼 어쩌면 우리도 동굴 하나씩이 필요한 것이 사실 아닐까?

겉으로는 웃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은 매일 매일이 펄펄 끓어대는 용광로다. 이성으로 찍어 누르고 살고 있지만 사실은 ‘괴성 같은 울부짖음’이 우리의 저 깊은 골짜기에는 가득 고여 있기도 하다.

불만, 분노, 슬픔 등 언제 어디서 흘러들었는지도 모르는 에너지들이 가득차면 겉으로 표출되는데 그것은 이상한 양상을 띠고 괴물이 되어 나오곤 한다. 아주 합리적인 얼굴이나 가려진 모습으로 내 곁의 생명들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으로 말이다.

사실 겉과 속이 다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속 따로 겉 따로 노는데 우리의 이상한 병들이 생기는 거다. 본질이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인생, 정말 그렇게 긴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도 입 따로 몸 따로 논다. 정말 완벽할 수는 없다고 해도 자신의 인생을 그림 감상하듯이, 화초 들여다보듯이, 멀찍이서 좀 관찰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은혜에 속한다.

자신의 몸조차도 사실은 내 소유가 아니라고 간절히 느낀 적이 있다.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내 몸 조차도 놓고 가면 누군가가 ‘치워주어야 할 것’이었다.

잠시 내 몸을 내 몸 밖에서 쳐다보고 있는 나를 상상하자 나와 몸에 대한 관찰이 새로워졌다.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내 몸조차 아닌 것을 알면서 우리는 그다지 연연하는 삶의 한 가운데서 엉뚱한 소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우리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갈 때는 마음하나 가지고 가는 거 아닐까? 생전에 소유하던 부와 명성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이야 말로 마음일 것이다.

이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소위 엄청난 부자인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어찌나 바쁜지 정말 잠시 전에 약속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며칠이 지나서야 생각이 난다니. 내가 바라보는 그 친구에게는 동굴이 없다.

날이면 날마다 조직이 많고 만날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날마다 술을 푸고 그리고 다음날 이리 저리 골프를 치러 가는데 그것도 지겹단다. 그렇게 부자들이 되기를 소원하는데 그 꼭대기에 올라가 앉아 있는 사람이 하는 소리는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움직임 없는 가운데 땅 저 밑에서 올라오는 어떤 조용하고도 기운찬 기운이 자신을 돌아돌아 운행하도록 돌아보고 돌아볼 일이다. 무한한 행복과 지혜, 자비가 가득한 인생은 논리나 싸움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흐르는 바로 자연스러운 그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단지 하얀 쌀밥만이 아니라 동굴이라고 생각한다면 잠시라도 눈을 감고 돌아볼 일이다. 그것이 바로 잠시라도 가볼 수 있는 어둠이고 동굴이다.

‘지금까지 즐겨서 한 일은 무엇이었나?’, ‘이 생명이 다하도록 이루고자 했던 목표는 무엇이었나?’,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분노했을까? 그 분노와 그 사람을 안고 죽을만큼 중요했을까’를.

왜냐하면 허상들에 목매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작품 감상하듯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렇게 ‘목마르는 샘’을 파느라 너무 분주할 필요도 없다. 누구를 가르치려 하거나 나의 신념을 그대로 이입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오직 모든 것을 바라보며 그리워할 수 있음만이 행복이다.

‘천지만물은 나와 더불어 조금도 차이가 없는 오직 하나의 생명이다’라고.

유인봉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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