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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어깨에는 각이 살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는 각이 살고 있다

                                                   정진혁

 

나는 어느 생의 방파제에서 떨어졌다

실업이 자꾸 나를 밀었다

어깨를 가만히 세우면 어긋난 각들이 살 속을 파고들었다

떨어진 어깨에 모난 말들이 터를 잡았다

 

깨진 것들은 왜 타인의 얼굴을 하는가

 

수박은 박살이 나고 병은 깨지고 그해 여름도 산산이 부서졌다

어깨는 어느 생의 모퉁이였다가 나였다가 떨어진 각을 아는 척했다

 

팔을 들었다 내릴 때마다 각들이 서로 찌르는 소리가 났다

그동안 너무 오래 서성거렸다

 

걸음걸이가 세모다 표정이 세모다

가슴 언저리에도 세모가 자라기 시작했다

세모를 걸으며 나는 충분히 무모했다

실업은 질기고 캄캄했다

밤마다 도처에 머물던 각들이

일제히 어깨로 달려와 수런거렸다

 

나는 말수가 적어졌고 대신 각들이 우두둑 소리를 냈다

 

떨어진 각도를 지우기 위해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았다

 

나를 놓친 시간은 까맸다

죽은 숫자들이 우글거리는 달력을 떼어 부채질을 했다

그해 여름의 날짜들이 떨어지며 각이 되었다

 

(정진혁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시선 0052, 2020년)

 

[작가소개]

정진혁  충청북도 청주. 공주사범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2008년『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간잽이』, 『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2009년 구상문학상 젊은 작가상, 2014년 천강문학상.

 

[시향]

 실업은 어깨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겪는 일이다 시인이 실업에 내몰렸을 때, 깨진 어깨의 각들이 속살을 파고들었다 누군가의 별것 아닌 말 한마디도 유독 어깨를 아프게 한 것이다 한 번 어깨가 깨지면 사소한 일에도 마음의 각이 서고,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자아가 고개를 들곤 했다

 “깨진 것들은 왜 타인의 얼굴을 하는가”라고 시인은 짐짓 물어보듯 고백하고 있다 은유일 수 있겠으나, 만만한 수박을 박살내고 작은 술병을 깨부수어 현실을 표출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인의 여름은 그렇게 산산이 부서졌다 깨진 어깨는 누군가의 생의 모퉁이일 수도 있지만 화자 자신일 수도 있다 그 깨진 어깨가 시인의 각을 아는 척했다는 것은 시인에게 크나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팔을 들었다 내릴 때마다 어깨의 어긋난 각들이 서로 찌르는 소리를 냈고, 걸음걸이와 표정에서도 뾰족한 각이 자라나고 마침내 가슴 언저리에도 세모가 자라났다 세모를 걷는 동안 시인은 충분히 무모했음을 털어놓고 있다

 “실업은 질기고 캄캄했다/ 밤마다 도처에 머물던 각들이/ 일제히 어깨로 달려와 수런거렸다”

이처럼 실업의 여파는 끈질기게 앞을 가려서 밤마다 어깨 힘을 빼앗아 갔고, 차츰 말수가 적어지고 어깨를 지탱시켜주던 자존심의 각들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부러졌던 것이다 그러나 주위 아무에게도 기대려 하지 않았다 떨어진 각도를 감쪽같이 지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통의 그 여름을 가리키는 달력을 떼어, 부채질을 하니 고통의 날짜들이 떨어지며 어깨에 다시 각이 살아났다 생의 엄청난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詩로 승화시킨 시인의 내공과 함께하는 내내 행복했다

글 : 박정인(시인)

정진혁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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