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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철책선, 연산군 지하에서 후회하다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⑦

김포반도 주민 모두가 쫓겨난 일이 있었다면 믿어질까? 이 믿어지지 않는 일이 조선시대에 실제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울뿐이다. 정확히 연산군 시절 1505년 7월의 일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연산 11년 7월 1일자 기사는 이같은 믿어지지 않을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 청령포 금표비/강원도 영월군 남면. 일반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의 제약을 표시하는 비석.
연산군은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은 누구나 연회를 베풀고 놀이하는 곳이 있었다. <중략> 이제 장의문(藏義門) 밖에 산 밝고 물 고와 참으로 한 조각 절경이므로, 금표(禁標)를 세워 이궁(離宮) 수십 칸을 지어 잠시 쉬는 곳으로 하고자 하니, 의정부와 의논하여 지형을 그려서 바치라”하매, 영의정 유순 등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윤당하십니다”하였다.

이로부터 동북으로 광주(廣州)·양주(楊州)·포천(抱川)·영평(永平)에서, 서남으로는 파주(坡州)·고양(高陽)·양천(陽川)·금천(衿川)·과천(果川)·통진(通津)·김포(金浦) 등에 이르는 땅에서 주민 5백여 호를 모조리 내보내고, 내수사(內需司)의 노자(奴子)(종을 말한다)를 옮겨서 채우고, 네 모퉁이에 금표를 세우고, 함부로 들어가는 자는 기시(棄市)(죄인을 사형하여 주검을 묻지 않고 거리에 버리는 것)를 하니, 초부(樵夫)·목동(牧童)의 길이 끊겼다.

이 기사에 의하면 ‘금표’는 연산군의 ‘놀이’를 위해 김포반도 전역에 살던 주민 전부를 소개시켜 버리고 그야말로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 금표구역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야말로 개죽음을 면치못했던 것이다.

이 살벌한 금표구역을 말해주는 8월21일자 기사는 “<중략> “망원정(望遠亭)의 이남으로 1백 리를 한계로 하여 금표(禁標)를 세우고 <중략> “망원정에서 이남으로 가면 부평(富平) 관아의 문에 이르는데, 관아를 거쳐 바닷가까지 40리쯤과, 양천으로부터 서쪽으로 김포(金浦)·통진(通津)을 거쳐 갑곶(甲串)에 이르는 70여 리쯤은 다 바다가 경계가 되므로 표를 세울 것이 없으며, 표를 세워야 할 곳은 망원정으로부터 부평에 이르는 사이뿐입니다.

그러나 먼저 금표를 세우면 세 고을에 사는 백성은 그 수가 매우 많은데, 다 양화도(楊花渡)를 거쳐서 분주히 나갈 것이므로 소요(騷擾)하게 될 것 같사오니, 감사(監司)로 하여금 먼저 모조리 내보내게 한 뒤에 표를 세우게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좋다.”하였다.

이같은 정책(?)을 시도한 연산군이라는 사람은 어떤 왕인가? 연산군은(1494-1506)은 성종과 어머니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조선 제10대 왕이다.

그는 태어난 해에 어머니 윤시가 왕비로 책봉되자 연산군에 봉해졌으며 1479년 윤시가 폐출된 후 5년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1494년 성종이 죽자 19세의 나이로 왕에 등극했는데 곧 20세가 되므로 섭정을 받지 않고 즉위하자마자 직접왕권을 행사했다.

초기 4년은 그러대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무오년과 갑자년 두 차레의 사화를 겪으면서 포악한 정치를 일삼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으로 강등된 그는 강화도 교동에 유배된 지 2개월만에 전염병으로 죽었다. 재위기간은 12년이었으며 죽을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연산군의 놀이를 위해 세워진 ‘금표’에 대해서 알아보자.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민간인 통제구역’이 된다. 민간인 통제구역을 알리는 금표비가 김포의 한강 건너 동네인 고양시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금표비는 높이가 1.47미터, 너비가 0.55미터, 두께가 0.23미터이다.

금표비 화강암 비석에는 “금표내범입자 논기훼제서율처참” 으로 표기되어 있다. 즉 금표안으로 들어온 자는 삼족열족이 가능한 기훼제서율로 처참한다‘는 것으로 금표구역은 지금의 고양시, 파주시, 양주군, 포천군, 남양주시, 광주시, 미금시, 김포시 등이 포함되었다.

연산군은 이 구역을 관리하기 위해 금표검찰도사, 금표검거인 등의 관직도 만들었으며 금표 내의 출입이 허용된 자들을 위하여 금표통행패 100개를 한정적으로 발급하기도 하였다. 

김포지역이 연산군 놀이터 구역에 포함되자 문제가 발생했다. 김포반도는 한강을 끼고있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한양으로 들어서는 뱃길을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었다. 배가 한양으로 들어설때 김포뱃사람이 배에 올라 뱃길을 안내해 왔던 것이다.

 연산12년 2월 9일자 기사는 이같은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경기관찰사 박원종이 왕에게 “김포, 통진현 등의 강가를 따라 사는 백성들은 수로를 잘 알고 있으므로배로 물건을 운반할때에 침몰할 염려가 없었는데, 지금 다시 금표를 물리고 민가를 몰아내면 다만 도둑이 생길뿐만 아니라 배로 실어나를 때에 인도할 사람이 없어 복선할 염려가 있습니다”라고 고하자 왕은 ”김포, 통진 강가에 사는 민가는 금표안에 넣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다.

경기관찰사 박원종의 소명에 의해 일부이지만 김포반도는 이렇게 해서 한강변 마을 일부가 금표구역에서 제외되는 행운을 가져오게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이렇게해서 김포반도의 한강 변 마을은 연산군의 폭정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얻었지만 지금 김포반도는 새로운 금표인 국방부 철책선에 의해 40년 이상을 갇혀오고 있다. 이 새로운 금표인 한강 철책선에 대해 연산군이 지하에서 알면 그때 제외시켰던 일을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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