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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자전

                  슬픔의 자전

                                                      신철규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차 있다

 

타워팰리스 근처 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의 인터뷰

반에서 유일하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타워팰리스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무허가 건물들

초대받지 못한 자들의 식탁

 

그녀는 사과를 매만지며 오래된 추방을 떠올린다

그녀는 조심조심 사과를 깎는다

자전의 기울기만큼 사과를 기울인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속살을 파고드는 칼날

 

아이는 텅 빈 접시에 먹고 싶은 음식의 이름을 손가락에

물을 묻혀 하나씩 적는다

 

사과를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끊어질 듯 말 듯 떨리는 사과 껍질

그녀의 눈동자는 우물처럼 검고 맑고 깊다

 

혀끝에 눈물이 매달려 있다

그녀 속에서 얼마나 오래 굴렀기에 저렇게

둥글게 툭툭,

사과 속살은 누렇게 변해가고

 

식탁의 모서리에 앉아 우리는 서로의 입속에

사과 조각을 넣어준다

한입 베어 물자 입안에 짠맛이 돈다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우리는 먹먹했다

 

(신철규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 시인선 096, 2017년)

 

[작가소개]

신철규  경남 거창 출생(1980).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2019년 신동엽문학상 수상.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심장보다 높이』

 

[시향]

 대도시의 노른자위 땅에 고급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빈민촌 무허가 건물들에 사는 사람들은 더 외곽으로 내몰리기 마련이다 ‘타워팰리스 근처 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의 인터뷰’에서 보듯 ‘반에서 유일하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그 아이의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차 있다’

 시인은 타워팰리스와 근처 빈민촌을 동시에 소환함으로써 이 시대 대도시의 두 얼굴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린 시절, 가난의 공간에 가담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식탁에 앉아 사과를 깎으려는 순간, 갑자기 그녀의 그늘졌던 시간 속으로 회기하게 된다 사과를 매만지며, 새 아파트 건립으로 인해 더 변두리로 추방되었던 기억에 사로잡힌 채, 지구처럼 둥근 사과를 조심조심 깎는다 ‘자전의 기울기만큼 사과를 기울이고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사과의 속살을 자른다 지금 그녀가 사과를 자르는 행위는 어린 시절 그녀의 불행했던 작은 우주를 자르는 일과 다름 아닐 것이다

 ‘아이는 텅 빈 접시에 먹고 싶은 음식의 이름을 손가락에 물을 묻혀 하나씩 적는다’

 가난의 그늘은 짙고 깊다 사과를 한 바퀴 돌려 깎을 때마다 그녀의 기억처럼 사과 껍질은 끊어질 듯 말 듯 떨리고, 젖은 그녀의 눈동자는 우물처럼 검고 맑고 깊다 그녀 속에서 오래 굴러 둥글게 뭉쳐진 눈물이 흘러 입술을 타고 혀끝을 적신다 그 사이, 잘라 놓은 사과의 속살이 갈변한다 세상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인 것처럼 식탁 모서리에 앉아 그녀와 화자는 서로의 입속에 사과 조각을 넣어준다 한입 베어 물었을 때 입안에 짠맛이 돌았다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먹먹했다고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 자전을 시작’한다는 말을 천착穿鑿해 볼 필요가 있다 성인이 되어 새 생활을 개척해 나아간다는 말로 읽히는데, 어릴 적 상처로 말미암아 아직도 ‘먹먹’하다는 결구에서 공감이 배가倍加됨을 느끼게 된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어린날의 상처를 잊지 못하는 것은 <슬픔도 지구처럼 자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 : 박정인(시인)

신철규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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