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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어 결혼 못하면 나라 책임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③

조선왕조실록 성종 2년(1471년) 2월27일자 기사를 보다 ‘시집갈 밑천을 대줬다’는 사실에 시선이 멈쳤다.

기사의 내용은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중략>통진(通津)에 사는 선처공(宣處恭)은 딸이 장년(壯年)이 되었으나 집안이 궁핍하여 시집을 보내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자장(資裝)(시집갈 밑천)을 지급하여서 제때에 시집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시행했다는 것이다.

실록이 전하는 말 그대로 이해하면 ‘결혼비용이 없는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결혼비용을 지원해줬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결혼 비용 내줬던 조선
다시 말하면 선처공이라는 김포사람이 집안사정이 여의치 않아 국가에 시집갈 밑천, 즉 결혼비용을 요구하자 왕이 이를 허락했다는 내용이다.

또 태종14년(1414년) 6월20일 기사에 호조의 보고는 “한양도성내 환과고독(의지할 것 없는 사람)이 164명인데 이 중 80세 이상이 31명, 맹인이 19명으로 조사됐다. 이울러 전라도에 100세 된 자가 1인, 80세가 100명인데 “30세가 지나도록 결혼하지 못한 여자 5인은 관청에서 결혼밑천을 주어 독촉하여 시집하게 하소서”라고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30세가 되도록 시집장가 들지 못한 자에게 국가에서 결혼보조금을 지급요청한 것으로 보아 기준 년령은 30세인 듯하다. 즉 30세까지 시집장가를 가지 못하면 결혼보조금(?)을 지급받아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왜 개인혼사까지 관여했을까?
<경국대전>은 이러한 제도를 고조(顧助)라고 한다. 혼인비용이 없어 서른이 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하면 나라에서 비용을 부조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국가에서 개인의 혼사까지 관여한 그 근본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1491년 1월 6일자에 성종은 집안 사정으로 혼인하지 못한 처녀들의 혼인 비용을 관에서 부담하도록 하는 이유를  “인륜의 도리는 혼인보다 중한 것이 없고, 제왕의 정사는 원녀(怨女)·광부(曠夫)가 없게 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녀란 혼인을 못하여 원한을 갖게 된 여인을 말하며, 광부란 장년의 독신 남자를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 광(曠)이란 글자는 허송세월을 했다는 뜻이다.

즉 백성들이 혼인을 하지 못함으로 해서 원한을 갖거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하는 것을 왕의 중요한 정사의 하나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만 그 대상이 오로지 양반집 자녀만이 결혼보조금 지급을 받을 수 있다는데 한계가 있었을 뿐이었다.

오늘날 있어도 좋을 옛 제도
2005년 보건복지부가 결혼한 신혼부부 305쌍에게 결혼비용을 조사한 결과 평균 1억2천944만원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발표한 일이 있다. 신랑측이 9천609만원, 신부측이 3천335만원을 각각 부담해 신랑이 3배 가량 더 내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결혼 비용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주택마련비로 나타났다.

정말 돈 없으면 결혼할 수 없는 사회가 됐다. 이러한 경제적 환경이 최근 결혼년령을 늦추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30살이 넘어 시집장가 가는 일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제 조선시대 시집장가 가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결혼보조금을 지급했던 정책(?)을 도입해 원한과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우선 김포시에서라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결혼하지 못한 30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결혼비용을 보조할 수 있도록 ‘결혼보조금 지급을 위한 조례 제정’ 청원을 누군가 시도했으면 좋겠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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