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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만에 축성된 김포 ‘문수산성’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⑪

김포의 대표적인 산성이자 유일하게 현존하는 성곽은 월곶면 성동리에 있는 문수산성(文殊山城)으로 해발 376미터 문수산 등성에 있다. 문수산은 비솔산(比率山), 비예산(比晲山), 통진산(通津山)으로도 불린다. 김포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문수산성은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문수산성 둘레는 15리 129보에 석축(화강암)이며 살받이 타(垜)가 1,273첩(堞), 문루가 3처, 암문이 3곳인데 1곳만이 남아있다. 성문은 취예루(取豫樓) , 공해루(控海樓) 등 3개소의 문루와 3개소의 암문(暗門)(성벽에 비밀히 뚫어놓은 문. 또는 성벽에다 누(樓) 없이 만들어 놓은 문)이 있었다. 이 중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에서 육지로 오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1866년 일어난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 120명이 9월 18일 문수산성을 공격해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해안쪽 성벽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어 없어지고 문수산 등성이를 연결한 성벽만이 남아있다. 성의 총 둘레는 6,201미터이고 면적은 6,400평에 이른다.

문수산성의 축조는 병자호란(1636년) 때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 봉쇄당해 강화도로 파천하지 못하여 남한산성에서 청국에게 삼전도(병자호란 때 수항단(受降壇)를 쌓고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곳이며, 청나라의 전승비(戰勝碑)이기도 한 삼전도비(三田渡碑)로 더 알려져 있다)의 치욕을 당한 이후 강화도와 연결되는 길목인 통진의 갑곶나루에 대한 군사적인 대비가 요구되어 강화도 도강의 길목인 문수산 서쪽 산록에 산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김포의 문수산성 축조과정을 추적해 보자.
 
실록을 살펴보면 문수산성을 세울 것을 처음 제안한 사람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숙종 1년(1675년) 4월 28일자 기사에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이 강화도 형세를 돌아보고 임금에게 보고를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략>또 통진의 문수산은 강도(江都)(강화도)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중략>만약 조그마한 성을 문수산에 쌓아서 웅거하여 지킨다면 적이 오고 가는 것을 피리를 불고 기를 휘둘러 통지할 수가 있습니다<중략>”

그러나 숙종 4년(1678년) 10월 23일자 보도에는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와 부사직(副司直) 이원정(李元禎)이 강도(江都)를 순심(巡審)하고 돌아와서 곧 지도(地圖)와 서계(書啓)를 올리면서 “<중략>문수산(文殊山)에 축성(築城)하기를 의논한 자도 또한 터무니없는 계책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대역(大役)이 또 시작됨으로서 한데 아울러 거사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니, 아직은 먼저 승도(僧徒) 중 사리를 자세히 아는 자를 모집(募集)하여, 절 하나를 산 안의 천맥(泉脈)(땅속에 있는 샘 줄기)이 있는 곳에 설치하여 요후(瞭候)를 숙련하게 하고, 기계(器械)를 간수(看守)토록 하여, 다시 1, 2년을 기다렸다가 약간 재력(財力)이 저축되면, 반드시 축성할 계책을 하여야 마땅합니다”라고 아직 때가 아님을 제안하게 된다.

그러나 숙종 7년(1681년) 5월 21일자 보도를 보면 강화유수(江華留守) 이선(李選)이 상소(上疏)하면서 별단(別單)을 붙여 바치고 편의(便宜)(형편이나 조건 따위가 편하고 좋음)를 조목별로 진계(陳啓)하면서 다음과 같이 상소한다. “<중략>덕진(德津)은 김포(金浦)·부평(富平)으로 하여금 그때 그때에 임하여 입보(入保)하게 하고 문수산(文殊山)에도 그 봉우리에 성을 쌓아 통진(通津)으로 하여금 그때 그때에 임하여 입보(入保)(보(堡) 안에 들어와 보호를 받음. 수보(收保))하되, 겸해서 요망(瞭望)(높은 곳에서 적(敵)의 형세를 살피어 바라봄)하기에 편하게 하고, 갑곶이[甲串] 수유현(水踰峴) 위에도 좌우로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그때 그때에 임하여 들어가 수어(守禦)하게 해서 미처 건너지 못하여 뒤에서 막는 곳이 되게 하소서<중략>” 라며 문수산에 성곽을 쌓을것을 건의한다.

또한 숙종 8년(1682년) 8월 23일 기사는 강화유수(江華留守) 조사석(趙師錫)이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쌓도록 청하자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우의정(右議政) 김석주(金錫胄)가 찬성을 하자 임금이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 어영대장(御營大將) 김익훈(金益勳)에게 문수산 형편을 살펴보게 한다. 그러나 정치상황으로 현장을 가지못하게 되었고 문수산 성쌓는 논의는 일시 중단되었다.

중단된 문수산성 축조논의는 숙종 11년(1685년) 4월 14일에 가서 임금은 판부사(判府事) 민정중(閔鼎重), 병조판서(兵曹判書) 조사석(趙師錫)을 문수산에 파견한다. 상황을 살피고 돌아온 민정중이 보고하기를, “국가에서 강도(江都)를 보장(保障)으로 삼고 있으니, 성(城)을 쌓는 일은 형세가 그만둘 수가 없다”며 “가령 국가에 갑자기 변(變)이 있어서 강도에 들어가더라도 성(城)을 쌓아 고수하지 아니하여 흙담 사이에 주필(駐蹕)하였다가 하루아침에 오랑캐가 삼강(三江)의 옥재(屋材)들을 헐어서 뗏목을 만들어 가지고 물흐름을 따라 내려오면 그들의 방장(方張)한 세력을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하고 강조하자 임금은 말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으니 마땅히 여러 대신들로 더불어 함께 의논하겠다.”고 한다. 또 조사석(趙師錫)도 “<중략>이제 만일 성(城)을 문수산(文殊山)에 쌓으면 곧 도로(道路)에 지장(支障)이 없어서 가히 강도(江都)에 전달(轉達)될 것입니다. 문수산성도 함께 쌓지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하자 임금이 이에 동의한다.
 
결국 숙종 11년(1685년) 5월 13일 기사는 임금이 병조판서(兵曹判書) 조사석(趙師錫)에게 묻자 “<중략>문수산성(文殊山城)에 이르러서는 여러 사람의 의논이 또한 ‘쌓지 않아서는 아니된다’”재차 강조하자 “<중략>강도의 성과 문수산의 성은 같이 쌓도록 하라”는 임금의 명령이 내려지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뤄지지 않고 숙종 16년(1690년) 8월 7일자에 또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 민암(閔黯)이 문수산에 성을 쌓을것을 요청하는 보도가 기술되고 있다.

이로부터 3년 후인 숙종 19년(1693년) 10월 3일자 기사는 “임금이 통진과 문수산과 강도를 요새지라고 하여 성을 쌓아 지키도록 의논하자 영의정 권대운 등이 합사하여 이일을 찬성하였다. 임금이 훈련대장 이의징에게 가서 지형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다”는 내용이 기술됨으로서 시작될듯 보였으나 다른 의견을 가진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사가 숙종 20년(1694년) 2월 22일자에 보도하고 있다.

기사는 임금이 문수산성을 축조할것을 결정하고 지시하였으나 조정의 다른 신하들이 계속 반대해 늦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임금은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었지만 문수산성 축조를 강행하게 된다. 임금은 병조판서 목창명(睦昌明)에게 그 임무를 맡긴다. 목창명은 문수산에 가서 성 쌓을 터를 정하고 돌아와 그림을 그려서 바치고 농사짓는 일에 손상이 있다는 문제를 보고하고, 가을을 기다려 시작해 쌓기를 청하자 마침내 임금이 승인한다. 그리고 숙종 20년(1694년) 9월 13일자 기사는 문수산에 성 쌓는 일이 이미 끝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로서 문수산에 성을 축조하는 제안이 있은지 19년만에 문수산성이 완료됐다. 이후 문수산성은 영조4년(1728년) 가을에 개축하였고, 1812년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다. 1992년부터 김포시가 문수산성 복원사업을 추진해 오고 있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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