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김포역사 김진수의 김포역사이야기 실록을 펼쳐 김포를 말하다(2013)
김포도 죄인들의 유배지였다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④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유독 ‘귀양을 보냈다’라는 글이 자주 띈다.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죄인이 귀양살이를 했을까하는 의문이 일었다.

더욱이 귀양지는 주로 어디로 보냈을까도 궁금했다. 우선 실록 검색란에 ‘귀양’을 삽입해 보았다. 무려 6,012건이나 나타나 깜짝놀랐다. 과연 6천여명의 죄인이 유배를 당했을까?

조선시대 귀양살이 한 죄인들이 몇 명인지를 알 수 있는 자료 중 하나가 1941년 경성일보사가 발행한 <조선인명록>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조선시대 340년간 귀양보낸 죄인은 총700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귀양은 고려.조선시대에 죄인을 먼 시골이나 섬으로 보내어 일정한 기간 동안 제한된 곳에서만 살게 하던 형벌 중에 하나이다. 초기에는 방축향리[放逐鄕里] 즉 벼슬을 삭탈하고 제 고향으로 내쫓던 형벌의 뜻으로 쓰다가 후세에 와서는 도배(徒配), 유배(流配), 찬배(竄配), 정배(定配)의 뜻으로 쓰였다

유배는 왕족이나 고위 관료들에 한해 유배 지역 내의 일정한 장소를 지정하고 그 곳에 유폐시키는 '안치'와 주위에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를 심고 이 곳밖에 나오지 못하도록 한 '위리안치(圍籬安置)'도 있었다.

   
▲ 얼마전 제주에서 열린 유배 행차 시연모습

강화는 왕실 유배지
그럼 죄인의 귀양(유배)은 어느곳으로 보냈을까? 자료에 의하면 유배지는 지역적으로 삼수갑산과 같은 함경도, 평안도 국경지역이 가장 많았고, 경상. 전라도의 거제도. 진도추자도 등 섬 지방도 자주 이용되었다. 영조 때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흑산도와 같이 험한 곳이나 무인도에는 유배를 금지시켰다.

우리 김포지역과 맞닿아 있는 강화도 역시 죄인의 유배지로 특히 왕실의 유배지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한양과 가까운 강화도에 왕실의 유배지였던 것은 역모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아 지속적으로 그 동정을 살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유배된 왕실의 인물로는 희종과 조선시대의 안평대군, 연산대군,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 또한 선조의 손자이자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 인조의 다섯째 아들 승선군, 이밖에도 광해군의 폐비 유씨와 상계군의 아들인 익평군,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과 할아버지인 은언군, 홍선대원군의 손자이며 고종의 조카인 영선군 등도 강화도로 유배를 당했다.

그렇다면 김포지역에도 죄인의 유배지 장소였을까? 우리는 흔히 유배지라함은 변방이나 섬지방을 생각하는 상식을 갖고있다. 영화나 드라마 영향이 크다하겠다. 특히 김포지역은 한양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조건때문에 유배지였을꺼라는 상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포지역도 죄인들의 유배지였음을 실록에서 찾을수 있다.

공복 벗고 부채질 해 김포 유배 기록
<조선왕조실록> 영조 41년(1765년) 6월 7일자 기사는 “임금이 진전(眞殿)의 재실(齋室)에서 재거(齋居)하였다. 몸소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서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대축(大祝) 윤승렬(尹承烈)이 공복(公服)을 벗고 전사청(典祀廳)에서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하여 윤승렬을 김포군(金浦郡)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고 기술하고 있다.

즉 임금이 선왕들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는 재실에서 축문을 담당하는 윤승렬이 제복을 벗고 부채질을 했다는 이유로 ‘김포군’으로 귀양을 명한것이다. 영조가 예를 갖추지 못한 신하에게 귀양명령을 내린것이다.

‘갑오개혁’ 김홍집도 김포 유배
또 고종 18년(1881년) 6월 24일자 기사는 “김홍집(金弘集)을 김포군(金浦郡)에 찬배(竄配)하였다. 누차 신칙(申飭)을 내렸으나 끝내 나와 숙배(肅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김홍집은 조선후기의 정치가로서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갑오개혁을 단행했던 자이다. 과격한 개혁과 아관파천으로 친러파 내각에 밀려나게 되었고 광화문에서 폭도들에게 피살됐다.

그리고 고종 35년(1898년) 10월 1일자 기사에는 “법부대신(法部大臣) 신기선(申箕善)이 아뢰기를, “경기(京畿)의 연해지역에 찬배(竄配)한 죄인 조병식(趙秉式)의 배소(配所)를 통진군(通津郡)으로 정하였는데, 연한(年限)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삼가 폐하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3년으로 마련하라”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미 죄인 조병식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섬지역에서 통진군(지금의 양촌면, 대곶면, 통진읍, 하성면, 월곶면지역을 말한다)으로 유배지를 옮기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조병식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황국협회를 선동해 독립협회 타도에 나선 인물로 수많은 개화당 요인을 투옥시킨 자이다.

실록은 윤승렬, 김홍집, 조병식 세사람의 유배지로 ‘김포’지역을 귀양살이 장소로 결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유배지 장소가 옛 통진군과 김포군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지 않아 아쉬울뿐이다. 이 부분은 좀더 전문적인 연구자료를 통해 확인해야 할 것 같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저작권자 © 미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진수 발행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