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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거시기(?)를 끌여당겨 죽인 젖소부인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⑧

중과 간통하다 남편에게 들킨 부인이 남편 거시기(?)를 끌어당겨 죽인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세종 9년(1427년) 1월 3일이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왕실의 가까운 친척 간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무를 맡아보던 곳인 돈냥부의 정1품 최고 관직) 이지(李枝)라는 사람이 자신의 부인에게 그만 화(?)를 당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지(李枝)가 후처 김씨와 더불어 절에 가서 수일 동안 머물렀는데, 밤에 김씨가 중과 간통하므로 이지가 간통하는 장소에서 붙잡아 꾸짖고 구타하니, 김씨가 이지의 불알을 끌어당겨 죽였다’고 하는데, 그때 따라간 사람이 모두 김씨의 노비였기 때문에 이를 숨겼으니, 외인(外人)(외부 사람)들은 알 수 가 없었다.…”

이지(李枝) : 본관은 전주(全州). 할아버지는 도조(度祖)이며, 태조의 종제(從弟)이다. 8세 때 부모를 여의고 이왕기(李王琦)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뒤에 태조에 의하여 잠저(潛邸)에서 생활하면서 항상 태조의 측근에 있었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당시에는 중랑장(中郎將)이 되어 정기(精騎)를 인솔하고 앞장서서 큰 공을 인정받게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어 상호군(上護軍)에 오른 뒤, 이조·호조·예조의 전서(典書)를 거쳐, 순녕군(順寧君)에 봉하여졌고, 좌상군사(左廂軍士)를 겸하였다. 1398년(태조 7) 이방원(李芳遠)에 의하여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척살되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 일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1400년 방원이 왕위(태종)에 오르자, 유배에서 풀려나서 다시 순녕군에 봉하여졌다. 1414년(태종 14) 영공안돈녕부사(領恭安敦寧府事)에서 우의정에 오른 뒤 좌의정을 거쳐, 1418년 영의정으로 치사하였다가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기일이 되면 반드시 절에 가서 불공을 올렸는데, 특히 향림사(香林寺)라는 절에 불사(佛事)를 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양안(良安)이다. 

 졸지에 자신의 부인에 의해 희한한(?) 죽임을 당한 이지(李枝)는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 고려 말의 무신 겸 정치가이자 조선의 초대 왕)의 사촌동생이었다. 이지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할 때 중랑장(中郞將)(5품 무관 벼슬)이 되어 공을 세워 조선 건국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왕을 따르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공신 칭호)으로 상호군(上護軍)(조선 초기 군사조직인 5위(五衛)의 지휘관)에 올랐던 인물이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이방원(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풀려나 영공안돈녕부사(領恭安敦寧府事)에 오른 사람이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지는 어머니 기일(忌日)(제삿날)과 아버지 기일을 맞아 서울 삼각산에 있는 향림사 절에 가서 제를 올린 후 일(?)을 당한 것이다.

자신의 간통현장을 남편에게 덜미를 잡혀 얼떨결에 남편의 ‘거시기’를 잡아당겨 살해한 부인 김씨는 어떤 사람인가? 김씨 부인을 좀 더 세밀하게 알려면 태종 시대로 건너가야 한다. 

통진판 젖소부인의 살인 사건

태종 15년(1415) 11월 1일, 사헌부(司憲府)(고려와 조선시대, 정치를 논의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관리들의 잘못을 조사하여 그 책임을 탄핵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가 영돈녕부사 이지를 김씨 부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탄핵하는 상소를 임금에게 제출했다. 영돈녕부사 이지의 탄핵 이유가 간통한 여자와 재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남편없는 여자와 아내없는 남자가 재혼을 한 사실이 죄가 될 수 없다고 일축한다. 

“사헌부에서 영돈녕부사 이지를 탄핵했으니, 고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중추원에 속한 종2품 벼슬) 조화(趙禾)의 아내 김씨에게 장가든 때문이었다. 김씨는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중추원에 속한 종2품 벼슬) 김주(金湊)의 딸인데, 아름답고 음란하여 늙을수록 더욱 심했고, 형제와 어미가 모두 추한 소문이 있었다 … 이때에 이르러 헌사에서 또 탄핵하니 임금이 듣고 헌부(憲府)(사헌부)에 전지(傳旨)(임금의 뜻을 담당 관청이나 관리에게 전함)하기를 ‘아내 없는 남자와 남편 없는 여자가 스스로 서로 혼인하는 것을 어찌 반드시 묻겠는가? 하물며 이지가 계실(繼室)(다시 얻은 처)을 취한 것을 내가 실로 아는 바이니 다시는 핵론(覈論)(일의 실상을 조사하여 논박함)하지 말라’ 했다 …”

사헌부는 간통 사건으로 추잡한 소문의 주인공을 아내로 맞이하는 이지에 대해서 경계했지만 태종은 개인 문제로 취급해 더 이상 재론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태종은 태조의 사촌동생의 문제가 되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매우 관대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세종 9년(1427) 1월 3일, 재혼한 이지의 아내 김씨가 또다시 절에서 중과 간통하다 남편의 거시기를 잡아당겨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지가 살해당한 후 이지의 전처 아들인 절제사(節制使)(정3품 무관 벼슬) 이상흥(李尙興)은 아버지 사망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었지만 김씨 부인의 미친 척하는 잔꾀에 의해 ‘거시기(?) 살인 사건’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은 듯 했다. 

“…이지의 전처(前妻) 아들 절제사(節制使) 이상흥(李尙興)이 충청도에서 부고를 듣고 왔는데, 한 남자 종이 김씨에게 알리기를, “상흥(尙興)이 장차〈이 사실을〉형조에 알릴 것입니다.” 하니, 김씨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광(發狂)하여 천치(天癡)처럼 되니, 드디어 일이 잠잠해지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관청에 알려서 시체를 검사하면 원통함을 씻을 수 있을 것이다.”고 했으나, 상흥(尙興)은 그 실정을 알면서도 관청에 알리지 않았으니, 모두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 사람이다.…”

그러나 사헌부는 7개월 후인 세종 9년(1427) 7월 29일, 이번에는 김씨 부인을 ‘봉작(封爵)(관작을 책봉하여 줌) 사칭 사건’으로 잡아들인다. 요즘말로 하면 ‘관직 사칭’으로 구속시켰다는 말이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부인(婦人)의 봉작(封爵)은 반드시 부도(婦道)(며느리가 지켜야 할 도리)가 곧고 바른 사람이라야만 이를 봉하게 됩니다. 돌아간 영돈녕(領敦寧) 이지(李枝)의 아내 김씨(金氏)는 두 번 시집을 갔을 뿐만 아니라 음란한 행실이 드러났는데도 안락 군부인(安樂郡夫人)(조선시대 왕자군(王子君)이나 종친의 아내에게 내리던 외명부의 봉작이다. 왕자군의 아내에게는 정1품의 품계를, 종친의 아내에게는 종1품의 품계를 내렸다.)으로써 제 마음대로 직함(職銜)을 사용하니 죄가 용서될 수 없습니다. 형률에 의거하여 논죄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允許)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 여자를 과거에 귀양보낸 일이 있었던가.”하니, 좌대언(左代言)(조선 초기 승정원에 두었던 정3품직) 김자(金赭)가 대답하기를, “두 번이나 밖으로 귀양보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범한 것은 작은 편이다. 이러한 이상한 여자는 외방(外方)에서 죽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하니, 여러 대언(代言)들이 모두 아뢰기를, “이 여자의 하는 짓은 심히 미워할 만합니다.”하였다.”

이어 8일 후 세종 9년(1427) 8월 8일, 대사헌(정사(政事)를 논하고 백관을 규찰하는 사헌부의 장관) 이맹균 등이 세종에게 상소하여 김씨를 한양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겸 대사헌(兼大司憲) 이맹균(李孟畇) 등이 상소하기를, “일찍이 돌아간 영돈녕(領敦寧) 이지(李枝)의 아내 김씨가 거짓으로 봉작(封爵)을 일컬은 죄에 대하여 형률에 의거하여 아뢰었으나 윤허를 얻지 못했습니다. 신 등은 가만히 생각하기를, 만약 공신의 후손이라고 해도 여자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다면 본종(本宗)(성(姓)과 본(本)이 같은 일가붙이)의 공로와 죄과(罪過)에 관계되지 않을 것이며, 공신(功臣)의 아내라고 해도 이미 이것이 음부(淫婦)(주로 남녀 사이의 성적인 면과 관련해서, 성격과 행동이 어지러운 여자)라면 이지(李枝)의 정처(正妻)(처첩을 구별하는 중 본처를 의미한다)로서 논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더러운 행실이 온 나라에 드러나서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고 미워한 지가 오래입니다. 다만 범죄한 것이 사면(赦免) 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감히 논청(論請)하지 못했습니다만, 만약 이를 두고 논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길이 존영(尊榮)(지위가 높고 영화로움)을 누리게 한다면 부인의 절개를 힘써 닦게 할 수가 없을 것이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거짓으로 관명(官名)을 빈 죄를 논하여, 그대로 밖으로 내쫓아 서울에 왕래하지 못하게 하여 부인이 지켜야 할 도리를 힘쓰도록 하소서···”

이에 세종은 이지의 전처 아들  조복초(趙復初)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의 어머니는 서울 10리(里) 밖에서는 기내(畿內)(경기도 일원)와 기외(畿外)(경기도 밖)를 논할 것 없이 자원(自願)에 따라 거주하되, 서울 안에는 왕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하니, 김씨는

즉시 통진현(通津縣)으로 돌아갔다.···”

통진현(通津縣) : 옛 통진(通津)에 대한 첫 지명은 940년 고려 태조왕 23년에 ‘분진(分津)’이었던 것을 고친것이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 사용되었다.(통진군+김포군+양천군=김포군) 옛 통진에 속한 구역은 현 양촌읍, 통진읍, 대곶면, 월곶면, 하성면 지역이다. 통진(通津) 지명의 변천과정에 대해서는 󰡔대동지지󰡕에 소개하고 있다. “본래 백제 평회압(平淮押)[별사파의(別史波衣))라고도 한다.] 인데 후에 비사성(比史城)으로 고쳤다.(방언(方言)에 암석(岩石)을 칭하여 파의(波衣:바위)라고 하였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분진(分津)으로 고치고 장제군(長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 23년(940)에에 통진(通津)으로 고쳤다.”

결국 김씨 부인은 영돈녕부사 이지의 부인에게 내리는 안락군부인의 작위를 사칭한 죄로 서울에서 10리 밖에서는 자유롭게 거주하되 서울 안에는 왕래하지 말 것을 지시하자 김씨 부인은 전 남편인 조화의 농장이 있는 통진현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사헌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세종 9년(1427) 8월 8일, 통진현의 집에 거주하게 한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다시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른다. 그 이유는 김씨 부인의 

전 남편인 조화의 아들인  조심(趙深)이 통진현의 수령으로 있고, 다른 아들도 벼슬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불편한 상황이 초래된다는 것이다. 

세종 9년(1427) 8월 8일,

“···지신사(知申事)(조선 초기, 승정원(承政院)의 으뜸인 정삼품 벼슬. 왕의 명령으로 출납을 맡은 승지(承旨)나 대언(代言)의 으뜸 벼슬이다.) 정흠지(鄭欽之)가 아뢰기를, “통진(通津)에는 이 여자의 전 남편의 농장이 있는데, 지금 귀양을 당하여 의(義)가 끊어진 집에 거주하게 함은 심히 옳지 못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맡은 관사(官司)의 책임이다.”하니, 대언(代言) 등이 아뢰기를, “김씨의 아들 조심(趙深)이 지금 수령이고, 여러 아들도 또한 들어와 벼슬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신 등은 불편하다고 여깁니다 ···”

공신의 아내, 죄를 물을수 없다

 세종 9년(1427) 8월 16일, 우사간(右司諫)(려시대 중서문화성에 소속되어 간쟁을 맡아본 정6품의 벼슬) 대부(大夫)( 고려와 조선 시대, 품계에 붙여 부르는 명칭. 고려 시대에는 종이품에서 종오품까지 또는 정이품에서 종사품까지의 벼슬에, 조선 시대에는 정일품에서 종사품까지의 벼슬에 붙였다.) 김효정(金孝貞) 등이 상소하기에 이르는데 행실이 음란한 여자로 소문이 널리 퍼져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이를 추잡하게 여기는데 더욱이 관직을 사칭하기까지한 김씨에게 세종이 법으로 엄히 처분하지 않고 전 남편의 통진농장으로 보낸 일은 부당한 일로 변방으로 귀양 보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씨의 전 남편 아들 조심(趙深)에 대해 ‘그 어미가 이미 사람 축에 끼이지 못하고 밖으로 내쫓겼으니, 그 아들은 부끄러운 얼굴로 통진의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릴수 있겠느냐’며 ‘조심의 관직을 파면시켜서 인륜과 풍속을 바로 잡아야한다’고 요구하고 나선다. 하지만 세종은 조심의 파면요구에 대해 보류시켰다. 

  세종 9년(1427) 8월 16일, 

 “…돌아간 영돈녕(領敦寧)으로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한 이지(李枝)의 후처(後妻) 김씨는 행실이 음란하고 방자(放恣)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이를 추잡하게 여기는데, 지금 변송(辨訟)(소송을 가려서 밝힘)하는 즈음을 당하여 멋대로 작(爵)(벼슬의 위계)을 일컬었으므로 헌사(憲司)에서 법으로 처하기를 청하였으나, 전하께서는 특별히 관대한 은전에 따라 다만 그 아들로 하여금 기내(畿內)(경기도)의 농장(農庄)으로 거느리고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것은 자기에 알맞게 하고 스스로 편리하게 하여 오히려 즐기는 마음대로 하도록 시켜준 것입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벌을 받는다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변방으로 옮겨서 나라 백성들의 기대를 통쾌하게 하소서.” 

세종은 김씨 부인에 대해 전 남편인 조화의 통진농장으로 내보낸 이유에 대해 ‘김씨가 음란한 행실을 저지른 죄는 이미 용서한 일이고, 관작을 사칭한 일에 대해서는 옳지 않은 일이 틀림이 없지만  공신(功臣)의 아내가 죄를 범하여도 남편의 공으로 죄를 면하게 된 사람이 있으니, 김씨가 이미 이지(李枝)의 아내가 되어 종실(宗室) 사람으로서 죄를 주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하면서 보류시켜 놓았던 김씨 부인의 전 남편의 아들 조심의 관직만을 파면시켜 버리고 마는 결정을 내린다.

“…또 아들 조심(趙深)은 지금 지무산현사(知撫山縣事)가 되었으니, 그 어미가 이미 사람 축에 끼이지 못하고 밖으로 내쫓겼으니, 그 아들은 부끄러운 얼굴로 임지(任地)에 있으면서 한 고을의 표준이 되게 함이 옳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조심의 관직을 빨리 파면시켜서 인륜(人倫)을 바로 잡고 풍교(風敎)(교육이나 정치를 잘하여 세상의 풍습을 잘 교화시킴)를 소중하게 여기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대궐 안에 보류시켜 두고 내려보내지 아니하였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그러나 음란한 행실을 방자(放恣)하게 한 죄는 사죄(赦罪) 전의 일이며, 관작(官爵)을 사칭한 것은 비록 옳지 못하다고는 하지만, 공신(功臣)의 아내가 죄를 범하여도 남편의 공으로 죄를 면하게 된 사람이 있으니, 김씨가 이미 이지(李枝)의 아내가 되어 종실(宗室)에 열을 지었으니 역시 죄를 주는 것은 부당하다” 하면서, 다만 조심의 관직만 파면하도록 명하였다…”

세종 9년(1427년) 8월 20일, 집의(執義)(사헌부 종3품 벼슬)  김종서(金宗瑞) 등이 김씨 부인이 통진현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강력하게 세종에게 전달한다.

“…신 등이 요사이 돌아간 영돈녕(領敦寧)(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의 약칭)으로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한 이지(李枝)의 아내 김씨의 죄를 소(疏)에 갖추어 신청했사오나, 소를 대궐 안에 보류시켜두고 몰래 밖으로 내쫓았으니 이것이 비록 전하께서 악을 숨겨주는 아름다운 뜻이오나, 그 악을 징계하는 도리에는 어찌 되겠습니까. 더구나 통진의 전서(田墅)(농장)는 원래 조화(趙禾)가 경영하던 것인데도, 김씨가 유숙하면서 음란한 행실을 하고, 또 다른 성(姓)에게 시집갔으므로 그가 조씨(趙氏)와는 의(義)가 끊어졌으니, 어찌 이 전서(田墅)에 거처하면서 그 이로움을 누리겠습니까. 하물며 서울과 지극히 가까우니 더러운 사람으로서 마땅히 처할 곳이 아닌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그를 기외(畿外)(경기도 밖)로 내쫓기를 명하여 악을 징계하여 부인이 지켜야 할 도리를 힘쓰게 하소서’ 

사헌부는 김씨 부인의 관직사칭에 대해 정식 소를 제기했지만 법으로 처리하지 않은 세종의 행위에 대해 문제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나선다. 더욱이 김씨 부인을 전 남편인 조화의 통진농장으로 보낸 일은 부당한 처리였음을 강하게 지적한다. 결국 세종은 사헌부의 지적을 수용하고 김씨 부인을 강화도로 귀양을 보낸다.

“…‘김씨가 이미 종실(宗室)(임금의 친족)의 친척이 되었으니, 관작(官爵)을 거짓 일컬은 죄는 가할 수 없는 것이다. 음란한 행실을 방자하게 행한 범죄는 사죄(赦罪)(저지른 죄를 용서하여 죄인을 풀어 줌) 전에 있은 일이었으나, 서울에는 살게 할 수 없으므로 밖으로 내쫓았던 것이다. 통진의 별업(別業)(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공신이나 귀족 따위의 세력가들이 소유하고 있던 대토지)은 전 남편인 조화(趙禾)가 경영하던 곳이므로 역시 살 수 없으므로 강화(江華)로 옮겼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했다”

세종은 “김씨가 음란한 행실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미 종실의 친척이 되었으니 관직 사칭의 죄를 묻기에는 어렵다는 명분을 내세워 강화도로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끝냈으니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이로써 간통 사건 주인공인 조선판 젖소부인 김씨는 강화도 귀양살이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러나 세종은 강화도로 귀양시킨지 한달여만에 이지의 후처 김씨를 파주 교하의 심악으로 옮겨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다. 

세종 9년(1427) 9월 27일의 일이다.

  “전지하기를, “이지(李枝)의 후처(後妻) 김씨를 심악(深岳)(경기도 파주 지역의 옛 지명)의 농막(農幕)에 옮겨 살게 하라.” 하였다.”

또한 이로부터 4개월이 지난 세종 10년(1428) 윤4월 1일, 세종은 “영돈녕으로 치사한 이지(李枝)의 아내 김씨(金氏)를 석방”시켰다.

장모와 바람난 조화, 맞불놓은 김씨 부인

그런데 김씨 여인의 간통 사건의 내면을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종 9년(1427) 8월 8일, 실록은 김씨 부인의 간통사건 실마리를 전하고 있다. 즉 김씨 부인의 간통행각 사건을 만들어 갈 수 있었던 민낯이 있었다. 

“…처음에 김씨는 조화(趙禾)의 아내였다. 조화가 일찍이 김씨의 어머니에게 간통하니 김씨가 이를 알고 김씨도 또한 허해(許晐)와 몰래 간통하였다.…”

김씨는 처음에는 통진에 사는 조화의 아내였다. 그러나 남편인 조화가 아내인 김씨의 어머니를 간통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조화의 아내는 이 청천벽력 같은 사건을 알게 되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다른 여인네들과 바람을 피우는 것도 참고, 첩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인내해왔건만 자신의 어머니와 바람을 피운 사실을 두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씨는 이에 ‘맞불’을 놓는다. 요즈음 말로 ‘맞바람’을 핀 것이다. 김씨 부인은 허해(許晐)라는 사람과 몰래 간통을 하게 되는데 하루는 조화가 첩을 데리고 외박을 하자 김씨도 이에 질세라 그녀가 만나고 있던 허해라는 남자를 집안으로 불러들인다. 그런데 허해라는 남자가 그만 김씨와 하룻밤 정사를 깊게 나눈 후 돌아가면서 그만 벽에 걸어놓은 김씨의 남편 조화의 옷을 입고 돌아가고 말았다.

첩과 바람을 피우고 새벽녘에 들어온 김씨 남편인 조화는 옷을 새로 입으려 했으나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신의 옷이 아닌 것이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조화는 김씨 부인을 다그쳤다. 남편의 다그침에도 김씨 부인은 당황해하지 않고 “오늘밤에 허해가 와서 잤는데 옷을 잘못 입고 갔다”고 태연스럽게 대답을 한 것이다.

남편인 조화는 노해서 꾸짖었으나 김씨는 “당신의 하는 짓이 이와 같은데 어찌 나를 허물하는가. 당신이 만약 말을 퍼뜨리면, 당신이 먼저 수레에 오른 뒤라야 나도 다음 수레에 오른다”고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토해낸다.

“…김씨도 또한 허해(許晐)와 몰래 간통하였다. 하루는 조화가 첩을 데리고 외박을 하였는데 김씨도 또한 허해를 끌여들여 유숙시켰으나, 허해가 옷을 벗어 조화의 옷걸이에 걸어놓았다가 돌아갈 때에 잘못하여 조화의 옷을 입고 가버렸다. 조화가 새벽에 안방에 들어와서 옷을 꺼내 입으니 옷이 몸에 맞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알고 이를 힐문하니, 김씨가 대답하기를, “오늘 밤에 허해가 와서 유숙했는데 잘못 입고 갔습니다.”하였다. 조화가 노하여 꾸짖으니, 김씨가 말하기를, “당신의 하는 짓이 이와 같은데 어찌 나를 허물하는가. 당신이 만약 말을 퍼뜨리면, 당신이 먼저 수레에 오른 뒤라야 나도 다음 수레에 오른다.…”

남편인 조화는 자신이 저지른 행태를 반성하지 않고 꾸짖기만을 계속하자 김씨 부인은 더욱 대상 여부를 구분하지 않고 간통애정 행각을 확대해간다. 

“…조화는 그에게 침을 뱉았다. 김씨는 더욱 방사(放肆)(제멋대로 하다)하여 거리낌이 없어서 또한 가노(家奴)(집에서 부리는 노비) 박송(朴松)이란 자와 간통하였으므로…”

홧병이 들어선지 아니면 계속된 바람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김씨 부인의 남편인 조화가 사망하자 김씨 부인은 본격적으로 남자를 향해 모든 것을 쏟게 된다. 이렇게 해서 김씨 부인은 영돈녕부사 이지를 새로운 남자로 선택해 재혼하게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재혼한 김씨 부인을 영돈녕부사 이지가 만족시켜주지 못했는지 김씨 부인의 애정행각은 식을 줄 몰라 닥치는 대로 바람(?)을 피워가 마침내 중과 애정행각을 벌이다 들킨 당혹스러움이 남편의 거시기(?)를 잡아당겨 사망케 한 것이다.

이렇듯 고매한 품위와 교양으로 철갑을 두른 사대부들이나 그 부인들도 밤에는 사서삼경의 도리에 그다지 충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간통 애정행각은 끊이질 않는다.

조선시대 간통 사건이 얼마나 일어났는지 실록을 검색해보니 무려 3,837건이나 검색되어 깜짝 놀랐다. 모든 사항은 반드시 그 안에 원인이 있다. 그래서 맞불(?)을 놓거나 바람(?)을 쐬러나가는 것이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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